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 군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이 형색에 나타나니 참으로 나라의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이라.
니콜라이 2세의 평가
대한제국의 관료. 고종 묘정의 배향공신. 시호 충정(忠正)을 따서 충정공(忠正公) 또는 민충정공(閔忠正公)으로도 많이 불린다.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남동생 민겸호의 장남이자 민겸호의 형 민태호의 양자이다. 병조판서 경력이 있었기에 대한제국 성립 후 육군부장의 지위에 올랐으나 본래는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문신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결한 인물이다.
2. 가계
민영환의 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흥 민씨 척족으로서 몇몇 자료들에 그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틀린 게 많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오류는 그의 양아버지 민태호(閔泰鎬)가 순명효황후와 민영익의 생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명성황후의 친조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명효황후와 민영익의 생부 역시 이름이 민태호(閔台鎬)로 한글 표기가 같고, 또 예전에는 친척 간의 양자 입적이 흔해서 가계(家系) 따지다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단 구한말 민씨 척족의 핵심 일원들은 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자손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민유중을 기준으로 삼고 간단하게 표를 만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민유중의 장남인 민진후(閔鎭厚) 쪽 후손 :
... 민치록 ― 민승호 (입적) ― 민영익 (입적)
... 민치록 ― 명성황후 ― 순종
・민유중의 차남인 민진원(閔鎭遠) 쪽 후손 :
... 민치오 ― 민태호(閔台鎬)
... 민치삼 ― 민태호(閔台鎬) (입적) ― 민영익 , 순명효황후
・민유중의 삼남인 민진영(閔鎭永) 쪽 후손 :
... 민치구 ― 여흥부대부인 ― 고종
... 민치구 ― 민태호(閔泰鎬) ― 민영환 (입적)
... 민치구 ― 민승호
... 민치구 ― 민겸호 ― 민영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민영환의 양아버지 민태호(閔泰鎬)는 민유중의 3남 민진영의 5대손이고, 순명효황후의 생부 민태호(閔台鎬)는 민진원의 5대손이다. 즉, 서로 다른 사람이다. 촌수를 따져보면, 민유중은 '호(鎬)'자 항렬에게 6대조 할아버지이므로 저 두 민태호는 서로 12촌 형제지간이다.
그럼 명성황후와 민영환의 관계를 보자. 민유중은 '영(泳)'자 항렬에게는 7대조(代祖)이기에 민진후의 후손인 명성황후와 민진영의 후손 민영환은 13촌이다. 친척이라곤 해도 남남 수준의 먼 친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조카 뻘이지 친조카가 아니다.
그런데 족보 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실제 혈통 상 명성황후와 민영환은 21촌이다. 정확히는 명성황후의 10대조이자 민영환의 11대조 민사용이 마지막 공통 조상이며, 민사용의 장남 민여건의 9대손이 명성황후, 5남 민여임의 10대손이 민영환이다. 그러나 민영환의 증조할아버지 민단현이 15촌 숙부인 민백술의 양자로 가면서 민유중(민여건의 증손자)의 후손이 된 것.
그리고 당대 예법 상으로는 피붙이라고는 해도 친척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 자식은 친부모 집안과는 가계가 끊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오빠, 동생, 조카라는 말도 편의상 그렇게 부른 것일 뿐, 친형제가 아닌 경우 대부분은 사실 오빠 뻘, 동생 뻘이라는 것 역시 염두에 둬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가계도가 개판이 된다. 거기다 앞서 든 민태호 문제와 적절히 섞으면 다음의 결과가 나온다.
1.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여흥부대부인은 형제자매이다.
2. 민영익, 순명효황후는 '민태호'의 자식이다. 민영익은 민승호의 자식이기도 하다.
3. 민영환은 '민태호'의 자식이다. 민겸호의 자식이기도 하다.
4.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친정오라버니이고, 그 아들인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이다.
5. 따라서 '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여흥부대부인은 명성황후의 형제자매이고, 또한 민영익, 순명효황후,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이다.
6. 그런데, 여흥부대부인은 고종을 낳고, 명성황후는 그 며느리가 되고 순종을 낳고, 순명효황후는 그 며느리가 되고 순종의 아내가 된다.
7. 그러므로 민영익, 순명효황후, 민영환, 고종, 순종은 모두 4촌지간이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민영환과 명성황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 한 곳만 링크를 제시해도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본다. '국가 보훈처 공식 블로그'이다.
