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정치인.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가이다.
2. 생애
1772년 과거에 급제한 후,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 1774년 3월 동궁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772년 정조와 처음 대면해 빠르게 친해진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73년 영조 곁에서 한림 역할을 했다.
정조의 즉위 이후 급작스러운 출세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영조 또한 홍국영을 좋아했고, 흔히 말하는 세도정치는 이미 영조 말부터 시작되었다. 1776년 정조의 즉위 직후 정후겸, 홍인한을 숙청할 때 사유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았다."와 "세손의 오른 날개(홍국영)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1776년 3월 13일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1776년 4월 13일 좌승지에 앉았다는 기록이 있고 1776년 7월 6일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홍국영은 그렇게 5년을 도승지로 재임하면서 도승지=홍국영을 의미하는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훈련대장도 역임하면서 구선복을 비롯하여 당시 군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구씨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이외의 여러 중요 관직들을 도맡았으며, 규장각 설립 이후 첫 직제학으로서 초창기 일을 도맡았다고 하니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말했다.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이를 걱정한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가 후궁 간택을 명했는데,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원빈'(元嬪)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중전인 효의왕후 김씨가 새파랗게 살아있음에도 '으뜸 원(元)' 자를 썼다. 원빈 홍씨의 가례는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여 치러졌고, 생전에 조정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원빈 홍씨는 가례를 치른 후 1년 만인 1779년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효휘궁'(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죽어서도 그 이례적인 대접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국영은 이후에도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게 하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쳤다.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인데, 즉 '조선 왕실과 홍국영의 집안이 동등하게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 일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토사구팽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꼽힌다.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서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여동생이 사망한 뒤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한 것은 왕실의 혈통이 번성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고, 전례 없이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은 정조를 성불구자 취급한 것이며 결정적으로 감히 방계군의 봉호에 본향을 명기한 것은 임금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이는 홍국영이 자신의 권세를 대놓고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였다. 현대인이 봐도 굉장히 기괴해 보이는 행보인데, 후계자로 양아들을 들일지 말지, 후궁 간택을 할지 말지, 방계군에게 봉호를 하사할지 말지는 모두 국왕의 직접 소관이지 일개 신하가 마음대로 결정하고 강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하게도 정조는 이를 괘씸하게 여겼을 뿐더러 정조의 아내인 효의왕후 김씨,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원리원칙을 철저히 하는 정순왕후 김씨 등 왕실 사람들마저 홍국영을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1779년 홍국영은 정조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조보(朝報)를 받아본다거나 '조정 일에 관여한다면 천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내용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이에 윤허받아 봉조하(奉朝賀)에 제수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32세밖에 안 된 젊은이가 봉조하에 제수된 기록적인 사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홍국영은 봉조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정조의 총애와 그의 권세, 좌의정인 그의 백부 홍낙순 등의 존재로 인해 조정은 한동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후 홍국영의 추천으로 조정에 오른 송시열의 후손이자 산림의 영수로 칭송받고 있었던 송덕상을 비롯한 홍국영의 사람들이 "32세 젊은 나이에 봉조하가 웬 말이냐?!"면서 홍국영을 복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은 내심 흡족해했다. 그런데 소론으로 정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중신 서명선은 평소에 홍국영의 전횡을 싫어하였기에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보를 밟지 않았고, 이에 홍낙순 이하 홍국영의 수하들과 집안 사람들은 그를 맹렬히 탄핵했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홍낙순을 내쫓고 홍국영도 유배보내 버렸다. 가뜩이나 왕족과 신하들의 원한을 많이 받았던 홍국영이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그에 대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조가 도성 바로 턱 밑인 제기에 그냥 놓아두며 꾸준히 문안을 요구하는 전언을 내리는 등 몇 번의 왕래를 하였으나, 정조가 초본을 작성했다는 김종수의 유배 상소를 시작으로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상소를 받으며 도성에 출입할 수 없는 조치와 함께 강원도 강릉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비참하게 몰락한 홍국영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다. 다만 널리 알려진 가난한 이미지의 최후와는 다르게 죽은 뒤 홍국영의 처분을 논하며 항의하는 신하들의 언사를 보면 죽을 때까지도 정조가 하사한 토지 600결을 가지고 있었고, 몰수해야 할 노비의 수가 100명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지내던 집도 꽤나 좋았던 모양. 홍국영이 죽기 전부터 이것들을 몰수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상소에 꾸준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응하지 않은 정조의 태도를 고려하면 아랫문단에서 서술된 야사의 내용처럼 홍국영을 굳게 신뢰했던 결과로 보여진다.
