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의인물

이종성(李宗城)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6|조회수26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의 5대손으로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이며, 우의정 홍중보가 외증조부이다. 영의정 이광좌가 삼종숙이고, 판의금부사 박문수가 고종형이다.

2. 생애

1692년(숙종 18) 출생하였다. 고종형 박문수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부친 이태좌(박문수의 외숙부)에게 의탁하게 되었으므로, 이종성은 박문수와 함께 글을 배우며 자랐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진사) 1등 2위하였고, 1727년(영조 3) 대증광시(문과)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동년 7월 겸설서(兼說書)에 임명되었으나 아직 분관(分館)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처음에는 윤허되지 않았으나, 동년 9월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이에 대해 영조에게 아뢰고 나서야 전조(銓曹)에 명하여 등과(登科)한 자는 분관(分館)되기 전에는 청직(淸職)을 허통(許通)하지 못하게 하였다. 동년 12월 조현명(趙顯命), 고종형 박문수(朴文秀) 등과 함께 20인이 홍문관 신록(弘文館新錄)에 발취(拔取)되었다.

1728년(영조 4) 1월 홍문 정자(弘文正字)가 되었고, 동년 4월 영남 어사로 파견되었다. 동년 5월 비변사(備邊司)를 통해 장계(狀啓)를 올려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현에 갇혀 있는데 율문(律文)으로는 본디 연좌(連坐)되지 않아야 함을 아뢰니 윤허되었다. 동년 6월 회맹제(會盟祭) 때 임소(任所)를 비워야 하는 경상 감사 박문수 대신 감사의 일을 대신하였다. 동년 7월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동년 10월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동년 12월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729년(영조 5)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고, 동년 2월 부교리,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동년 3월 영남 어사로 나갔다가, 동년 4월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다. 동년 5월 다시 부교리가 되었고, 동년 7월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곧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나갔으나 이내 개차(改差)되었다. 그러나 동년 윤7월 북도(北道)의 수재(水災)가 심하므로 북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북도 어사로 파견되었다. 영조가 말하길, "어사의 소임은 이종성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비록 어버이(이태좌)의 나이가 많다 하여 이제 막 북평사(北評事)에서 체직되었지만, 어사는 곧 왔다갔다 하는 소임이니 이종성으로 어사를 차출(差出)하도록 하라. 곡식을 옮기는 것은 곧 왕정(王政)의 큰 일이니, 영남의 곡식 1만 석과 관서의 돈 1만 냥을 시급히 꾸어 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동년 윤7월 응교(應敎)가 되었다. 동년 12월 북도 어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730년(영조 6) 1월 응교, 2월 교리가 되었고, 북로 감진 어사(北路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동년 6월 돌아와 응교가 되었다. 동년 8월 영조가 하교하기를, 하교하기를, "일찍이 남상(南床)을 겪는 자로, 동벽(東壁)에 오른 지가 오래 되어서 전한(典翰)으로 마땅히 나가야 하는데도 나가지 못한 것은 비의(備擬)된 사람이 없어서인가?" 하였는데, 이는 영조가 마음속으로 이종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후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나갔다가 동년 11월 돌아와 부응교, 시독관이 되었다.

1731년(영조 7) 관서 어사로 파견되었고, 비변사를 통해 장계를 올려 정초 장무대(精抄壯武隊)와 양삼수군병(良三手軍兵)을 한결같이 모두 감포(減布)하게 하였다. 동년 7월 정언 이성효(李性孝)가 상소하여 아뢰길, "관서 어사 이종성이 사람을 대신시켜 염문(廉問)하게 한 것과 관동 어사 한현모(韓顯謨)가 집에 있으면서 서계(書啓)를 만든 것은 모두 종전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후일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견책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파직되었다. 동년 9월 부응교, 10월 부교가 되었다. 동년 10월 소대(召對)를 행하여 시강관 이종성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는데, 영조가 말하길, "오랫동안 유신(儒臣)을 보지 못하였더니, 이제 또 좋은 말을 들었노라."라고 하였다. 동년 11월 기호(畿湖)의 진정(賑政)이 시급하다 하여 경기 별견 어사(京畿別遣御史)로 파견되었다.

