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만회, 본관은 양주이다. 당적은 서인이며 소론으로 분류돼 숙종 초까지는 세력이 없어 고생했다. 비록 사촌누나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였지만 예송논쟁과 장희빈 사건 등 왕실의 사단이 날 때마다 외척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휘둘려야 했다.
2. 생애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직과 주서 등을 거쳤다. 당적은 서인으로, 1681년(숙종 7)에 시발된 노소분당에서 중립을 지키다보니 노론, 소론, 남인 모두에게 공격당했다.
1684년(숙종 10) 판의금부사, 1685년(숙종 11) 병조판서, 예조판서, 1686년(숙종 12) 좌참찬, 호조판서를 지냈다. 1687년(숙종 13)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1688년(숙종 14) 1월 좌의정에 이르렀다. 동년 9월 사촌누나 장렬왕후가 사망하였고, 조사석은 질병을 이유로 24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1689년(숙종 15) 1월 정승에서 물러났다. 정승에서 물러난 직후 기사환국이 일어났고, 숙종의 외면을 받던 중에 남인에게 종조카 김석주와 한패라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결국은 유배되어 1693년(숙종 19)에 사망하였다.
사후인 숙종 말~경종 때 적장남 조태구가 소론 당수가 되어 소론 완론(온건파) 시조가 됐기에 소론에 자동 합류됐다. 정사 기록이 일반 공개로 전환되기 전까지 《연려실기술》을 숙종 때까지의 조선사를 연구하는 1차 고증사료로 채택해왔던 구 사학계에서 남인이라 잘못 규정했던 탓에 왜곡된 정보가 널리 퍼져 여전히 잔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