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문관
현재의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태어났으나 이는 당시 지방관이었던 아버지의 치소에서 태어난 것이고 실질적인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으로, 그의 묘지도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해 있다.
2. 생애
정종의 후예이며 서인의 거두 김장생에게 배웠다. 1613년(광해군 5년)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에 들었다. 병자호란 끝에 인조가 척화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았는데 이때 예문관제학을 겸하여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자리였던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의 비문을 쓰게 된다. 이때 이경석 외에 이경전, 장유, 조희일에게도 비문을 쓸 것을 명했는데, 이경전은 병 때문에 빠지고 조희일은 채택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거칠게 지었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의 글만 남았는데 청측에서는 장유의 글은 인용이 온당치 않고 백헌의 글은 첨가할 게 있다며 그의 글을 약간 수정하는 것을 전제로 채택했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이런 말로 이경석에게 간청했다고 한다.
"저들이 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니,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구천이 회계에서 신첩 노릇을 하다가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적을 이루었으니, 다른 날 힘을 기르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이다. 오늘의 일은 단지 문자로만 저들의 마음에 들게 지어서, 사태가 악화되지만 않게 해 다오." ─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이경석은 할 수 없이 비문을 고쳐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경석 역시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 형 이경직에게 "글을 배운 것이 후회스럽습니다.[有悔學文字之語]"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라는 시를 지어 한탄하기도 했다. 물론 저 말대로 인조가 구천처럼 치욕을 잊지 않고 정말 힘을 길렀는지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 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이후 1644년(인조 22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년) 효종 재위 후 권력을 잃은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의 반청 정책을 꼰질러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이경석은 영의정으로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전담하여 위기를 넘겼다. 사실 이 협박은 어느 정도 블러핑이 있었고, 청나라의 실권자인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혼인 문제를 위한 점이 더 컸다. 그래서 국혼을 수용하고 백헌이 책임을 전담하겠다고 자청하자 위기를 넘길 수 있던 것. 이후 이경석은 국왕의 간청으로 처형은 면해서 의주 백마 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국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후 말년에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석운리 (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으로 돌아갔으며, 죽은 이후에 그곳에 묻혔다.
3. 평가
영중추부사 이경석의 졸기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현종실록 12년 신해(1671년) 9월 23일(신미) 기사
영중추부사 이경석의 졸기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죽었다. 경석의 자는 상보(尙輔)이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랫 관리에게 겸공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문형(文衡)을 잡고 태사(台司)에 올라서는 나랏일을 근심하고 공무를 받드는 마음이 늙도록 해이해지지 않았다. 경인년 청나라가 성을 내어 말할 때에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 조정의 대신으로서 은혜와 예우가 시종 바뀌지 않았고 궤장 등 늙은 신하를 우대하는 은전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하찮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현종개수실록 12년 신해(1671년) 9월 23일(신미) 기사
현종실록은 남인, 현종개수실록은 서인이 쓴 실록이라 그런지 두 사관의 평이 미묘하게 다르다. 현종실록의 경우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였다'라고 평했는데 이는 이경석이 서인 산림의 후원자로서 송준길, 송시열 등을 추천하고 이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며 인조 반정의 공신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면서 중앙 정계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인 입장에선 이런 부분을 껄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개수실록은 서인의 입장에서 이경석의 장점을 좀 더 세밀하게 쓰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건 기록까지 기록해 그의 충정을 더 돋보이게 했다.그런데 정작 이경석을 깐건 송시열이란게 함정
두 사론의 공통점이라면 이경석은 집안에선 효도를 다하고 관리로선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나랏일을 처리함에 있어 끝까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 충성스러운 신하였다는 점이다. 적어도 당시엔 당파를 불문하고 이경석의 명망이나 성실함은 다들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라는 평가는 이경석 평생의 한인 삼전도비문 작성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당대 조선 선비들에겐 당파를 막론하고 숭명 배청이 당연시 되었으니 선비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구차하게 오랑캐에게 항복문을 썼다는 여론 역시 당파를 불문하고 있었던 것 같다.그럼 니들이 써보든가 아니면 안 써서 나라가 망해보든가
이렇듯 이경석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 등 명분론자들에 의해 삼전도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 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거기에 그는 관직 생활에서 당색을 배제한 정책들을 펴고 당에 상관없는 공정한 인사 관리로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는데 그가 발탁한 인재 가운데 10명의 정승과 4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었기도 했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보통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 대신들에게 수여하는 궤장을 현종에게 받기도 했다. 또 청의 간섭을 최대한 막아내려 했던 명신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백헌의 시호인 문충(文忠)부터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시호가 아니다. 文이 들어가는 시호는 선비들에게 매우 큰 영광이었는데, 개중에서도 문충은 최고로 높이 기리는 시호였다.