1732년(영조 8) 1월 소대(召對)에서 시강관 이종성이 당감(唐鑑)을 강하여 아뢰길,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수(隋)나라 왕실의 자손을 죽이지 않고 또 녹용(錄用)하였으니,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국초에 왕씨(王氏)의 자손을 배에다 싣고 바다에 빠뜨린 일은 바로 정도전(鄭道傳) 무리의 계책이며, 성조(聖祖)의 뜻은 아니었습니다."하니, 영조가 기백(畿伯)에게 추천하여 아뢸 것을 명했다. 동년 5월 조적(糶糴)과 절미(折米)의 창고에 보관된 허실(虛實)을 염찰(廉察)하도록 명을 받고 과천 어사(果川御史) 파견되었다. 이후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지냈다.

1733년(영조 9) 6월 승지(承旨)가 되었고, 동년 7월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동년 10월 묘당(廟堂)의 천거로 이조 참의가 되었고, 동년 11월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734년(영조 10) 3월 비국(備局) 부제조(副提調), 동년 4월 부제학, 동년 9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

1735년(영조 11) 5월 부제학, 동년 11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 동년 12월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영조에게 아뢰길, "근일에 민형수(閔亨洙)와 이종성이 번갈아 서로 소를 올렸는데, 그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며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종성은 세상에 수용(需用)할 재능이 있어 제배(儕輩)들보다 뛰어난데, 그 논의하는 바가 본래 스스로 느즈러지지 아니하며 정사의 주의(注擬)에서는 한편에 치우친 바가 없지 않으므로, 신이 일찍이 이것을 힘써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종성이 어찌 사정(私情)을 행하려는 데에 뜻이 있겠습니까? 대개 관리를 등용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뒤로부터 전주(銓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사(三司)에서 자기의 일을 논하였는데, 비답(批答)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대변(對辯)하면서 남의 집안과 세대를 헐뜯다가 그 말이 그 아비와 형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 사체(事體)를 크게 잃게 된 것이니, 마땅히 이종성을 죄주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자못 그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의 관직을 파면시키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이를 진정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1736년(영조 12) 2월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종성 등을 서용(敍用)하도록 청하니, 영조가 이에 따랐다. 동년 3월 영조가 기로소의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 및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를 희정당(熙政堂)를 인견(引見)하였다. 영조가 오례의(五禮儀)의 향로의(享老儀)에 ‘여러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면 찬자(贊者)가 일어나기를 청한다.’는 절목이 있다 하여 두 대신(大臣)에게는 각기 그 아들을 시켜 붙들고 들어오도록 명하니, 이에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閔亨洙)와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이 각기 그 아비를 부축하여 섬돌에 올라 문에 이르자, 곡배(曲拜)하지 말도록 명하고 영조가 비로소 의자에 올라앉아 위유(慰諭)하고 관곡(款曲)하게 대접하고, 선온(宣醞)하였는데, 두 대신이 한 잔씩 마신 뒤에는 각기 그 아들로 하여금 대신 마시게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민형수와 이종성으로 하여금 마주 대하여 마시면서 유감을 풀도록 하고 이르기를, "어찌하여 서로 다투느냐?"하자, 이종성이 취하여 아뢰기를, "민형수의 아비가 신의 아비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으니, 신의 아비는 바로 그의 아비와 같습니다. 그의 상소에 신의 아비를 기롱한 말이 있었는데, 이는 불초(不肖)한 자식입니다."하고, 이에 ‘저 당(黨)’이나 ‘이 당(黨)’이니 하면서 서로 용권(用權)하였다고 배척하면서 서로를 양보하지 않았는데, 이종성은 이미 너무 취하여 더 마실 수 없으므로 마침내 부축하여 나가도록 명하고, 민형수에게 이종성의 잔까지 두 잔을 모두 마시도록 명하였다. 자리를 파함에 이르러 영조가 민진원, 이태좌에게 의자 앞으로 나와서 서도록 명하고 손을 잡고 위유(慰諭)하고는 인해서 문피(文皮)를 내렸고, 영조가 의자에서 내려와 전송하였다. 동년 3월 대사간, 부제학, 동년 9월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737년(영조 13) 7월 병조 참판, 동년 8월 동지의금부사, 동년 9월 도승지,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동년 10월 공조 참판, 비국 당상을 지냈다.

