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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집(金集)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4|조회수14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서 성혼, 김장생의 문인. 한양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 양간공후 판군기감사공후 관찰사공후 의정공후 대사간공후 사계후 문경공파의 파조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나중에 아버지 김장생에게도 사사. 아버지 김장생, 제자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함께 기호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와 노론, 소론 양당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때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은퇴하였으며 인조반정 이후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효종 때는 김상헌, 안방준과 함께 국가 원로로 활동했고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인과 기호학파의 종통으로 노론과 소론의 마지막 공동 조상이다.

2. 생애

1574년(선조 7년) 예학자인 아버지 김장생(金長生)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 어머니 창녕 조씨(昌寧 曺氏)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예에 뛰어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김장생에게 사사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평생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혹독한 7년 세월을 부친과 함께 버텨냈으며, 사장학(詞章學, 시와 문장을 짓는데 힘쓰는 학문) 보다는 주로 경전 연구와 수양에 전념했다.

1610년(광해군 2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됐으나 광해군의 북인 중심 정치에 반대했다. 서숙부 2명이 칠서의 옥에 연루되어 죽자 부친 김장생과 본거지인 충청남도 연산으로 낙향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돼 부여현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사헌부 지평(持平), 집의 등을 지냈다. 그 뒤로는 낙향해 본인 공부와 후학 양성에만 힘써 전라도사, 선공감 첨정 등에 거듭 임명됐으나 거절했다. 같은 서인인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문인인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급거 상경해 왕을 호종하려 했으나 막혀 만나지는 못했다.

1638년(인조 16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의 등을 거쳐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나 그 때마다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그의 제자들인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뒤에 문인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죽지 못하고 왕족의 종자 선복(宣卜)으로 변장하고 살아나온 일로 죄책감에 휩싸여서 방황하였으나 김집이 그를 다시 거두었다. 자괴감에 빠진 윤선거를 위로하고 그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였다. 아버지 김장생이 죽자 아버지 김장생의 제자들 중 일부인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이 다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사사하였다. 이후 아버지 김장생의 뒤를 이어 서인 산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그에게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의 특별 추천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효종이 즉위하였으나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의 영향력이 강하자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파직되자 김상헌(金尙憲), 안방준(安邦俊)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산당의 영수가 되어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안방준과 함께 대동법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극력 주장하는 한당의 영수 김육(金堉)과 대립하여 백성의 충의 발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후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가 그 때 실각한 김자점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의 문책으로 사태가 시끄럽게 되므로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을 대성하여 그와 접하는 자는 예에 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버지 김장생과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 연구와 수양에 힘썼는데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1653년(효종 4년) 좌참찬을 거쳐 1654년(효종 5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판중추부판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1883년(고종 20) 11월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이(李珥), 성혼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아버지 김장생의 이기설과 학문,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와 노론, 소론계로 학문이 계승된다. 저서로는 《신독재유고》, 《의례문해속》 등이 있다. 사후 1883년(고종 2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효종의 묘정 등에 배향되었다가 고종 때 가서 문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 여담

노론과 소론의 학문적 조상인 덕에 그들은 김집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남인과 북인에서 계속 딴지를 걸고 발목을 잡는 바람에 실패했다. 동방 18현 중 가장 늦은 고종 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 것 역시 남인과 북인들의 반대와 딴지 책동 때문이라는데 사실 문묘 종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동법에 반대하고 굉장히 엄숙한 성격 때문에 꼰대 중의 상꼰대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자신의 정실부인인 영의정 유홍의 딸이 적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적자를 보아서 후대를 이으라는 주변의 의견을 거부하고 율곡 이이의 서녀였던 부실부인과 해로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김집은 적자 대신 서자밖에 없었으나 송시열 등이 조정에 간청하여 서자로 하여금 적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조 8년에 치러진 식년시에 서자 중 차남인 김익련이 응시한 기록이 있다.

대동법에 반대하고 굉장히 엄숙한 성격 때문에 꼰대 중의 상꼰대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김집은 쿨한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대동법과 관련하여 갈등이 있던 김육과 한평생 좋은 관계였으며, 서로 잘못한 점도 없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전과 다름없이 잘 지낼 것이며, 대동법 관련해서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이지 김육이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옛날의 군자들은 서로 의견이 달라도 얼굴을 붉힐 일이 없다는 표현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즉 김육과의 충돌은 사적 감정이 개입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김집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방납의 폐단을 인식하여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고, 그 중에는 대동법을 나중에라도 시행하는 편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김집이 대동법을 반대함은 산림 전체의 입장이 아니라 김집 개인의 의사였던 듯하다. 여담으로 김집이 대동법을 반대했던 건 삼도 대동법의 실패를 체험한 부친 김장생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김육의 절친한 친구가 김반인데 김반은 김집의 친동생이었다.)

[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 비평사, 2013년) 38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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