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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조순(金祖淳)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6|조회수29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인, 소설가, 외척

순조비 순원왕후의 아버지로서 왕의 장인인 국구에 올랐으며, 그의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신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확대해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출생

1765년(영조 41년) 10월 7일, 신 안동 김씨 김이중(金履中)과 평산 신씨 신사적(申思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영의정에 오른 김창집으로, 노론 4대신 중 한 명이다. 부친 김이중은 김창집의 둘째 손자 김달행의 아들이다. 김창집의 아우로는 낙학파의 종장이자 시문의 대가였던 김창협을 비롯해 김창흡, 연행일기를 남긴 김창업, 훈고학과 강학으로 이름난 김창즙 등이 있었다. 이른바 ‘육창(六昌)’이라 불리는 이들의 후손들은 후대 낙학파의 산실인 석실서원을 이끌었던 재야의 김원행을 포함해, 정계의 최상위에 오른 문신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창집의 부친은 송시열의 정치적 동반자로 노론의 초대 영수였던 김수항이며, 김수항의 양조부는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로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이다.

한마디로 엄청난 명문가 출신이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집권 여당의 핵심 가문 출신에, 직계 조상 중에는 여러 명의 국무총리급 인물과 김구에 비견될 만한 독립운동가, 그리고 대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정도. 또한 정조와는 사돈 관계이기 이전에 외가를 통해 6촌 형제 관계였다.

2.2. 국구가 되다

1785년(정조 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과 규장각 대교를 지냈고 이후 이조참의, 이조판서, 선혜청제조 등을 역임하며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개인적인 능력 또한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서인 노론 시파 계열 인물로서 서인과 남인 양측 모두에서 신망이 높았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글씨와 죽화에도 능하였다.

말년에 정조의 건강이 악화되자 왕세자 책봉과 함께 왕세자빈 간택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감으로 직접 추천하며, 그 결정을 함부로 번복하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는 김조순이 정조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김조순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과정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정조가 삼간택을 앞두고 승하하면서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가운데 마지막 절차인 삼간택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를 빌미로 벽파는 김조순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유지를 뒤집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결국 무산되었다.

결국 김조순의 딸이 간택되어 순조비가 되었고, 이에 따라 김조순은 국구가 되어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동시에 김조순의 아내 청송 심씨, 즉 심건지(沈健之)의 딸도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에 봉해졌다. 이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치적 역량이 미숙했던 순조를 보좌할 후견인으로 김조순을 염두에 둔 조치로 보이는데, 정작 정조 자신이 과거 풍산 홍씨 홍국영의 세도정치로 큰 골머리를 앓았던 점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다.