1738년(영조 14) 1월 대사성, 부제학, 동년 6월 호조 참판, 동년 8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

1739년(영조 15) 2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동년 3월 부제학이 되었다. 동년 8월 전에 응교(應敎)로서 사묘(私墓)의 산을 바친 사람에게 벼슬을 제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논하고 또 박문수(朴文秀)가 흥감(興感)한 말을 무식하다고 배척한 일로 인해 관작이 삭탈되었다. 동년 9월 영조가 말하길, "이종성을 대율(大律)로 처치하지는 않았으나, 그 말은 매우 그르다." 하였기에, 판의금부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길, "이종성이 무식하다고 말한 것은 대개 박문수(朴文秀)가 '재상묘(宰相墓)의 주인(主人)도 다 벼슬하는데, 사묘(私墓)의 주인이 어찌 벼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므로 그 말을 무식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영조의 심기가 비로소 풀려 말하기를, "그 말에 까닭이 있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말을 듣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1741년(영조 17) 5월 관작이 회복되어 대사간, 동년 6월 동지경연사, 동년 7월 우부빈객(右副賓客), 동년 8월 이조 참판, 부제학, 동년 9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예문관 제학, 평안 감사가 되었다. 동년 11월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상소로 평안 감사에서 체직(遞職)되었다. 동년 11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

1742년(영조 18) 4월 공홍 감사(公洪監司)가 되었다. 동년 9월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정경(正卿)이 몹시 적다 하여 재신(宰臣) 정우량(鄭羽良)과 김약로(金若魯)를 발탁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김약로의 경우 신(臣)처럼 불초(不肖)한 자가 어찌 감히 내거(內擧)의 뜻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경(亞卿)의 숙망(宿望)으로는 이종성만한 이가 없는데, 지난번에 이미 천망(薦望)하였지만 아직 윤허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신은 바야흐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하니, 영조가 말하길, "이종성은 참으로 총재(冢宰)의 재목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번선(藩宣)에 있으니, 우선 정사(政事)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1743년(영조 19) 7월 부제학, 동년 8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동년 10월 공조 판서, 11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1744년(영조 20) 1월 이조 판서가 된 후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인척임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동년 2월 동지성균관사를 겸직했다. 동년 3월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이조 판서 이종성과 인아(姻婭) 사이라는 이유로 함께 양전(兩銓)에 있게 되는 것을 혐의하였는데, 누차 독촉하고 면려시켰으나 끝내 명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서종옥은 삭직(削職)되었다. 동년 5월 예조 판서가 되었고, 동년 8월 승품되어 정2품(상계)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 예문관 제학을 겸직했다. 동년 9월 영조가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왕세자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하례하는 것을 받았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교문은 예문관 제학 이종성이 지어 올린 것이다.

1745년(영조 21) 1월 형조 판서가 되었고, 동년 4월 다시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2월 공조 판서가 되었고, 동년 윤3월 평안도 도과 시관(平安道道科試官),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동년 5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동년 9월 함경 감사가 되었다.

1747년(영조 23) 12월 변상(邊上)에 범월(犯越)한 일로 인해 이종성 등이 파직되었다.

1748년(영조 24) 1월 빈객(賓客)이 되었다. 이후 함경 감사로 나갔다가, 동년 4월 대사헌이 되었다.

1749년(영조 25) 1월 이조 판서가 되었고, 이후 지돈녕부사가 되었고, 동년 5월 우빈객을 겸직했다. 동년 6월 개성수(開城留守)로 나갔다.

1750년(영조 26) 1월 지경연사가 되었다.