형인 이경직의 후손인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보면 '이경석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이 없었던 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남을 억누르거나 문장으로 뻐기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3.1. 문장가로서의 평가
문장가로서 이경석은 일찍부터 조찬한(趙纘韓)에게 문장을 배웠고 문형을 맡아와 저작이 상당한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생전에 수습하지 않아 흩어져 없어진 것이 많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분량의 시문이 남아 있었고 특히 시록(詩錄)은 본인의 정리를 거친 흔적이 많다. 다만 연보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 "문장이 전해지고 안 전해지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드러내는 데 뜻을 두어 미리 자편(自編)해 둔다면 단점을 감추고 장점만 자랑하게 될 것이다. 또 나의 글은 남길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며 스스로 문장가로서 자처하지 않았다고 하니, 본인이 직접 쓴 글들을 정리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듯하다.
이경석은 변려문으로 이름난 조찬한에게 고문을 배우고 또 김장생에게 수학하여 시문에 고루 뛰어났지만 문장가로 자처하지 않아서인지 특별히 회자되는 작품은 없다. 문집을 편정한 최석정에 의하면 그의 글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아 여유롭고 넉넉했으며 글을 어렵게 쓰거나 기묘하게 짓지 않았고 당나라의 한유(韓愈)와 송나라의 소식(蘇軾)의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장자를 읽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이경석은 성리서와 주자의 서적인 근사록(近思錄)에 치중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문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각문(館閣文, 임금의 사명(辭命)이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표전(表箋)을 전담하는 홍문관·예문관 등 문학지관(文學之館)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문장, 장식미에 치중하는 변려문(騈儷文)이 주로 씌어졌다.)을 짓기에 알맞았던 듯하다.
문집은 이경석의 손자인 이우성이 시 5000여 수, 문장 800여 편을 모아 당시 좌의정 최석정에게 산정(刪定)과 편차를 부탁하였다. 최석정은 이를 시 1800여 수와 문 500여 편으로 정리, 편차하여 1698년에 간행하려다가 이우성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의 아들들이 이어 1700년에 간행했다고 한다. 발문에 따르면 간행시 비용 등의 문제로 몇 질 인행하지 못하였고, 수록하지 못한 글이 많은데 물론 이경석의 평생 한이었던 삼전도비문은 수록하지 않았다.
4. 송시열과의 관계
4.1. 수이강 사건
그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수이강(壽而康)" 사건이 있다.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이가 본인이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경석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윤선도 처벌에 대하여 이경석과 의견이 갈린 탓인지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경석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 이경석이 1668년에 현종에게 궤장을 받을 때 송시열에게 글을 구하니 송시열은 "오래 살고 건강했다(수이강/壽而康)"라고 써주었다.
