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후기의 권신이자 세도정치의 마지막 집권자로 안동 김씨가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중추였던 김조순의 3남이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다.
신 안동 김씨의 수장으로서 헌종, 철종 시기 세도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아호는 하옥(荷屋). 그래서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하옥 대감(荷屋大監)'이라고 하면 이 사람을 일컫는다.
2. 생애
1825년 순조가 김조순의 회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음서의 혜택을 보아 6품직에 제수되었다. 다만 음서제에 혜택을 보았던 다른 이들이 그랬듯이 음서에 혜택을 본 걸 부끄러이 여겨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과거를 준비했다.
그렇게 조용히 공부를 하다가 헌종 4년인 1838년에 급제했는데 그때 김좌근의 나이가 42세였다. 요즘 기준으로는 물론이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늦은 셈. 물론 출발이 늦었다는 거고 그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벼슬길을 시작한 지 4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부교리, 규장각 직각, 이조참의, 이조참판 등등 요직등을 두루 거친 끝에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공조판서와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와 예조판서와 호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이 무렵은 김좌근의 누나인 순원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였는데 순원왕후는 오빠인 김유근이나 6촌 김홍근 등을 대표로 하는 친정 형제들의 자문에 의지하여 수렴청정을 펼쳤고 김좌근 역시 순원왕후의 자문역을 맡아서 중용된 것이다. 그러다가 형 김유근은 헌종 재위 중에 중풍에 걸려 2년 후 죽을 때까지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고 김유근 대신 6촌형인 김홍근이 뒤를 이어 실세로 자리잡나 싶더니 김유근이 1840년에 죽고 김홍근도 2년 뒤인 1842년에 죽게 되면서 그 뒤를 이어 (신) 안동 김씨 세력의 리더가 되었다. 젊은 시절이야 어쨌든 꽤 운이 좋은 남자. 아버지 김조순이 전면에서는 겸손하게 처신했으면서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국을 움직였다면 형 김유근도 그랬지만 김좌근 역시 전면에 나서서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헌종이 장성하면서 외척들인 (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세력이 아닌 사람들을 5군영 대장에서 배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직의 인사에도 (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세력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김흥근을 탄핵하는 신하에게 힘을 실어주며 (신) 안동 김씨에게 쫓겨난 이들을 재등용하는 등 (신) 안동 김씨를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김좌근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도 (신) 안동 김씨에서 나오게 되면서 김좌근은 가문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영의정을 3회나 역임하여 권력을 독식했다. 이어서 조정의 요직까지 (신) 안동 김씨 일문들이 거의 독식하게 되면서 조선의 정치판은 완전히 막장이 되고 만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로, 김좌근의 집은 눈도장을 찍으려고 벼슬 청탁을 꾀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매관매직까지 공공연히 행해지고는 했다. 그의 세도기에는 국가 경제와 민생이 파탄나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많이 일어났고 조선은 국가 멸망으로 가는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다. 하지만 김좌근은 민생에는 그리 관심이 없고 권력의 유지에만 집착했으며 삼정의 문란을 개정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총재관이 되기도 했으나 사실 삼정의 문란 최대 수혜자가 바로 자신의 가문이었던만큼 김좌근이나 그 세력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야사에 의하면 김좌근에게는 나주 기생 출신의 첩인 양씨가 있었다. 김좌근이 이 첩을 총애했던 나머지 당시 벼슬을 원한 사람들은 김좌근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양씨에게 청탁하기도 했고 양씨의 마음에 들면 그녀가 김좌근에게 잘 말해줘서 벼슬을 할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나주 출신 정승'이라는 의미의 '나합(羅閤)'이었다. 당시 세도가나 정승들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성이나 사는 곳을 나타내는 글자 뒤에 합하라는 경칭의 합(閤) 자를 붙여 부르기도 했다. 나합은 배짱도 대단했는지 김좌근이 나합에게 "세상 사람들이 왜 그대를 나합이라 부르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나합은 "나주 조개(蛤, 조개 합)라는 뜻이지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야사 중에는 훗날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괘씸죄로 양씨에게 "감히 기생 출신인 주제에 정승이나 쓰는 나합 호칭을 사용해?"라고 꾸짖자 저 대답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0세가 다 되어서 다음 세대인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 등이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슬슬 떠오르는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그와 안동 김씨의 절대 권력은 뺏었지만 명예는 빼앗지 않았는데 심지어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안석과 궤장을 하사받기도 했다. 