1752년(영조 28) 2월 우빈객이 되었다. 동년 6월 좌의정을 거쳐, 동년 10월 영의정에 올랐다.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753년(영조 29) 3월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던 김상로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했다. 동년 5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754년(영조 30) 1월 소령원(昭寧園)의 추숭(追崇)에 관한 일로 연루되어 홍봉조와 함께 직첩(職牒)이 거두어지고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실록의 사신(史臣)은 말하길, "이종성과 홍봉조는 일찍이 사묘(私廟)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으나, 그 마음을 돌아보면 숨김이 없는 데에서 나왔을 뿐이다. 어찌 신하로서 짐짓 그 임금의 사친(私親)을 폄굴(貶屈)하려는 자가 있겠는가? 그런데 임금의 마음이 지나치게 의심하여 이희운(李熙運)의 해괴한 소 때문에 신하들에게 허물을 옮기기까지 하였고, 또 조관빈이 죽책문(竹冊文)을 짓기를 사양한 소가 어찌 이희운에게 관계되는 것이 있으랴마는 문자를 들추어내어 억지로 죄주어 크게 성덕(聖德)의 흠이 되었으니,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동년 3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조용히 영조에게 말하길, "대신(大臣)을 견벌(譴罰)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한데, 접때 판부사 이종성은 30년 전의 일로 중간에도 이미 견벌을 받았었고 또다시 뒤미처 제기하여 중벌을 주기에 이르러서는 신이 간쟁하여 잘 되지 않았었는데, 이제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니 마땅히 은유(恩宥)를 내리셔야 하겠고, 같은 때에 죄받은 두 신하도 거두어 서용하셔야 하겠습니다."하니, 영조가 말하길, "그때에 이희운(李熙運)의 글 때문에 슬픈 생각이 마음에 차서 그런 처분이 있었으나, 그 뒤에 생각하니 잘못이었다. 접때 전 좌상(左相)을 서용할 때에 아울러 하유(下諭)하려 하였으나 말하지 않은 데에는 뜻이 대개 있었다. 이제 경이 아뢴 것을 들으니, 참으로 옳다. 전 판부사 이종성은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하고, 조관빈(趙觀彬)·홍봉조(洪鳳祚)도 마찬가지로 직첩을 주라."라고 하였다. 동년 3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755년(영조 31) 2월 나주 괘서 사건으로 을해옥사가 일어나자, 동년 3월 17일 판중추부사로 있던 중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그러나 동년 4월 17일 서용되어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동년 5월 6일 영조가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윤혜(尹惠)의 문서에 열성(列聖)의 어휘(御諱)가 한 종이에 나란히 쓰여 있는 것이 있어 영조가 놀라고 통분하였고, 보여(步輿)를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가서 종묘를 지나 가마에서 내려 엎드려 울었으며, 마침내 숭례문(崇禮門)의 누각에 나아가 갑주(甲胄)를 입고 대취타(大吹打)하면서 다시 윤혜를 형신하였다. 영조가 울면서 말하길, "이는 바로 원범(元犯)이기 때문에 6월에 군사를 일으키는 뜻을 써서 몸에 갑주를 입었으나, 내가 어찌 즐거이 하는 것이겠는가?"하였는데, 이종성이 아뢰길, "죄인에게 형을 시행하는 것은 유사(有司)의 일일 뿐인데 지존(至尊)으로서 어찌 친히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충주목(忠州牧)에 부처(付處)되었다. 동월 12일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진달에 의해 석방되었고, 동월 14일 영조의 하교로 작첩을 돌려받고 서용되어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동년 7월 유생들이 왕세자에게 상소하여 "이종성은 이광좌(李光佐)를 사표(師表)라고 일컬어 방자하게 장주(章奏)에 썼습니다. 박문수(朴文秀)는 지난번 반교(頒敎)하는 날에 그의 집에 누워 있으면서 홀로 입참(入參)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이종성과 박문수의 당역(黨逆)한 죄를 바루소서."라고 하였으나 불허되었다.

1758년(영조 34)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동년 9월 1일 영조가 효소전(孝昭殿)의 삭제(朔祭)를 친히 행한 뒤에 영조의 명으로 파직되었으나, 동월 5일 서용되었다.