2.3. 권력 장악과 세도정치

김조순은 사위 순조가 즉위할 당시, 영조의 계비이자 왕실의 큰어른인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에는 낮은 처신으로 벽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한때 장용영의 대장에 오르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용영 자체가 폐쇄되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사망한 뒤 벽파가 몰락하자, 김조순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전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선점한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이었음에도, 판서급 이상의 벼슬에 오른 적은 없었다. 김조순은 순조의 친정 이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가장 먼저 신유박해를 저지른 노론 벽파를 치죄하는 조치를 취했다. 심환지, 김종수 등은 정조의 유지를 거스른 역적으로 단정되어 관직과 작위를 박탈당했고,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도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김조순이 직접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고, 측근들이 대신 수행한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세도정치에 대한 서술을 생각하면, 세도정치의 전반 30년을 담당한 김조순이 명신에 가까운 평가를 받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때문에 “김조순 이후로 진짜 막장 세도정치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신 안동 김씨는 척화파의 상징 김상헌, 영의정 형제 김수흥과 김수항, 김수항의 아들이자 역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김창협과 김창흡 등 쟁쟁한 후손들로 인해 조선 후반기 최고 명문가였다. 김조순 개인이 어떤 인물이었든 신 안동 김씨 일문이 세도가가 되는 것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조순이 섭정이 된 이후 신 안동 김씨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세도정치로서 조선 후반기의 막장 상황을 초래했다는 사실 또한 명확하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효시인 김조순은 개인이 착하든 나쁘든 간에 후대의 막장 정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비록 김조순이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과 노론 벽파를 정리했다고 하지만, 실제 공격 대상은 소론 시파인 이시수였다. 벽파의 주축이자 정순왕후 김씨의 가문인 경주 김씨 김달순과 김관주 등은 김조순의 일족(신 안동 김씨)이자 노론 시파인 김이영과 김희순 등이 팔자흉언을 이용해 역적의 낙인을 찍고 숙청한 것이다. 한마디로 김조순은 반대파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친다)’의 방식으로 제거한 셈이다. 정작 이들의 빈자리는 신 안동 김씨와 노론 시파가 차지했으며, 정약용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김조순이 제수받거나 역임한 관직을 보면, 부제학(副提學), 행호군(行護軍), 병조판서, 이조판서,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훈련대장, 호위대장, 장용영 사령관 등 모두 핵심 요직이었다. 부제학은 언론 삼사 중 하나인 홍문관의 실질적 수장이며, 행호군은 궁궐 수비를 책임지며, 병판은 군 최고사령관, 이조판서는 총괄인사권자, 훈련대장과 호위대장, 장용영 사령관 모두 실질적 중앙군 사령관 직위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직책 중 하나가 비변사 주교사 당상이다. 주교사 당상은 한강의 배다리(주교) 설치를 관장하며, 배다리 설치를 위해 당시 한성부 근교의 모든 배를 징발할 권한을 지녔고, 배 이동과 한강 수운을 감독했다. 명목상 업무는 배다리 건설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업 활동과 한성 근교 대상인 관리·감독을 통해 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자리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는 대동법으로 거둬들인 대동미의 출납을 담당하는 부서로 전정, 공납, 군포 중 하나를 통째로 관리할 수 있는 중요한 재정 부서였다. 호조 못지않은 실권이 있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김조순은 겉으로 튀어보이는 정승직을 맡지 않고도 알짜 요직을 챙겨 정치·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정치 기구는 의정부가 아니라 비변사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며, 김조순이 생전에 유지했던 비변사 제조 직위의 의미가 크다. 제조는 명목상 도제조 다음가는 비변사의 2인자 자리였지만, 실제로 최고위직인 도제조는 전현직 삼정승이 겸직하는 구조였다. 전직 도제조는 실권이 거의 없고, 현직 도제조도 직위를 떠나면 권한이 사라졌다. 따라서 명목상 2인자이긴 하지만 상시직인 제조가 실권 면에서는 더 강력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김조순 이후 세도 정권들은 비변사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김조순이 어떤 벼슬에 입문하고 어떤 활약을 했다’는 식의 표면적 기록은 큰 의미가 없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평가(졸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명목상 높은 벼슬을 맡지 않았음에도 비변사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며 막후에서 정국을 운영했다. 김조순이 사망한 후 그의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아내 청양부부인 심씨과 합장되어 조성되었으며, 신도비는 초기에 세워지지 않았으나 나중에 철종이 지어줬다. 그리고 정조 묘정에 배향되면서 배향공신되었다.

3. 평가

김조순은 안동 김씨 김상헌의 후손이라는 명문가문의 후광과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순조와의 국혼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여, 1817년(순조17) 12월 반남 박씨 박종경의 사망 이후 세도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였다. 김조순은 남공철·이상황·심상규 등 최측근 인사들에게 조정의 요직을 맡기고 실무행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으나, 주요 시국 현안에 대해서는 전면에 나서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민생의 실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현실감각과 개혁에 대한 필요성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근원적이고 실질적인 민생안정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김조순은 건강악화로 국정에 소극적인 편이던 순조를 대신하여, 왕의 장인으로서 왕권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였다. 반면 왕의 과도한 신임과 이에 따른 권력집중으로 정치기강의 문란, 관료사회의 부패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봉건왕조체제의 누적된 모순이 시대의 변화에 의해 증폭된 것으로, 특정 권력자 개개인보다는 지배체제 자체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왕비(明敬王妃)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