홍국영이 쫓겨나고 나서 당시 그가 관여했던 기록들은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한다. 홍국영의 사후에 그의 사람이었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의 역모가 적발되었고, 상계군 이담에게도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풍산 홍씨는 그야말로 몰락의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홍국영과 함께 송덕상도 몰락했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정조 초반기에 희한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송덕상이 삭탈관직을 당하자 유생들이 통발로 반대 상소를 날리거나, 송덕상을 옹호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고했다가 잡혀서 유배간 신형하, 신형하를 옹호해 유배된 박서집 등 대다수가 유배를 갔다. 심지어 송덕상의 제자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다른 일로 유배갔는데 우연히 같은 유배지였던 박서집에게 계획을 털어놨다가 박서집이 겁먹고 고발해서 잡혔던 문인방 등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3. 여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이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 중 한문제의 "짐은 고황제 측실 소생이었다(側室之子)" 발언을 적은 어구를 싫어했다. 어느 날 세손이 영조에게 문안을 갔는데 영조가 세손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세손은 별 생각 없이『통감강목』을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강목 넷째 권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 있는데도 읽었단 말이냐?" 라고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그 말에 세손은 엉겁결에 "그 대목은 읽지 않았습니다." 라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대전 내관에게 명하여 동궁으로 가서 세손이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세손의 속은 타들어갔는데, 임금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기군망상의 죄가 되어 엄히 다스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전 내관이 동궁에 갑자기 나타나서 강목 넷째 권을 찾자 평소 영조가 강목 넷째 권의 특정 구절을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던 홍국영은 자신이 책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뒤 문제의 내용이 적인 강목 넷째 권의 낱장을 급히 찢어낸 후 책을 대전 내관에게 내주었다. 대전 내관이 강목 넷째 권을 가져오자 영조는 해당 구절이 적힌 낱장을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고, 대전 내관은 해당 낱장이 찢겨나갔다고 보고한다. 대전 내관으로부터 강목 넷째 권을 넘겨받아본 영조는 해당 낱장이 찢겨나간 사실을 직접 확인한 후 세손을 크게 칭찬하는 것으로 소동은 마무리되었고, 세손은 위기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홍국영의 임기응변을 알게 된 세손은 이를 재생지은(再生之恩)이라고 고마워하며, 홍국영에게 "내가 만약 무사히 보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대가 거병범궐(擧兵犯闕)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신변과 지위를 보전하겠소."라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면서 홍국영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았다.
홍국영이 정조의 측근이 된 유래를 설명하는 일화로가 전해진다. 이것이 과장되어 《자치통감강목》을 영조가 금서로 지정했다는 말이 덧붙여지기도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자치통감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주자가 '강'(綱)과 '목'(目)이라는 항목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인데, 조선 사회에서 《자치통감》과 주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경연에서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을 자주 진강할 정도로 이 책들을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심지어 영조는 세손에게 《강목》에 대해 질문하고 그 대답을 칭찬한 적도 있다. 이 일화가 유명해져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인지 홍국영이 낮은 하급 관리였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지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영조는 보령(寶齡)이 80여 세쯤 되자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어 늘 옥당(玉堂)의 한림과 주서를 시켜 고서를 읽게 해 듣곤 하였다. 하루는 승지가 먼저 읽고 다음으로 겸춘추(兼春秋)가 읽을 차례가 왔는데, 겸춘추가 읽을 부분은 〈노중련전(魯仲連傳)〉이었다. 막 읽기를 시작할 무렵 상은 침상에 누워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코를 골며 그야말로 단잠을 자고 있다가, 겸춘추가 〈노중련전〉에 나오는 ‘질차(叱嗟)’ 다음의 네 글자를 읽어 내려가자 갑자기 놀라 깨어 벌떡 일어나 앉고는 손으로 바닥을 치며 “감히 그 네 글자를 읽어 내 귀에 들리게 하는구나. 읽은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겸춘추는 읽기를 멈추었고 근신들은 모두 두려움에 몸을 떨었는데, 그때 금상이 세손으로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신이 줄곧 여기에 있었는데 그 네 글자를 읽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읽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상이 “정녕 내 귀에 들렸는데, 신하들이 설마 못 들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신하들이 세손의 앞선 대답을 통해 한목소리로 “신들도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은 낯빛이 조금 누그러져 다시 침상에 누웠고, 이에 연신들은 마침내 물러 나갔다.
