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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광좌(李光佐)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6|조회수18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소론의 영수였으며, 오성부원군 영의정 이항복의 현손이다.

2. 생애

1694년 문과에 장원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정언, 지평, 교리, 이조좌랑등 삼사를 역임하고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나 숙종이 소론을 내친 처분으로 노론의 편을 드는 것을 반대하자 파직된다.

경종이 즉위한 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경종 초기에는 노론의 세력이 강력해 경종은 노론의 뜻대로 하는 듯 연기하다가 환국을 일으켜 노론 4대신(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김창집)을 사사하고 노론의 세력을 꺾었다. 그는 경종이 노론의 세력을 약하게 하는데 조태구, 조태억, 류봉휘, 최석항 등과 세제대리청정을 반대하였다. 노론이 쫒겨나는 신축환국이후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병조와 이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영조 즉위 직후인 1724년(영조 즉위년) 11월 영의정에 올랐다. 1725년(영조 1) 3월 신임옥사의 책임을 묻는 노론의 공격으로 파직당했고, 동년 7월 4일 류봉휘는 유배 보내졌고 이광좌, 조태억은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송출되었다. 1727년(영조 3) 7월 1일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정미환국을 단행하자 특별히 서용(敍用)되어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노론은 힘이 약해졌다.

1728년(영조 4) 3월 소론 준론과 남인이 난을 일으키자 영의정으로서 영병조사(領兵曹事)를 겸직하고 침착하게 난의 중심 인물을 체포하고 진압하였다. 1728년(영조 4) 7월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영의정으로서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으며, 동시에 두 달 동안 영조를 보좌하여 대리집정을 맡았다. 1729년 5월 소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니 임금이 허부(許副)하였고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탕평책의 신봉자였으나, 당시 노론 영수인 민진원과 정호가 노론 역사상 송시열 이후로 최고의 강경파인지라 노론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했다. 류겸명 같은 이는 자기는 집에서도 광좌, 광으로 부른다며 영조 앞에서 광좌라고 하였고, 심지어 그놈[厥漢]이라고까지 하여 영조가 대신(大臣)에게 무엄하다며 꾸짖는데도 안하무인식으로 굴었다. 집요하게 이광좌를 공격하면서도 노론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식의 답변을 서슴지 않는 편협한 인물이었기에 영조가 목석이나 허수아비[偶人]와 말하는 것 같다는 말까지 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노론 인사들의 전반적인 태도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광좌는 다른 소론 대신들이 영조에게 납작 업드린 상황에서도 삼수의 옥은 역적이 맞다고 강변하였고 덕분에 노론의 공적 1호가 되어 무수한 탄핵을 받았다.

1730년 복상(卜相)할 때 우의정 이집(李㙫)이 복상할 명단을 봉입(封入)하자, 가복(加卜)하라고 명하므로, 이집이 임금의 의중이 어디 있는지를 앙청(仰請)하자, 영조가 답하길,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은 진실로 오늘날의 영수(領袖)이지마는, 이광좌는 타인이 그를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고, 민진원은 자기 스스로 조정에 있지 않으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라고 하고는, 이조판서 조문명(趙文命)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1733년 1월 영조가 영중추부사 이광좌와 판중추부사 민진원의 입시(入侍)를 명하여 밤중에 탕평의 일에 대해 하교하였다. 하교를 마친 후 영조가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서 이대로 머물러 있고 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감히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만약 윤허를 받는다면 여유를 갖고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도 벼슬을 그만두는 윤허를 받게 되면 마땅히 서울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역시 윤허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비록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하더라도 간혹 상참(常參) 등의 큰 일을 만나면 당연히 들어와 참여해야 할 것이며, 강연(講筵)의 빈대(賓對)에도 때때로 입시(入侍)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737년(영조 13) 영의정에 4번째 올랐다. 1740년(영조 16) 영의정 재임 중 탄핵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중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영조는 숙종의 사당을 찾아 비를 맞으면서 "신하 놈들이 탕평을 하래도 안 하고 깽판치니 내가 못난 탓이다! 왕 안해!"라고 선포하자 신하들이 또 우리들이 당파 싸움이나 하면 우릴 벌하소서!라고 울고불며 말린 다음 날로 상대적 강경파였던 이광좌의 죽음으로 조정은 그나마 좀 조용해진다.

사후 15년 뒤인 1755년(영조 31)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768년(영조 44) 정후겸(鄭厚謙)의 주선으로 복권되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직후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고 1908년(융희 2) 순종 때 최종 복권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여담

영조의 명령으로 인해 강제로 노론 대신들과 악수를 한 적이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강제로 노론의 수장 민진원과 악수 인사를 했다.

민진원 사후 새로운 노론의 수장 김재로가 등장하자 영조는 또다시 악수 인사를 하라고 하지만 김재로가 거부했다.

박문수와 인척 관계로 그의 후원자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박문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의지하여 자랐는데, 그의 스승이자 외숙부가 좌의정을 지낸 이태좌이며, 이광좌의 삼종형이다. 이광좌는 박문수 관련 설화에도 드문드문 출연한다.

글씨를 잘 썼고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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