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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민겸호(閔謙鎬)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6|조회수19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이자 간신(奸臣). 민씨 세도가의 일원으로 전형적인 권신에 탐관오리, 매국노, 민치구의 셋째 아들로 대한제국 내부대신 민영환과 중추원 민영찬 형제의 친아버지이다.

명성황후와 자신의 가문인 여흥 민씨만을 믿고 온갖 비리와 탐욕을 부렸으며 조선판 군납비리를 자행하다 임오군란의 시발점이 되어 결국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시작된 임오군란 이후 조선 왕조가 파국으로 치닫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2. 생애

1838년 판돈령부사 민치구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 명성황후의 시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와는 남매 사이로 누님 관계이며 흥선대원군과는 매형 사이이다. 고종과는 외삼촌과 외조카 사이로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의 외삼촌으로 승격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면에서는 명성황후를 지지하였으며 정치적,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1874년 흥선대원군이 축출되면서 명성황후의 후방 지원과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성부 좌윤을 지냈고 홍문관 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며 지충추지사, 금위대장, 지삼군부사, 무위도통사, 무위소제조,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880년 말에는 군무사 경리당상이 되었고 1881년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초빙하여 교관으로 임명하여 별기군을 창설하는 데 기여하였다.

군란이 일어난 1882년 선혜청 당상을 지냈는데 이때 별기군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비중을 둔 나머지 성격이 오만해져서 구식 군대에 속하는 무위영과 장어영을 단순히 무시하는 태도를 넘어서 구식 군대 군인들의 봉급까지 횡령하였다. 이 당시 구식 군인들은 무려 13개월 동안이나 제대로 된 봉급을 받지 못했고 그 후에 나온 1달치 봉급은 썩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으니 당시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구식 군대 군인들은 항의를 하지만 민겸호의 부하들이 이들을 모욕했고 그 역시도 사태 수습에 나서기는커녕 심지어 군인들을 붙잡아 매질하며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결국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는데 민겸호는 성난 군인들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켰고 자신도 도피를 시도하였다. 한편 구식 군대 군인들은 흥인군을 때려죽인 뒤 비어있던 민겸호의 집을 점령하였고 그의 집 창고의 많은 재물들을 모두 태웠다. 구식 군대 군인들이 친민씨 척신들을 참살하게 되는 가운데 그는 지나친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자 수염을 가린 채 내시로 변장해 도주하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아 구식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난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구식 군대를 홀대하고 명성황후를 지지하였다는 이유로 전임 선혜청 당상이었던 지중추부사 김보현과 함께 창덕궁 중희당에서 향년 44세에 참살당했다.

살해당하기 직전 흥선대원군을 본 민겸호는 "대원위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애걸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이까."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때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붙들려 계단으로 내동댕이 쳐진 다음 계단 아래에서 총칼로 난자당해 사망했고 시체는 이들에게 난도질 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김보현의 시체와 함께 구식 군대의 발길질로 걷어차이게 되어서 개천에 버려졌는데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 일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살이 물에 불려서 하얗고 흐느적거렸는데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이후 시신은 수습되었고 1882년 8월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뒤 1883년 6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 평가

국가를 지키는 군인들의 봉급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데에서 이미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우며 비교 대상 간신으로 지목된 유자광, 임사홍, 윤원형보다 더 악랄하다. 게다가 군납비리는 고대부터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민겸호는 원균, 김자점과 함께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에 해를 입힌 간신을 넘어서는 매국노라고 봐야 한다.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개천에 방치되었다는 부분에서 당시부터 이미 평가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수도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근왕주의가 강하고 지방과는 달리 세도 정치에 저항으로 인해 발생한 민란도 거의 없었다. 이런 친정부 성향을 가진 수도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마저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 편에 서도록 만들 정도였으니 이미 악질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런데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다. 추증된 1883년이 바로 임오군란이 진압된 직후였기 때문에 피난에서 돌아온 명성황후가 가족 띄워주기를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왕조가 오백년 가까이 유지해온 문민통제를 완전히 끝장낸 인물이기도 한데 조선은 고려 왕조에서 벌어진 무신들의 역성혁명 및 무신정권의 등장을 막기 위해 강력한 문민통제를 실행했는데 무과 제도를 신설하고 무신들의 발언권도 허용하고 무신들의 품계도 높여준 반면에 군부내에 충성파 장교들을 심는 등 무신정권이 탄생할 여지를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문민통제가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어서 인조 시절에 일어난 이괄의 난은 그 동안 이어진 문민통제의 유지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기점이었는데 조선 왕조는 이괄의 난을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충성파 장교들의 활약으로 자력진압에 성공하여 문민통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세도정치 시절에조차도 문민통제가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탄생을 막으려는 조선 역대 왕들의 노력이 그리고 충성파 장교들의 활약이 단 한 명의 탐관오리 민겸호가 저지른 군납비리로 인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부에서는 임오군란도 이괄의 난처럼 진압되었기에 문제 없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임오군란은 조선 스스로 자력으로 진압한 게 아니라 청나라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했기에 이괄의 난과는 상황이 다르다. 청나라는 자신들에게 도움을 받은 대가로 군인 출신 원세개를 감국대신으로 임명하고 청군을 주둔해서 조선에 내정간섭을 했기에 사실상 원세개에 의해서 무신정권이 재림한 거나 다름없기에 조선의 문민통제는 임오군란을 유발한 민겸호로 인해 종말을 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에도 일본군이 주둔하는 등 문민통제는 없어졌고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4. 기타

아들인 민영환 역시 탐관오리로 이름이 났으나 후에 애국지사로서 자유민권운동과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을사늑약을 막으려다 실패한 뒤 자결하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구 화교들이 들어왔기에 한반도에서 화교들의 역사를 시작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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