처음엔 당사자인 이경석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도 둘의 관계를 익히 알기에 그냥 덕담으로 쓴 좋은 표현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해인 1669년 현종이 온천 여행 갈 때 조정의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 가자 낙향해 있던 이경석이 이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마침 온천 주변에 있었던 송시열이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 오해해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
'수이강'이라는 표현은 송나라 때 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정강의 변 당시 손적은 금태종에게 항복문을 지어 바치면서 "3리 되는 성이 결국 울타리 같은 수비마저 잃고, 10세를 전해 내려온 태묘도 기어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말이 땀 뻘뻘 흘리며 달리는 수고를 다하려 하는데, 어찌 견양(牽羊)의 요청을 늦추리까(三里之城,遂失籬藩之守;十世之廟,幾為灰燼之餘。既干汗馬之勞,敢緩牽羊之請), "상황께서 죄를 지고 파천하셨으니, 미천한 이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명을 청하옵니다(上皇負罪以播遷,微臣捐軀而聽命)"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주자가 비난했다. 손적 이 사람은 평소에 "천명을 따르는 자는 오래 살고, 천명을 따르지 않는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사람인지라 이를 들은 주위 사람이 "그러게, 자네가 오랑캐 조정에서 그토록 '천명'을 따른 것이 지극했으니 이리도 오래 살고 건강한 거지(壽而康)"라고 비아냥거렸고, 손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상소는 당대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송준길이나 이단상도 송시열이 이 상소를 올린 데 대해 놀라워하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송시열 본인도 당대에 어떤 논란을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는데 송준길의 문인인 송규렴이 "거 너무 말씀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라고 지적하는 편지에 대한 답장에도 그 사실이 잘 나와 있다. 여기에서도 이경석을 지독하게 폄하하고 있다. 문제의 '수이강' 운운한 것이 이경석에 대한 비난이었음이 상소문으로 드러난 뒤에 보낸 것이다.
일전에 산중에서 자네의 편지와 나를 대신하여 지은 글을 전해 받으니 위로되는 마음 한량없네. 나는 어제 겨우 돌아왔으나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중에, 또 여러 친구의 부고(訃告)가 사방에서 이르니, 이는 늘그막에 더더욱 견디지 못할 일이네. 어찌하면 좋겠는가?
요전 편지에서 경계한 바는 모두 알겠네. 그 소(疏)를 올리려 할 적에, 친구 중에도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네. 내가 아무리 어두운 사람이지만 어찌 오늘 같은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줄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경석)의 처신이 너무나도 치사하고 잘못되었는데도 그때 사람들이 함부로 존중하고 숭앙(崇仰)하여 세상의 의로운 도가 날로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네. 그러므로 부득이 일을 따라 지적하고 배척하여 한 가닥 세도의 명맥을 부지함으로써 마음으로 주자(朱子)가 손적(孫覿)의 일을 기록한 의리에 따르려고 했던 것이네.
대체로 당시의 일이 어쩔 수 없이 몰린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알맞게 대처할 방도가 없었겠는가. 그렇건만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마음껏 아첨하여 미리 지어 놓은 글처럼, 조금도 고통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며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말하는 뜻이 없었네.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사람의 본성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처럼 하였겠는가.
이는 계곡(谿谷)이 말한, “내가 이 글을 짓지 않는다면, 만세에 더욱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는 것일세. 그러나 계곡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난번에 청음(淸陰)께 사뢰어 계곡이 지은 우계(牛溪)의 비문을 깎아 버리었으나, 이 사람의 글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항상 맺혀 있었네. 지금 이 일로 인하여 그 맺혔던 생각을 발명(發明)하니 세도(世道)를 맡은 사람에게 도움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네.
그러나 그 사람(이경석)은 본시 향원(鄕原)이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에게 아첨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시에 명망이 대단하여 잘못되고 틀린 말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말을 신복(信服)하여 쳐 깨뜨리지 않으니, 석가(釋迦)의 해독이라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오늘 나의 소(疏)를 보고, 그를 존숭(尊崇)하고 열복(悅服)하는 사람들이 성내어 꾸짖고 분하게 여기며 배척하는 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니나 온 세상에 쑥덕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나를 마치 자신들의 원수처럼 보네. 동춘까지도 ‘놀랍고 탄식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대체로 그 사람이 향원(鄕原)의 마음으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 동안 행신(行身)하는 방법을 삼으니, 만일에 경인년 봄의 한 가지 일이 아니었다면,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그때에 죽지 않았던 것도 대종성(大宗城)에서 노획한 여자를 선물로 준 때문은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대저 퇴지(退之)의 이른바 ‘끝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진정 오늘의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보네. 그러나 후회스러운 점은 없네.링크
송도원(宋道源)에게 답함 - 기유년(1669) 5월, 송자대전 제70권 서(書)
다음은 송시열이 쓴 문제의 영부사 이공 궤장연 서(領府事李公几杖宴序)의 일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송시열의 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 송자대전 137권과 이경석의 문집인 백헌집 52권에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
공이 관직에 있는 동안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성상(聖上)의 교서(敎書)에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경인년(1650년, 효종 1년) 2월에 있었던 일은 은미(隱微)하여 명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때는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결정되는 판이라, 비록 임시로 국란을 모면하는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해(利害)를 따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수방관하여 아무런 상관도 하지도 않았으니 그 표정이 마치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 보기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 오직 공만이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함으로써 나라가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주상(主上)께서 공을 알아주는 마음이 더욱 융숭해졌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공을 붙따르게 된 것이니, 그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고(壽而康) 마침내는 우리 성상에게 그런 융숭한 은례(恩禮)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하겠다. 내가 이 때문에 앞에서 이미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끝에 와서는 곧 훌륭함을 공에게 돌렸으니, 아, 여기에서 군신(君臣)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훌륭하다.