1759년(영조 35) 1월 12일 사망하였다. 영조가 하교하길, "이 영부사는 봉조하(奉朝賀)의 아들로서 참하(參下)에서부터 그 임금의 지우(知遇)를 얻었고 말초(末抄)에까지 확연(廓然)한 그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기에 나에게는 뿌리쳐도 가지 않는 신하였다. 지난번에 입시(入侍)한 지가 약간일(若干日)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이러한 흉보(凶報)를 들을 줄 뜻하였겠느냐? 듣고서도 심히 의아스러워 문득 참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슬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겠느냐? 무릇 여러 가지 범절을 예(例)에 의하여 거행토록 하고 녹봉을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주며, 그 아들은 결복(闋服)을 기다려 녹용(祿用)하여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라고 하였다.

실록에서 사신(史臣)이 말하길, "이종성은 문사(文詞)가 섬민(贍敏)하고 성질이 강명(剛明)하였다. 그런데 을해년 뒤에는 허물을 씻을 수가 없어서 부끄러움을 품은 채 구용(苟容)함을 면치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종성은 이태좌(李台佐)의 아들로 소년에 급제하여 남상(南床)에 뽑혔었고, 시배(時輩)들이 추예(推譽)로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지위가 태보(台輔)에 이르러서는 소론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평일(平日)의 사범(師範)은 단지 이광좌(李光佐) 뿐이었는데, 을해년에 이르러서야 황연히 크게 깨달아 비로소 전년(前年)의 잘못을 알고 임금 앞에서 우러러 진달하였다. 그가 참으로 잘못을 깨닫고 그렇게 할 것인지, 아니면 중심에는 그렇지 못한 바가 있었던 것인지 마땅히 분별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796년(정조 20) 3월 정조가 전교하길, "고(故) 정승의 집을 자별(自別)하게 보는 것은 계유년과 무인년에 수립(樹立)한 공이 있기 때문이다. 석년(昔年) 이맘때 고(故) 정승의 부자가 희정당(熙政堂)에 입시했을 때의 은례(恩禮)가 분명하게 기주(記注)에 실려 있는데, 어찌 차마 이날을 헛되이 보내겠는가. 고(故)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의 집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라. 제문(祭文)은 친히 지을 것이다. 또 고(故) 정승 이태좌(李台佐)에게도 치제하라." 하였다.

1899년(고종 36) 9월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자, 동년 12월 의정부에서 장종의 실(室)에 배향할 공신으로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종성(李宗城)과 우의정 정헌공(正獻公) 민백상(閔百祥)을 회권(會圈)하여 상주하니 윤허되었고, 같은 달 장종이 황제로 재추존되면서 장종은 장조(莊祖)로 격상되었다.

3. 여담

야사로 왕통이 어지럽혀질 뻔한 일을 막은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평소 알고 지내던 궁궐 수문장 손호관에게 "어느 노비가 보자기로 싼 음식 바구니를 들고 올 텐데 이유를 불문하고 그 바구니를 칼로 베어 버려라"라고 엄히 명했다.

그의 말대로 한 여자 노비가 바구니를 가져오자 수문장은 단칼에 베어버렸는데, 그 안에는 한 갓난아기가 죽어 있었다. 알고 보니 궁 안의 한 후궁이 자신이 왕의 아들을 임신한 척하고 바깥에서 아기를 데려와서 왕자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이를 이종성이 알고 막은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혜안에 감탄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 인해 문씨 일족은 모두 멸족되었으며, 평소 문씨 일가의 행실을 알고 멀리 했던 문김 생원과 그의 일족만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수문장 손호관과 관련된 다른 야사도 있다. 하루는 이종성이 평복 차림으로 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우연히 기골이 장대하고 대범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무과에는 급제했으나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와서 벼슬을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종성은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저동(苧洞) 사는 이 중추부사가 사람에게 공정하다고 하니 그에게 부탁하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주저하다가 혹시나 해서 이종성이 알려준 집으로 가서 중추부사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중추부사 대감이 바로 이종성이었다. 무례를 범했다며 용서를 구하자 이종성은 오히려 젊은이가 마음에 들어서 이리 한 것이라며 그를 궁의 수문장으로 일하게 했다고 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