대략 30여 년 전 적신(賊臣)이 ‘질차’라는 글자를 소장에 써넣자 당시 대신이 그 사실을 진달하여 마침내 친국이 실시되기까지 하였다. 지극한 효성을 지닌 영조는 30년을 하루같이 그 일을 마음에서 떨쳐 보내지 못하여 자다가도 갑자기 그 소리가 들리면 곧장 몸을 일으켜 마치 미물을 깨부술 것처럼 벼락같은 화를 쏟아냈다. 저 겸춘추는 먼 지방의 낮은 관직을 맡던 사람이었으니, 그 네 글자를 감히 읽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서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때 만약 세손 저하가 임기응변으로 신속히 대응하지 않았다면 장차 화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경연에서 물러 나온 뒤 신하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인이시구나, 세손이시여. 한마디 말씀을 통해 위로는 성상의 도를 넘는 행위를 막고, 아래로는 신자로 하여금 망측한 화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니, 훗날 분명히 성군이 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체제공 『번암집(樊巖集)』, 잡저 59, 讀魯仲連傳
사실 영조는 강목이 아니라 《사기》 <노중련전>에 나오는 질차, 이모비야(叱嗟, 爾母婢耶)라는 어구를 싫어했다. 인물 채제공의 《번암집》에 이 기록이 남아있다. 《번암집》에선 그 직후 채제공이 정조의 아량을 극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드라마 《홍국영》,《옷소매 붉은 끝동》 등에서는 이쪽의 기록을 토대로 재현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에도 영조가 "내가 잠결에 정신놓은 사이 내 앞에서 노중련전의 '그 대목'을 읽은 게 아니느냐"며 의심을 하면서 신하들에게 역정을 내는, 번암집에 나온 일화와 같은 사건을 다룬듯한 기록이 있다. 이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기 노중련전은 이모비야 해당 문구가 야사에서처럼 검열삭제된 채로 유통되고 있었다고 한다. 체제공이 적은 "30여년전 친국이 실시된 사건" 은 영조 12년에 왕에게 올릴 문서에 노중련전의 질차, 이모비야를 인용했다가 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다가 사람이 죽은 사례를 말한다. 노중련전 자체가 이렇게 영조의 역린에 가까운 책이라 괜히 저기서 체제공이 정조의 아량을 찬탄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쓴 존현각 일기에는 홍국영이 어염의 괴소문을 접하고 정조에게 보고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정조가 이를 어찌하면 좋냐고 묻자 더 캐고 올라가면 권귀(權貴)를 건드려 덧낼 수 있으니 포도청에 넘겨 엄히 캐물어 그 맥락을 알아야 한다고 신중히 조언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맹꽁이 서당》에 의하면 홍국영이 친척인 홍봉한과 홍인한 형제를 찾아가서 아버지인 홍낙춘의 벼슬을 알아봐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이 말을 듣고 홍인한이 "네 아비 같은 못난 밥벌레한테 줄 벼슬은 없다. 썩 물러가라."라고 크게 화를 내며 쫓아내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고 묘사된다. 홍낙춘이 왜 친척인 홍인한에게 멸시를 받았느냐 하면 홍낙춘은 술자리에서 배따라기 같은 노래들을 즐겨 불렀는데 조선 시대에는 가수 같은 예능인들이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지 못하고 못난 광대라고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홍낙춘도 광대라며 멸시를 받았던 것. 하지만 이후 홍국영의 출세 덕분에 홍낙춘도 덩달아 살아났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풍산 홍씨 가문에서도 홍봉한, 홍인한과 함께 세도를 누릴 수 없는 방계 쪽이었던 듯하다. 홍국영이 홍인한을 죽이는 데 앞장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인한은 "영안위 자손 중에 저런 못된 인간이 날 줄 어찌 알았으랴! 