말년에 명예직만 맡으면서 권세는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조정 원로로 대접은 다 받은 셈. 신정왕후 조씨의 명으로 고종을 모시러 온 신하이기도 했으니 권력에서는 물리더라도 명예는 챙겨줘야 했을 것이다.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철종실록》의 총재관을 맡았고 말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영삼군부사, 영돈녕부사를 맡았으며 영돈녕부사인 상태에서 죽었다. 뒷세대인 김병학, 김병기, 김병국도 조정의 요직을 맡아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뒷받침했고 흥선대원군 역시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했으며 김좌근이 죽자 그 묘비명을 직접 써 주기도 했다. 결국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나라를 제대로 망치고 누릴 것은 다 누리고 간 간신이라 하겠다. 정말 평생에 걸쳐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장이나 묘비명 등에서는 "공명정대했다", "도량이 넓었다" 등의 찬평을 받고 있고 《고종실록》의 김좌근 졸기에 실린 고종의 교지에서는 '바른 몸가짐과 공평한 지조를 갖추었다'고 평했는데 이런 거야 원래 립서비스로 해 주는 표현이고 실제로는 김좌근의 행위가 조선에 결과적으로 악영향만 끼쳤다. 특히 이런 립서비스들과는 달리 정작 누나인 순원왕후는 김좌근에 대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흠이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에 있었으며 김좌근의 묘에도 사연이 있는데 이천에 김좌근 고택이라는 유적이 있다. 이 고택 뒷산이 바로 (신) 안동 김씨 일문의 선산으로 양자인 김병기도 죽은 뒤 김좌근의 묘 근처에 묻혔었다. 그런데 2006년 후손에 의해 개장되어 수목장으로 처리됨에 따라 묘역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묘에 세워져 있던 묘비나 석물만이 김좌근 고택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2009년에 김좌근 고택과 그 주변 땅들 및 김좌근 · 김병기 부자의 묘비, 장명등, 망주석을 후손 김은희(김좌근의 6대손)와 (신) 안동 김씨 문중이 서울대학교에 기증했고 서울대학교에 의해 (신) 안동 김씨 일문의 묘역 복원을 마쳐서 김좌근 묘는 김좌근 고택 뒷산에 있다. 그래서 오늘날 김좌근 고택은 서울대학교가 관리하고 있고 김좌근 묘역에서 발견된 석물들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후원에 세워져 있다. 한편 이 김좌근 고택이 위치한 곳은 백사면 청백리로393길 100-131. 물론 김좌근 때문에 청백리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지만, 청백리로라는 이름을 남긴 진짜 청백리들은 잊혀진 반면, 김좌근의 집은 지역 명물이 되어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3. 여담
조선왕조실록(철종실록)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다. 그 내용은 신정왕후 조씨가 운현궁의 이명복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김좌근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야사나 사극 등에서는 주로 상갓집 개 시절의 대원군에게 굴욕을 주다가 대원군이 집권하자 데꿀멍하고 복수를 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김좌근이 교자를 타고 가다가 흥선군이 술값을 달라고 구걸을 하자 엽전을 땅바닥에 던져주고 제 갈 길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흥선군 뿐만 아니라 김좌근 주변에 있던 종자들까지 그 엽전을 주우려고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흥선군이 김좌근을 찾아갔을 때 이러한 일화가 있다. 김좌근이 애첩인 나합 양씨와 함께 있었는데, 본래 그녀가 기생 출신인지라 당시 양반들이 아무리 청탁을 하더라도 나합에게는 절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흥선군은 스스럼없이 나합에게 큰절을 하며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존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합도 흥선군을 좋게 보았고 김좌근도 조카인 김병국, 김문근에게 흥선군을 후히 대하도록 했고 이들도 시키는 대로 했는데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만이 흥선군을 경솔한 사람으로 보고 흥선군을 예의를 갖추어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합 양씨의 경우 극도의 사치스러운 행적을 묘사한 야사들이 몇 개 존재한다. 강의 물고기들에게 적선을 한다며 쌀밥을 몇 가마니나 해서 강에 뿌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고향으로 전해진 나주에서는 나합 양씨에 대한 평가가 썩 나쁘지는 않다. 야사에 따르면 나주에 기근이 들자 양씨가 김좌근에게 요청해서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그 때문인지 나주에는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는 사실 먼 친척 김영근의 아들로 김좌근이 후사를 잇기 위해 김병기를 양자로 두었다.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는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849년 철종 즉위 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853년 총융사, 훈련대장,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62년(철종 13)에는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그 뒤 의정부좌찬성으로 있을 때 1863년 12월 철종이 사망하자 대왕대비 조씨와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갈등하였으며,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