숭정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계동일(季冬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즉 이와 같은 유사한 사례를 끌어들여, "(오랑캐에게 아첨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자기 몸 혼자 편하게) 오래 살고 건강했다"라는 엄청난 인격 비난을 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굉장히 악의적인 비방을 쓴 것이 명백히 보이는 부분인데, 겉으로는 이경석의 공을 한껏 칭찬하면서 문장 중간에 정정당당히 비판하지 않고 교묘하게 비방문을 쓴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나라에서 훈장 수훈자를 위한 축사를 써준답시고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도록 대각선 패드립 같은 걸 친 셈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송시열 일파인 노론과 박세당 등의 대립을 불렀고, 훗날 사문난적 논란 등으로 노론과 소론간의 분열 양상으로 흐르게 되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삼전도비 제작 당시 조정은 아무도 굴욕적인 비문 내용을 작문하려 하지 않자, 청 사신에게 작문 실력이 졸렬하다는 명분으로 청으로부터 이를 하달받으려 했다. 하지만 사신은 황제가 "당신들이 직접 작문한 걸 가져와 직접 개찬(심사)하고 싶다"는 명을 내렸다고 거절해 이경석 등 3명이 선택되어 각자 마지못해 비문을 썼으니 이경석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이경석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음에서 미루어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유학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을 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이경석은 이 사건에 대해 대인배의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문집인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이경석 본인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이경석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이경석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형인 이경직의 현손인 이진유는 김일경과 대노론 강경파였고 신임사화를 주도했다. 너무 강경하게 노론을 공격하다 그 보복으로 영조가 즉위후 소론 준론을 숙청하는데 매타작 맞아 장독으로 죽었고 그 조카인 이광사 또한 벼슬도 못하고 노론의 탄핵으로 유배를 왔다 갔다하였다.
한국외대 교수 이은순은 "현실론으로 나라를 구한 이경석이나, 주자학적인 숭명 의리론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회복하자는 송시열이나 모두 평가돼야 한다"고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즉 이 싸움은 양란 이후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이념 투쟁이자 시국 인식 차이에 따른 정론 대립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위 주장은 어폐가 있는데, 이 사건은 '논쟁'이나 '노선 차이'로 인한 비판이 아닌 송시열의 돌려까기에서 시작했기 때문. 논리적인 비판이 아닌 '수이강'이라는 말을 쓴 것은 단지 인격 모독에 불과하며, 그 방법도 공식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치졸한 뒷담화에 가깝기 때문에 단순한 시국 인식 차이로 보아야 할 문제는 아니다. 정 이념이 맞지 않았다면 정정당당하게 공식 석상에서 비판하는 방법도 있다. 척화파인 김상헌, 조온, 그리고 삼학사 등도 최명길 등을 조정에서 직접 탄핵하고 비판할지언정 뒤에서 까진 않았다. 게다가 이경석은 송시열보다 나이가 12세나 많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친교를 다진 지가 오래였는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를 찬양하는 이들에게 송자라고까지 불리는 것과 비교해 보면 명성에 비해 지극히 치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상황에서 당장 이경석이 청의 비위에 맞는 글을 바치지 않았다면 어떤 화를 불러왔을 지 알 수 없으며,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책임을 떠맡아서 국왕과 조정 중신을 보호한 적도 있다. 이런 사람을 교묘히 폄하하는 글을 썼으니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 송시열은 정치적, 학문적 성과와 별개로 대인 관계에선 상당히 속좁은 처신을 왕왕해서 빈축을 사고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적을 만들었는데 수이강 사건이 송시열의 그러한 대인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들 중 하나이다.
