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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송시열(宋時烈)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5|조회수34 목록 댓글 0

1. 개요

義理之論, 天下之公也, 利害之計, 一己之私也.

의로움과 도리는 천하의 공도이며, 이해타산의 계산은 개인의 욕심이다.

《우암집》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을 주로 삼으라.

죽기 전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말.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로서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렸다.

사후에도 노론이 세도 정치 직전까지 계속 집권하면서 해동성인(海東聖人), 송자(宋子)라고 높여졌다. 율곡 이이, 김장생도 듣지 못한 칭호였다. 특히 훗날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 등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다.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다.

2. 사상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어제시(御製詩) 宋夫子

경전에 대한 독자적이고 참신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다. 성리학 원리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주자를 존숭하는 주자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고 주자의 학문을 더 심화하는 것이 그와 그의 학파의 연구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아 놓은 방대한 분량의 "주자어류"라는 어록집이 있는데 이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좀 더 정리된 내용으로 전하기 위해 순서와 배열을 바꾸고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이라는 책도 만들었다. 송시열 말년에 작업에 착수해서 후손들과 제자들까지 대대로 작업에 참여하여 결국 완성했다.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은 송시열이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항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주자어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설, 역사, 정치, 문학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담고 있다.

그러다가 최근 현존하는 유일한 필사본이 송시열의 9대손인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 선생의 문충사(文忠祠)에서 발견되었다.

사단칠정을 이(理)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사단이 이에서 나왔긴 한데 이도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쪽도 있고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에 세우려 하였다는 쪽도 있다.

원리주의적 성향의 학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하고 치졸한 행보로 정적이 많은 편이었는데 송시열은 처음에는 남인 집안과 통혼을 할 정도로 남인에 대해서 원만하게 잘지냈으며 악감정이 전혀 없었으나 예송논쟁으로 윤선도 허적 등 남인들에게 공격당하고 최종적으로는 1차 실각당하면서 이후로는 남인 인사는 물론 이경석 등 남인에 호의적인 인사들도 가리지 않고 공격하거나 비난하며 그 방법조차 심히 소인배나 쓸만한 치졸한 방법으로 비난하여 결국 송시열의 소인배적 행보에 반발하는 서인들이 분열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쳤으며, 거기에 예송논쟁의 불을 지핀 체이부정 논란도 송시열 본인만 무시했지 이를 듣던 같은 당파 정태화조차 기겁할 정도로 논리적으로나 당시 유교적 관점으로서나 공격 당할 요소가 많았고 잘못하면 조선왕실을 쪼개놓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 때문에 남인들에게 공격당한 부분도 자업자득이라는 평도 강하다. 같은 서인 그것도 송시열이 살아있 때 쓴 현종개수실록에서도 정태화가 체이부정 주장을 막고 근거를 국조오례의로 바꾼 일을 평하며 정태화가 1차 예송을 사화로 번지는 걸 막았다고 호평한 것을 생각하면 당대의 송시열을 따르던 서인들도 불편하게 여길 정도로 송시열의 행보는 도를 지나쳤다.

송시열을 보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남송으로 쫓겨 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하는 정신승리.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오랑캐라고 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명분을 중시하는 것이 유학(주자학)이었기에 발생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조적 성향과 별개로 진실로 청나라를 이길 정책을 만드는데는 소흘하고 만동묘 등 정신승리적인 행보만 보인 점 때문에 현대에는 크게 비난받는 것도 사실이다.

3. 붕당

西人(서인): 1607~1680

老論(노론): 1680~1689

4. 여담

오늘날에도 기호 지방(경기도 / 충청도)에 잔존하는 유림들에게는 말 그대로 '송자'로 대우된다. 왜냐하면 기호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서인 - 노론 당파가 조선 말까지 집권하는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송자'라는 명칭을 기호 지방 유림들이 추숭하듯이 붙였겠지만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정조 시기에 국가에서 편찬하는 등 조선 후기에 공인된 명칭이다. 중앙 정계를 노론이 장악한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공인된 것은 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 '송자'라는 표현은 효종이 처음 사용했다. 효종대부터는 서인들의 정치적 입김이 점차 강해졌고, 송시열의 제자들이 이미 조정에 허다하게 진출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효종은 자신의 대군 시절 스승이기도 하고,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서인들에게 온건한 제스쳐를 표시할 필요도 있었기에 여러 번 송시열을 불러들이려 했다. 효종실록에서 정말 많이 보이는 기사가 '아무개가 아뢰길, "송시열을 부르소서"'하는 기사일 정도. 하지만 송시열은 번번이 거절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잠시 관직을 맡았다가 병을 핑계로 다시 낙향하곤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효종은 "나는 우암을 흠숭하니 기록(사초)할 때 특별히 '시열'이라고 적지 말고 '송'이라고만 적도록 하라"고 교시했고, 이것이 나아가 "과연 송자라 할 만하다"고 공공연하게 칭하게 된 것. 정조대에는 정조 본인이 송시열을 고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아니더라도 선대에 이러한 과정이 있었는데 감히 '송자'라는 호칭을 금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작 송시열은 칭병하여 사직한 시기에 경기 여주, 강원도 영서 지방에 초청되어 사액서원을 짓고 당세(黨勢)를 불렸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기호학파 유림 한정이며 학맥상의 최고격 스승은 당연히 지폐에까지도 얼굴이 올라간 이이나 성혼이다. 그와는 반대로 동인 - 남인 당파의 지역 기반이었던 영남에 잔존 중인 유림층에게는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으며 영남 유림층은 송시열을 송자라는 어감과는 반대로 '시열이'라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담은 단어로 지칭하는데 심지어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짓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의 성이 은진 송씨일 경우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은 남인의 본거지였던 안동 지역의 노인들과 대화하는 사람이 만약 자신이 은진 송씨인 걸 밝히면 은근히 분위기가 험악해진다고 말한다. 오히려 현대에 유교사상에 크게 관심이 없는 일반인에게 격에 맞지도 않은 과분한 칭호로 송시열에 대한 평가가 더 박해진 측면도 있다.

