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백익(伯益). 초명은 정인대(鄭麟大).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시가 쪽 먼 친척 출신 양자이자 외척이다.
북한 정무원 부총리를 지낸 정준택은 그의 증손자이며, 북한 국가보위상 정경택은 그의 현손자이다.
2. 생애
1749년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현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생선장수로 생계를 잇던 아버지 정석달(鄭錫達)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기태(李基泰)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직계에는 5대조 정시창(鄭始昌)이 1633년(인조 1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2위로 입격하여 정5품 형조 정랑(正郞)에 오르고 고조부 정백빈(鄭伯賓)이 81살 넘게 장수하여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된 것을 마지막으로 몇 대에 걸쳐 이렇다 할 관직에 오른 조상들이 없었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전술했듯 생선장수로 생계를 잇는 지경으로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1757년(영조 33) 사종숙(四從叔, 11촌 지간)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에게 입양되면서, 그를 비롯하여 생부모와 생가 쪽 식구들의 형편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팔자를 고치게 된 것이다.
2.1. 영조 생전
당시 영조에게 가장 총애받던 딸 화완옹주의 양자이다 보니 정후겸도 덩달아 영조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다.
1764년(영조 40) 종8품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정7품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765년 식년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3등 57위, 2등 10위로 급제하여 같은 해 종6품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종6품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에 제수되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 1위(아원)으로 급제하여 정6품 병조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 이후 1767년(영조 43)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에 올랐고, 이어 종5품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정5품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내고 1768년 정3품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이듬해 정2품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정3품 호조 참의·종2품 호조 참판·종2품 공조 참판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와 세손을 공격하는 등의 모략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세도가로 혜경궁 홍씨의 숙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할 것을 선언할 때에도 강력히 반대했고 동궁에 사람을 비밀스럽게 보내어 세손의 언동을 감시케 하기도 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부사직(副司直)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분주하였다.
정후겸이 왜 이런 일을 한 것인지는 의문이나,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온양 행궁을 가기 위해서 화완옹주에게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양자인 정후겸을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혜경궁은 어린 아이가 무서워하지도 않고 노려보니 그때부터 독물인 줄 알았다고 서술했는데, 세손 모해에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있다.
2.2. 영조 사후
정조 즉위 후 정조에 반대했던 홍인한 세력이나 화완옹주의 힘이 줄고,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 채제공이나 소론, 남인 등이 힘을 얻으면서 정후겸도 힘이 줄어든다. 정조 즉위 후 대신들이 정후겸을 죽일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함경도 경원도호부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정조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결국 사사되었다. 그리고 역적을 법적인 영조의 양외손(養外孫) 자격으로 둘수 없다는 정조의 명령으로 정조 원년 8월 28일 양모 화완옹주와 강제 파양되게 되었다.
2.3. 사후
순조 때 역적으로 단죄되었지만 1908년(순종 융희 2)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3. 여담
화완옹주는 1738년생으로 양어머니와 나이차가 11살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혼인과 출산을 빨리 하던 시대였으므로 현대의 부모자식에 비하면 '약간' 수준이었지만.
북한의 정치인인 정준택이 그의 증손자, 정준택의 아들인 정경택은 그의 현손자이다. 다만 상술했듯 정후겸의 양자는 정후겸 사후 족보상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계 후손은 아니다. 참고로 양자와 정후겸의 나이차가 무려 102살이다.
노론인 홍인한과 손잡고 어울리기는 했지만, 양조부 정우량이 소론계였기에 소속 당파는 소론으로 추정된다. 영조에게 청해 소론 삼대신들인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의 관작을 복구하게 하였고, 소론 대신들인 구윤옥과 서명선이 정후겸과 친하게 지냈다며 정조에게 사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