당시 실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상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 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시열은 참으로 경석을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씀이겠는가.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실록
대체로 이·김 양공(兩公)은, 혹은 훈덕(勳德)으로 혹은 절의(節義)로 세상의 존경받는 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양 조정에서 예우가 특별하여 이같은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래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었다. 경석은 시열의 뜻을 몰랐으므로, 힘껏 사양하지 못하고 끝내 성대한 예전을 받아들였다.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청하자, 시열이 서문을 지어 주었는데, 대체로 비꼬는 뜻이 없지 않았다.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개수실록
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이었는데, 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소를 올려 오지 않으면서 손적(孫覿)에 빗대어 경석을 모욕했다. 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대제학으로서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기 때문에 시열이 소에서 언급한 것이었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현종 10년 4월 14일,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이렇듯 송시열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현종실록이나 현종개수실록 모두 공통되게 "수이강 문제는 송시열이 이경석 상대로 지나치게 선을 넘었다."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송시열의 지지파라 할지라도 어떻게 두둔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한 기사는 이 웃지 못할 촌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조선국왕 인조는 대청황제공덕비 비문의 개찬을 이경석에게 요구하면서 월왕 구천의 고사를 떠올리며 와신상담하여 복수설치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조선은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효종이 북벌을 내세웠으나 현실적으로 복수설치할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반면에 복수할 상대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차지하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굴욕의 시간이 길어져 갔다. 그래서일까? 복수의 방향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외부의 적을 향한 설치(雪恥)보다 내부의 정적들을 향한 복수가 대신한 것이다. ‘범려(范蠡)’와 ‘문종(文種)’보다는 이데올로그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실사구시적 대책보다 화이론적 이념이 앞서게 되었다. 이념은 독선(獨善)을 불렀고 권력은 독재(獨裁)를 향했다. 열린 토론의 문은 닫히고 진영 논리가 활개를 쳤다. 내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고 네 눈의 티만 보였다. 상대 진영의 적폐를 찾아야 했다. 삼전도비가 정쟁지석(政爭之石)으로 소환된 사연이다.
다시 보는 삼전도비, 그 치욕과 정쟁의 진실을 찾다
4.2. 신도비명 사건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人其來敬)
박세당이 쓴 이경석 신도비명 중
태학생(太學生) 홍계적(洪啓迪) 등이 청하기를,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에 주자(朱子)의 학설과 어긋나고 다름이 있으며,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에 송시열(宋時烈)을 침범해 욕한 말이 있습니다. 문자(文字)를 거두어 들여서 물과 불속에 던져버리고, 인하여 성인(聖人)을 헐뜯고 현인(賢人)을 업신여기는 죄로 다스리어 선비의 추향(趨向)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여 비문과 책자를 올리면서 명백히 분변하여 엄중하게 배척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박세당은 삭출(削黜)하고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축조(逐條)하여 변파(辨破)하게 하라."
하였는데, 뒤에 비문과 책자를 모두 불속에 던져버렸다.
1703년(숙종 29년) 4월 17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소론의 거두 박세당은 후일 이경석의 비문을 쓰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이경석은 봉황(군자)이며 송시열은 그를 모함하는 올빼미(소인)이라며 대놓고 디스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박세당의 백헌 묘비명 나중에 집권 노론이 박세당을 사문난적이라 탄핵하고 쓴 비문과 저서인 사변록을 불태우고 머나먼 벽지로 유배보내라고 숙종에게 청하였다. 숙종은 비문 철거와 사변록은 소각했지만 삭탈관직으로 끝내고 유배를 보내지 않았다. 소론 대신들과 박태보를 구원해주던 노론의 온건파인 이인엽이 숙종이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다 죽은 아들인 박태보의 충정과 70이 넘은 나이를 고려하여 유배를 보내지 말라고 변호하자 삭탈관직의 건으로 끝냈다. 이경석 신도비는 50년이 지난 1754년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건립되었는데 노론에 의해 글자가 깎여나가고 땅에 파묻혔다. 이후 1979년 이경석의 후손들은 비석을 재건하고 옆에 새로 글씨를 새긴 신도비를 함께 세워 오늘날 이경석의 묘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