필시 집안을 망하게 할 자로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홍국영이 본격적으로 입신양명하기 전에 굉장히 깔봤기에 홍국영이 그 사실을 알고 오랫동안 분노했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정실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여동생 원빈 홍씨가 죽자 그 배후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를 의심하여 그녀와 대립했다고 한다.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홍국영이 처음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의 기록에 의해 정조의 뜻이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던 게 들통나서 쫓겨났다고 알려졌고 정조가 홍국영을 어쩔 수 없이 쫓아 보냈다고 했지만 유명한 이야기임에도 근거없는 이야기이고, 도리어 홍국영의 세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구조는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홍국영의 세도가 강할 시기에도 홍국영은 어디까지나 왕의 제어하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반역자라기에는 사약은커녕 이름만 있는 관직인 '봉조하'를 받고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다.
죽기 직전에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의 지붕 밑에 사는 굼벵이를 잡아먹고 살면서 길가던 행인들에게 걸핏하면 "저 놈을 귀양보내라", "저 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등 반쯤 미친 상태의 봉두난발 거지가 따로 없었고 오른쪽 눈 안에는 큰 점이 있어서 마치 눈동자가 3개로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꽤 좋은 환경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여지니 해당 야사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편.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정조가 홍국영을 두고 얼굴이 어여쁘다 라는 언급이 있고 심낙수의 《은파산고》(恩坡散稿)라는 기록에도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외모가 준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시력이 좋지 못했던 노년의 영조가 옆에 있던 사관에게 홍국영의 생김새를 묻자 사관이 매우 준수했다(甚精矣)고 대답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존현각일기》에 풍모가 청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홍국영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으며 흔히 홍국영의 초상화라고 떠돌아다니는 것들은 주로 동시대 정조의 충신 정민시의 것이다.
동궁께서는 (홍국영이) 나이도 비슷하고 얼굴도 어여쁘고 슬기롭고 민첩하다 여기셨으니, 벌써 세상에 난리가 난 때더라. 동궁께서 한 번 보시고 두 번 보시는 동안에 제우가 두터워서 지극히 무간한 사이가 된지라, 처음에는 요놈이 간계를 내어 동궁께 직간하는 체하나 실은 간하는 말이 모두 듣기 좋은 말이라. 강직한 사람인 줄 알으셔서 사귀기를 깊이 하신 후에는 못하는 바가 없더니 세손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하인 이외에는 만나시는 것이 사부와 빈객과 궁관에 불과할 뿐이니, 그 자들이 강학이나 의논하지 무슨말을 하며, 하물며 조정의 일이나 외간 설화야 어찌 감히 한마디라도 수작하리요. 그래서 동궁께서 안타깝고 답답하여하시다가 국영을 만나자 아니 여쭙는 말이 없고 아니 아뢰는 말이 없으니, 신통하고 귀히 여기셔서 이전에 사랑하시던 궁관은 점점 멀어지고 국영만이 제일로 알게 되셔서 비유하면 사나이가 첩에게 혹한 모양이더라.