1832년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나 당시의 역사서에선 후한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상기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젊어서 과거 급제를 했고 외모나 능력도 출중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재간택을 받기 직전이 조금 순탄치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 국구가 된 시점부터 사위이자 왕인 순조뿐 아니라 조정과 재야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졸기는 기록한다. 한편으론 외적인 존경뿐 아니라 실제로 국가 중대사를 총찰해 모두 주물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권신 중의 권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격이 지나치게 좋다면서 인간관계가 얕고 넓었다는 기록은 그에게 줄을 대는 자가 많았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인품은 적을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외척으로서의 선을 지켰을 수도 있고 애초에 성격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실록에도 언행에 조심하고 순상(循常)했으며 본인 공을 자주 내세우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종합적으로 정중동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평인데 같은 기사에서 순조는 스승과 같은 장인이라고 평했다. 즉, 왕실이나 조정에서도 신뢰가 높은 인물이었던 모양. 조정에서도 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어려운 민생 현안을 임금에게 알리는 것에 힘 썼다고 한다.

당장 오늘날 전공자들의 언급을 참고해도 '그의 혈족과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 정도의 언급만 나오고 본인이 간신이라는 묘사는 없다. 다만 본인이 의도했던 아니던 이후 본인 집안이 세도정치의 길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론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김조순을 옹호하는 측에선 본인 잘못은 아니며, 후손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다 보니 엄한 김조순까지 같이 욕을 먹은 측면도 있다고 말하고, 반대쪽에선 그것도 김조순이 방관한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

일단 김조순 본인은 언행에 조심스럽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했던 것은 맞다. 요직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말년에는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는 당연직이었던 영돈녕부사(정1품)와 제조직 외에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물론 비변사 제조 자체가 정권 운영의 핵심 요직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본인의 관직만이 아니라 정조의 건릉을 옮기는 것을 추진(김조순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몇 안 되는 사례)하여 성공시켰을 때, 왕이 이를 치하하는 의미로 땅, 노비, 내구마를 하사하고 김조순의 일가 친척들을 등용시켰는데 이것도 사양했다.

개인적인 품성 면에서도 부정축재 등으로 지탄을 받은 기록이 없다. 사실 김조순 정도 인물이면 해쳐먹어도 무서워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권력자의 부정 축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에 남기 마련이다. 당장 김조순의 딸이자 2번이나 수렴청정을 하며 위세를 떨친 순원왕후가 부정축재 한 사례들도 잘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조순은 진짜 부정축재를 했다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 제대로 된 시장과 화폐 경제의 부재로 선물 문화가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대가성만 추가되면 뇌물이 되는) 조선시대에 거물급 고관이면서도 재물 관련 시비 기록이 거의 없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즉, 최소한 그 시대 기준으로는 흠 잡힐 만큼 부정축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반남 박씨 박종경과 세도 정치를 했다는 비판을 받은 사실이 있어 이미 당대에도 권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진 듯하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냥 이름 높은 세도가들은 닥치고 거론된 감도 있는 게 민란들이라 당장에 박종경은 뭘 제대로 한 게 없다. 덧붙이자면 세도 정치기의 각종 문제는 정조 시기에도 그 단초가 예고됐다(대표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환곡 폐해와 탐학의 발생). 세도 정치의 기반 또한 규장각, 주교사 등 정조가 설치한 각종 기관들에서 나왔다. 소수 가문들에 의한 과거의 독점 또한 18세기 후반(영조 말)부터 이미 널리 확산된 경향이었으며 서울 양반과 지방 양반의 분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대외 교역이나 농경지의 확대 등도 정체 혹은 침체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쇠퇴를 단순히 세도정치나 김조순 개인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쇠퇴 경향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당시의 집권층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요약하자면 '명신'과 '간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한 인물이란 것이다. 개인사적으로는 뛰어난 능력, 인품을 갖추고 청렴했으며 국구의 자리를 악용하지 않으면서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정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세도정치가 득세, 결국 안동 김씨라는 혈연적 측면과 비변사를 통한 소수 인물들의 정권 독식이라는 정국 운영 방식 2가지 측면에서 세도정치를 낳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린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정조 사후 생기를 잃고 회색으로 점차 빛을 잃어가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인물. 어찌보면 당나라 현종 시기 권모술수의 달인이자 간신으로 이름 높던 이임보보다도 더 무서운 허허실실형 정권 장악력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딸 순원왕후를 순조한테 정비로 시집 보낸 것만 봐도 처세술 하난 대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4. 가족 관계

