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영조, 정조 시기 문관
진사를 지낸 김치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 홍석보의 딸이다. 김종수의 외조부 홍석보는 혜경궁 홍씨의 조부 홍현보의 형으로, 김종수는 혜경궁 홍씨의 6촌 오빠가 된다.
영조 시절에는 노론 계파인 청명당의 지도자로서 세손(후일의 정조)을 제거하려는 척족 세력과 대립하고 세손을 보호했으며, 그 공으로 정조 시절에는 정조의 최측근인 동덕회의 일원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노론 내 소수파이지만 당의 영수가 되고 좌의정까지 오른다.
2. 생애
어릴 적에는 형과 함께 중인 계층 출신의 시인 정래교와 김창협의 제자이자 민진원의 조카인 민우수에게 학문을 배웠다. 형 김종후는 주로 학자로 알려졌으며 관직에 나아갔다 홍국영이 탄핵될 때 홍국영과 붙어먹었다는 참소를 듣고 탄핵되었으나 정조의 보호로 무사했고, 이후 노론 낙론 계통의 산림이 되었다. 김종수 역시 정치적인 것과는 별개로 학문적으로는 온건한 낙론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음서로 출사하였다. 17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795년에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노론의 핵심 가문인 명문 청풍 김씨 가문의 일원. 영조 시절 집권당이었던 노론은 다양한 분파로 또 나뉘는데, 같은 가문 내에서도 김종수의 조부의 사촌형제인 김상로, 김약로 등은 사도세자 및 세손(후일의 정조)와 대립한 반면, 조부의 다른 사촌인 김재로, 그 아들인 김치인, 그리고 김종수 등은 청명당에 가담하여 세손을 지지하였다.
노론 청명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형 김종후가 재야 산림의 역할을 했기에 재야 노론 산림 세력과도 가까웠다. 17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홍문관 부수찬 등을 거쳤으며, 특히 세손시강원의 관원으로 정조를 가르쳤는데, 이때 그는 정조에게 임금이자 스승이자 아버지가 될 것(군사부)와 개인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으로,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으로 구분할 것, 또한 그 연장선으로 외척의 정치참여를 배제할 것을 정조에게 강조하였다. 당대 신하들 중에서도 예법에 대해 해박하기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러한 면모가 두드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명당의 일원으로서 당시 정치를 어지렵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의 척신 세력을 비판하였으나, 숙부인 김치인과 함께 당폐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1772년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영조도 김종수의 배경 때문인지 아니면 김종수 개인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숙부인 김치인과 함께 유배되기 전까지만 해도 김종수를 챙겨주었다. 당초 김종수를 지방관으로 발령했으나 노모(老母)가 생존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영조는 발령을 철회했으며, 어머니의 나이를 물은 후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한다며 초록 비단을 김종수에게 하사하였다. 김종수는 이를 받고 정전에서 나오자마자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이 사연을 형인 김종후와 함께 비단족자에 기록해놓았다.
정조 즉위 후 중용되었다. 영조 말엽 정치를 어지렵혔던 척신 세력인 홍인한, 정후겸 등을 벌 줄 것을 정조 즉위 직후에 상소하여 관철시켰고, 평소 가깝게 지낸 김귀주 축출 및 정조 등극의 일등 공신이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정치를 어지럽히던 홍국영 제거에도 앞장서면서 정조의 통치가 자리잡을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
이후 정조 치세에서 노론이 벽파와 시파로 분화되자 노론 벽파의 수장이 되었다. 청명당은 애당초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연장선에서 대부분의 노론 청명당 출신들은 서명선으로 대표되는 소론, 채제공으로 대표되는 남인, 그리고 정조의 탕평론에 동조한 노론 시파나 탕평파와 달리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정파에 배타적인 노론 벽파가 되었다. 정조 연간 김종수가 이끄는 노론 벽파는 정조의 탕평책 뿐만 아니라 정조의 숙원이었던 사도세자 신원은 표면적으로나마 끝까지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조 치세 내내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조정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벽파의 수장이었던 김종수 역시 정조가 각별히 총애한 채제공 등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관직은 계속 올라서,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역임한다.
여러 이유로 문제를 일으켜 지탄을 받고 파직당하기도 수차례였는데, 수어사로 있을 때 사소한 일로 병조판서와 다투어 눈총을 산 바 있고, 우의정으로 있을 때는 하급 무장들을 줄로 묶어 도성 밖까지 끌고 갔다가 지탄을 받기도 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에 행차했다 주저앉아 오열한 일을 가지고 임금의 체통에 어긋난다고 상소했다가 정조의 분노를 사 위리안치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조가 '내가 그를 죽을 뻔한 죄에서 구해준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곧 다시 재등용되었는데, 이는 노론 내 원칙론자이자 벽파의 영수라는 지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조의 신뢰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노론 벽파의 수장으로서 노론 시파, 소론, 특히 남인과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그나마 강경파의 지도자인 심환지에 비하면 온건한 편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채제공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지만 채제공이 입안한 정책들은 사안에 따라 찬성해 주었다. 또한 말년에는 정조의 입장을 상당부분 이해하고 기존의 강경한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조와 심환지가 나눈 비밀편지에도 호인 몽오(夢梧)나 '몽상(夢相)'이라는 이름으로 이따금 언급된다. 이때는 이미 은퇴를 하고 정계를 떠난 상황이었는데 정조의 부탁을 받아 다른 노론 벽파 신하들과 함께 정조가 원하는 내용의 상소를 써주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기에는 다른 정조의 최측근들과 마찬가지로 입장을 선회해 사도세자의 추숭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1799년(정조 23)에 죽었는데, 그가 죽고 열흘 뒤에는 정조의 탕평이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채제공도 그 뒤를 따랐다. 공교롭게도 1년 뒤에는 정조도 그들을 따라가듯 승하했다. 유언호, 김조순과 함께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사후에 8자 흉언 사건으로 노론 벽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낙인찍혀 관작을 추탈당하고 출향되었지만,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되었다.
3. 여담
후대의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에게는 종고조부가 된다.
어린 정조를 가르친만큼 정조와 사적인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이는 일화가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의빈 성씨와 관련된 일화다. 김종수에게 “국조(國朝)의 비근한 예에 따라 이미 궁 안에 마음을 둔 사람이 있다.” 라며 의빈 성씨에 대한 연심을 김종수에게 슬쩍 고백했다.몽오집 연보 제1권 몽오 김공 연보 3년 기해(1779) 11월-대부인을 모시고 고향 집으로 갔다. 조정으로 돌아가 입시하였다.
정후겸에게 아첨했다고 언급되는 <한중록>과는 달리 정조가 직접 쓴 존현각일기에는 정조를 지지하며 김종수가 정후겸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후겸이 정조에게 '김종수가 밤마다 나귀로 세손에게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김종수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며, 이에 정조가 '김종수와 나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다'라고 둘러댔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