현대에 성리학의 위상이 추락하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면서 성리학 교조주의자, 사대주의자 등으로 평가되었다. 조선의 역사가 연구되면서 비록 정치적 계산이라고는 해도 송시열의 행보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이유로 저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더불어 송시열이 치졸하고 소인배적 행동을 여러 번 보여주었고 이것이 연구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이 쪽으로도 저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는 서얼 허통 호포제 주장 여성 교육 과부 재가 같은 진보적인 의외의 면모에 대해서 고평가 하는 의견들도 있다.

이후에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정조 때에는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이 홍국영과의 결탁을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전국에서 송덕상을 처벌한 게 잘못되었다고 하여 한동안 파란이 일었다.

현대에 송시열은 충신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권신으로 각각 재평가되었다. 재미있는 건 송시열과 죽은 뒤 5년 후에 태어난 영조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영조나 송시열은 노론의 지지를 받아 최상위에 올랐고 정치 철학이나 학식도 높았고 83세에 장수하다 죽은 게 공통점이다. 다만 송시열과 영조의 차이점은 정치적 포용력으로 송시열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하여 서인 내부에서도 적을 많이 만들었다. 자신과 친한 사이래도 속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으면 조문에다 조롱하는 조문문을 쓰고 나중에 권신인 김석주와 김익훈의 전횡을 묵과하는 등 좋지 않은 면모도 보였다. 반대로 영조는 탕평이라는 정책으로 자신을 지지해 준 노론 편을 무조건 들어 주는 게 아니라 자신과 대척점에 있던 소론을 준론을 배척하고 완론을 등용하였다 나중에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으로 인해 소론의 위세가 위축되자 노론측이 다 멸당시키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노론에게 당론을 다시 지껄이면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사실 영조가 후기에 노론 편향이 된 건 소론 준론과 남인 탁남이 역모를 저질러서 그렇다. 그렇게만 되지 않았더라도 중립을 지키고 탕평을 완수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정치적인 포용성인 면모를 보면 영조가 송시열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대 국왕들을 제외하면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이다. 살아있을 때에는 1000여 번, 사후에도 2000여 번 이상이나 언급될 정도이다.

한명회, 신숙주, 김안로, 윤임, 윤원형, 박원종, 허목, 허적, 홍국영, 흥선대원군 등과 더불어 조선의 파벌 정치인의 한 사람.

시집 가는 큰딸에게 교훈으로 써주라며 써 준 <우암선생계녀서>(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소경(여기서는 법사를 말한다)들이 하는 기도는 어쩔 수 없지만 무녀나 화랭이가 굿하는 집은 머잖아 상놈이 될 집안이니 굿구경 가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 충청도 지역에서 경을 읽는 앉은굿이 발달한 게 이 사람 영향 아니냐는 설도 있다.

구전되는 일화에 따르면 대단한 대인배여서 자신을 몰라보고 싸다귀를 갈긴 무관을 중용하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송시열은 어느 비오는 날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한 무관과 장기를 두다 통성명을 하게 된다. 그 전까지 무관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 거만하게 굴었는데 그가 송시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황하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어디서 감히 우암 대감 행세를 하냐!"라고 하며 싸다귀를 갈기고 튀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오히려 재치와 배짱에 감탄해서 얼마 뒤 그를 중용하려 했으나 이미 죽은 후여서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야사는 웬만한 조선시대 거물들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신빙성은 높지 않으며 오히려 송시열의 실제 행보를 보면 이런 성품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조선시대 사람임에도 키가 크고 덩치도 좋은 거구였다. 초상화를 봐도 넓은 어깨와 체격이 두드러지는데, 실제로 1658년에 효종이 송시열에게 선물한 초구(담비가죽 옷)의 사이즈를 봐도 키가 거의 190cm 정도의 장대한 몸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큰 키다. 그에 걸맞게 힘이 장사라고 하여 장정 여럿이서 겨우 드는 비석을 혼자서 이리저리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몸이 안 좋아 몸져누웠을 때 정적이지만 의학에 능통했던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에게 처방을 부탁했는데 허목이 극약인 비상(비소)을 처방하자 모두가 "허목이 정적인 대감을 해치려는 것"이라며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태연하게 비상을 먹은 결과 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있다. 혹은 조금 다르게, 송시열의 아들이 약을 받아오다가 비상이 든 것을 보고 빼놨더니 송시열의 몸이 좋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병이 도졌고, 사정을 알게 된 송시열이 "허미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시 가서 약을 지어오너라."라고 꾸짖었고, 결국 송시열의 아들이 허목에게 가서 사죄하고 다시 한 번 처방을 받아와 그대로 먹이자 이번에야말로 병이 나았다고도 한다.