《한중록》
심노숭의 《자저실기》를 번역한 《글쓰기 병에 걸린 어느 선비의 일상, 자저실기》에 10대시절 심노숭이 직접 본 홍국영의 외형이 이렇게 언급된다. "그의 키는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했으나 몸은 꽤 비대하였다. 외모는 모나고 항상 불그레하였으며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걸을 때면 바로바로 발을 옮겼고, 말을 할 때면 팔을 걷어올렸다. 가까이 있으면 쏘는 듯한 기운이 있어서 잠깐 동안이라도 남들이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지금 떠올려보아도 여전히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일성록》 정조 즉위년 7월 7일 9번째 기사 중 정조가 "저 승선이 비록 체모(體貌)는 작지만 국량은 크다"라며 홍국영에 대해 평한 기록이 있다. 체모는 '체격'과 동일한 뜻으로 따라서 홍국영의 체격이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홍국영을 대단히 싫어해서 《한중록》에도 홍국영에 대해 실컷 욕했고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 혜경궁 홍씨뿐만 아니라 홍인한 역시 "우리 가문에서 저런 망령된 물건(妄物)이 나올 줄이야. 저 놈이 우리 가문을 망칠 놈이다"라고 한탄했으며 형 홍봉한에게도 홍국영을 두고 "이 미친 놈(狂兒)에게 어찌 벼슬을 주어 등용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이 내용을 적은 편지가 홍국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고 한 것뿐만 아니라 세손 시절의 정조를 살해하려 한 전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할 경우 그 측근인 홍국영에 의해 제일 먼저 죽을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국영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그의 형인 홍봉한도 같은 해에 귀양갔지만 정조의 외조부였기 때문인지 사사되지는 않고 풀려났다.
남의 눈치를 읽는 데 능했다. 1773년 영조가 이경양과 이상암의 발언을 의심하며 추궁하자 옆의 영의정 김상복이 열심히 말리는데 홍국영은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영조는 어차피 홍국영이 뭐라 하든 두 사람의 죄를 추궁할 생각이었고 영의정 김상복은 관직을 삭탈당했다. 1769년 홍국영이 정조를 만나기 전 별감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조가 궁궐에서 튀어나가 관 기생집에 놀러간 사건이었다. 이를 안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크게 꾸짖었는데 정조는 이를 마음에 오래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이 혜경궁 홍씨에게 정조가 당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있다.
심낙수의 기록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시정잡배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거나 장기를 두었으며 시조와 창을 잘했다고 한다. 당시 한양에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또한 가자'라는 창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을 정도였다. 학문보다는 잡기에 능하고 술을 좋아하며 성격이 방종하여 집안 어른들과 주변 사대부들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한국사의 이런 저런 가십거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정조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을 보여 주었다 하여 게이 드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단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부터 말하길 "주상이 홍국영을 가까이 하는 모양새가 꼭 사내가 계집을 가까이 하는 모양새같다", "간사한 첩에 미혹된 것과 같았다"라고 홍국영에 대해서 '매우 잘생기고 언변이 뛰어나서 미모로 내 아들을 홀렸다'라는 식으로 묘사하며 정조와 홍국영이 각별한 사이임을 언급했다. 홍국영의 정조 사랑은 사직서에서도 나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은 "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은 남자의 몸이니 전하를 위하여 뒷날의 도모를 할 수 없으나 신의 누이가 이미 입궁하였으니 다행히 자손이 번창하면 우리 삼전의 기쁨을 돕고 우리 성명(聖明)의 근심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신의 복이 적어서 신의 누이가 또한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라고 쓴 대목이다. 한마디로 '자기가 정조의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남자의 몸이라 그게 불가능하니 여동생을 대신 보냈다'는 소리다. 그러나 진지하게 임하자면 홍국영 역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 일성록에 스쳐지나가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전근대시대였던 만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인 사람이 자신의 성 지향성을 숨기고서 이성과 가정을 꾸리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홍국영을 대상으로 한 게이 드립은 거의 농담에 가깝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의외로 일리가 있는 드립일 수도 있다. 확실히 홍국영은 순전히 권력욕 때문에 상술한 행보를 보였다기엔 정조에게 이상하리만치 집착했고 아무리 여동생 원빈 홍씨건이 겹쳤다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권력이 거의 없었던 효의왕후도 비정상적으로 증오하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모함하려다가 실각했다는 점에서 이상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니라면 양성애자였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