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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권대운(權大運)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5|조회수8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남인 출신으로 제2차 예송논쟁 후 송시열을 처형할 것을 주장한 허목, 윤휴에 반대하여 허적과 함께 탁남의 지도자가 되었다.

2. 생애

예조판서를 지낸 권협의 손자로, 1612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아버지 권근중(權謹中, 1586 ~ 1650. 2. 7.)[3]과, 이유혼(李幼渾)의 딸인 어머니 전주 이씨 이숙희(李淑姬)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2년(인조 20) 식년 생원시에 2등 10위로 입격한 뒤 1649년(인조 27)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했다. 같은 해 효종 즉위 후 사간원 정언이 되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청요직과 이조 정랑을 지냈다. 현종 즉위 후에는 형조, 병조, 예조의 참의를 지낸 뒤 한성부 우윤, 개성 유수를 거쳐 1667년(현종 8) 대사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670년(현종 11) 호조판서, 1673년(현종 14) 형조판서를 거쳐 1674년(현종 15) 우참찬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제2차 예송논쟁 후 1674년(숙종 즉위) 예조판서를 거쳐 1675년(숙종 1) 병조판서가 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얼마 안 되어 좌의정이 되었다. 1679년(숙종 5)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파직되고 좌천되었다가 결국 영일(지금의 포항)에 위리안치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복귀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궤장을 하사받았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다시 파직되고 섬에 안치되었다가 형벌 완화로 경기도 일대에 마련한 셋집으로 들어갔다. 1699년(숙종 25) 죽고 복권되었다.

3. 여담

1689년 기사환국 이후 복권된 권대운은 같은 남인 세력인 좌의정 목내선, 예조판서 이관징(李觀徵, 1618~1695), 공조판서 오정위(吳挺緯, 1616~1692)를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 재집권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 장면이 〈기로연회도〉라는 그림에 남아있다. 대신 4명의 아들들도 권대운의 손자 권중경과 함께 모임에 참석했다. 〈사로연회병서〉에 따르면 위 사진의 인물들은 왼쪽부터 이옥, 목임일, 이관징, 목내선, 권대운, 오정위 순서이다. 참고로 불과 5년 뒤 남인이 다시 몰락하여 그림 속 인물들이 전부 관작을 잃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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