건강 관리를 매우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사되기 전까지 건강하게 살았던 그는 소식(少食)의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 위 일화와 조금 상충되는 것 같지만, 위의 경우가 특수한 경우였고 보통은 매우 건강하고 잔병이 없는 체질이었다고 보면 앞뒤가 맞는다.

훗날 사사될 때에도 이 건강체질 때문에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가 고역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송시열이 사약을 들이키고 온돌방에 들어갔는데도 멀쩡하니 급기야 금부도사가 송시열에게 제발 어떻게든 일을 끝내게 해달라고 애걸을 했고, 결국 입천장을 긁어 상처를 낸 뒤 내리 3사발이나 마신 뒤에야 겨우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송시열 뿐만이 아니라 당시 사약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잦았는데 설계해서 만든 즉사형 독약이 아니라 그냥 게알, 짐독, 부자 등의 치사량이 높은 것들을 내의원에서 마구 조합해서 만든 약이니 효과가 검증될 리가 없었다. 때문에 사사를 집행하러 갈 때는 예비용으로 사약을 몇 사발 더 챙겨가야 했으며 그래도 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활줄을 챙겨가서 사약이 통하지 않으면 사지를 잡아놓고 활줄로 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송시열은 당시 노론의 거물은 물론이요, 왕들까지 존경을 표하던 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방법을 써서 죽일 수도 없었으니 금부도사가 애간장을 태운 것.

오늘날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자랐다. 송촌동(宋村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이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 이름은 선비마을이다. 선비마을 3단지 맞은편에 송준길의 호를 딴 동춘당 공원이 있는데 송준길 선생의 고택인 동춘당 종택과 동춘당이 있다. 그리고 송촌동 근처에 작은 야산의 이름도 어르신들은 송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송시열이 제자를 가르치던 남간정사(南澗精舍)가 있으며, 1998년에 남간정사 주변에 장판각, 서원 등을 복원한 우암사적공원이 개원하였다.

해군참모총장과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송영무가 송시열의 후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조상이기도 하다. 윤석열의 10대조 윤박(1628 ~ 1675)이 송시열의 차녀와 혼인하여 9대조 윤주교(1673 ~ 1728)를 낳았기 때문.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은 본래 쇠뿔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소바우 또는 우암곡이라고 불렸으나, 구한말인 1907년에 이 곳에 현감으로 부임한 송헌면(宋憲冕)이 자기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호와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여 소 우(牛)의 뿔 각(角)과 바위 암(岩)의 산 산(山)을 따 와서 각산동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한다.

사돈인 권시(송시열의 장녀의 시아버지)와 과부의 재가(재혼) 문제에 대해 논쟁을 하다가 권시에게 패드립을 치기도 했다. 권시가 '두 명의 지아비를 섬기게 할 수 없다'라며 재가를 반대하자 송시열은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고려와 조선 두 나라를 섬긴 작자들과 그 후손들도 처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권시의 방계 조상이 바로 조선 초기의 공신인 권근이었다는 것.

소론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보궐정오에 나오는 송시열의 졸기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고 하더라도 곧 서로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으며 김익훈을 신구한 일로 사류들이 실망했으며 진실로 재주를 갖춘 것이 없으며 기질이 거칠고 학문이 허술하고 가엾이 여기는 어짊이 적으며 스스로 다스림이 점점 허술하고 세상의 화를 겪어서 분함과 미워함이 이미 치우쳤으며 젊은 시절과 비하면 거의 딴 사람과 같았으므로 군자가 더욱 그 이름을 끝까지 보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며 비판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죄가 없는데도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으며 지조와 행실이 확실하여 주자를 본받고 이이를 존경하는 것을 일생의 가계로 삼았으며 지론(持論)이 준절(峻截)하고 일에 임하여 용감히 추진하여 족히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켜 복종하게 하는 바가 있었고, 자신의 처사하는 사이에는 너무 지나쳐서 인정에 가깝지 아니함이 있었으나, 논하는 자가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고 유명한 재상과 어진 선비가 송시열의 문하에 많이 나왔으며 영해(寧海)에 귀양갔을떄 고묘(告廟)하기를 청하여 한 걸음 사이에 도거(刀鉅)가 있었으나, 사류(士流)가 더욱 마음을 기울여 복종하고 존중하여 명론(名論)이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이 높아서 유림(儒林)의 종사(宗師)가 된 지 50년이 되었다. 호평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송시열의 죽음에는 소론측에서도 분노하여 박세채의 제자들 상당수가 노론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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