증조부 : 김제겸(金濟謙) - 김창집(金昌集)의 장남

조부 : 증 의정부좌찬성 김달행(金達行)

조모 : 한산 이씨(韓山 李氏)

부 : 서흥부사 김이중(金履中)

모 : 광주목사 신사적(申思迪)의 딸

아내 :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陽府夫人 靑松沈氏)

장남 : 예조판서 문정공(文貞公) 김유근(金逌根)

양손자 : 이조판서 효문공(孝文公) 김병주(金炳㴤)

차남 : 이조참판 김원근(金元根)

친손자 : 형조판서 효정공(孝貞公) 김병지(金炳地)

장녀 : 순원왕후(純元王后)

3남 : 영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좌근(金左根)

양손자 : 이조판서 문헌공(文獻公) 김병기(金炳冀)

차녀 :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외손자 : 이조판서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

외손자 : 이조판서 문정공(文靖公) 남병길(南秉吉)

3녀 :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외손자 : 형조판서 이승순(李承純)

4녀 :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5. 기타

평소 소설을 좋아하였으며, 본인이 직접 《오대검협전》이라는 일종의 고전 무협 소설 프로토타입격 작품을 쓴 적도 있던 소설가이기도 했다. 오대검협전의 집필 시점은 불확실한데 김조순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 게 아니라 김려라는 문인이 본인 및 주위 문인들의 글을 모은 유고인 담정총서(藫庭叢書)에 수록된 김조순의 고향옥소사(古香屋小史) 중에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광이었던 탓에 실제로 젊은 시절인 1787년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 후배 이상황(李相璜)과 연애소설 《평산냉연》을 나눠보다 하필이면 정조에게 걸렸고, 정조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을 기가 막히게 잘 써서 정조가 극찬을 내렸다. 남들은 반성문을 쓰라 하면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만 써댄 것에 반해 김조순은 잘못한 것은 확실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고.

김조순은 평소 몸가짐이 단정했고 항상 정중하게 남을 대했는데 어느 야사에는 김조순의 정적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술 취한 이를 들여보내 행패를 부리라 사주했는데 그는 다 죽어가는 환자여서 매를 치면 죽는 몸이었다. 이에 김조순은 오히려 그를 거둬 잘 먹여 돌려보냈고 따로 사람을 시켜 뒤를 쫓아보니 과연 누군가 김조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고 한다.

김조순은 "옥호정(玉壺亭)"이라는 이름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한양 도성 내에서도 명승지로 손꼽히는 곳에 지은 고급 저택이었다. 1815년 경에 지어졌는데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등 풍광이 아름다워서 김조순 자신도 이 곳을 좋아했는지 말년을 이 곳에 지내면서 시를 쓰기도 했으며, 사망할 당시에도 옥호정에서 머물렀다. 그 전경을 묘사한 그림도 남아있다. 링크 세도가로서 막후에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김조순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옥호정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했는데 현대에 이르러 건물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에 청와대와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어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옛터를 표시한 비석과 그림 속 별장 뒷편의 북악산 동쪽 산중턱의 일관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은 말년에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천주교에 꽤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김조순과 김유근이 실권을 잡은 시기엔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한동안 누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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