명성황후와 민영환의 관계를 간단하고 옳게 설명하면
1. 고종의 어머니가 여흥부대부인, 여흥부대부인의 남동생이 민겸호, 민겸호의 아들이 민영환.
2. 고종과 민영환은 사촌지간(내외종간)
3. 명성황후는 고종의 왕비, 그러므로 민영환과의 관계는 사촌형수와 남편의 사촌 서방님이 된다.
3. 생애
1861년 민씨 척족(戚族)의 중심 인물이자 탐관오리였던 민겸호(閔謙鎬)와 달성 서씨 부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閔泰鎬)에게 입양되었으며 민겸호 집안의 뒤는 둘째 아들인 민영찬(閔泳瓚)이 이었다.
1878년(고종 15),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9위로 급제하고, 관료가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씨 일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쾌속 승진을 거듭해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친다.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고 1882년에는 구군영(舊軍營)(구식 군대)을 기존의 5군영에서 2군영으로 축소하고 개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식 군대 소속 군인들에게 쌀로 지급하는 급료를 13개월 체불한 끝에 1882년 6월 9일 일부 군인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내주었다. 그나마 지급한 급료도 겨와 모래를 섞었고 양도 절반 정도밖에 안 되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격분하여 난동을 벌였다. 이에 민겸호는 주동자를 색출하여 체포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하려 했는데 이는 오히려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난동은 한성을 휩쓸은 반란인 임오군란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민겸호는 1882년 6월 10일 반란군에게 살해당했으며 이때 민영환 역시 구식 군대의 처단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살아남았으며 이후 사직서를 낸다.
1884년 이조참의로 복직했고, 도승지, 전환국 총판,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내무 협판, 개성유수, 해방 총관, 친군연해 방어사, 한성 우윤, 기기국 총판 등을 역임했다. 1887년 상리국 총판, 친군전영사, 호조판서가 되었고 1888년과 1890년 병조판서를 2차례 역임했다. 1893년 형조판서, 한성 부윤이 되었고, 1894년 독판 내무부사,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각종 직책들을 보면 갑신정변 이후 민영익이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 그가 가지고 있던 직함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민겸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단 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당시 민중들에게 미움받던 여흥 민씨 척족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인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봉준의 체포 후 진술 기록을 보면 고영근, 민영준과 함께 민영환을 탐관오리의 대표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민영환은 과거 급제 이후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중앙의 경직(京職)만 맡아 봤기 때문에 실제로 민중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인 고부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 짓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매관매직 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정황이 있다는 말도 있으나 그보다는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외척(外戚) 세력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컸고 민영환이 민씨 일가 세도 정치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지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 친아버지 민겸호가 군납비리를 저지른 악랄한 인물이었기에 어떻게보면 아버지의 악명으로 인해서 민영환이 피해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왕조 사회에서는 왕이나 왕후를 지목해 비판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기에 '군주를 측근에서 잘 보필하지 못하고 미혹케 하는 간신'이라는 식으로 에둘러서 관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받아야 할 비난을 대신 덮어썼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로는 일본과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려 근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활동하는 대표적인 친러파였다. 1886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맺을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으나 같은 여흥 민씨 출신인 민영익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도승지, 이조참판 같은 요직에 있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을미사변 직전에는 주미 전권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민영환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신뢰하지 않았고 '가까운 나라인 일본과 친하게 지내면 이들의 침략을 막기 어려우니 멀리 있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이이제이, 원교근공(遠交近攻) : 삼십육계 중 제23계. 먼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
민영환은 온건 친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갑오개혁으로 친일파 관료 세력이 대두한 이후에도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파 대신 및 일진회 회원들과 대립했다.
1894년 12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 1896년 5월 거행된 대관식의 축하 사절단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대관식에 참석했다. 물론 대관식 축하는 명목에 불과했고,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며 불안해하고 있던 고종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사절단 일행에는 윤치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조정의 밀명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동행했던 윤치호를 소외시켰던 점도 있고 외국인 앞에서도 당당하고 자유분방했던 윤치호를 민영환이 은근히 부러워했던 점도 있어 한동안 윤치호와는 서로 껄끄러워하는 관계였으나 여행을 마무리할 무렵에는 서로 그다지 나쁘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민영환은 외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전형적인 조선 명문가의 양반이었던 데다가 맡은 임무의 막중함에 큰 부담을 느꼈던 그는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가게 되었다. 이때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개통 이전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185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부분 개통하였고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전 구간 개통은 1916년의 일이다. 철도 개통 이후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일본의 우려도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의 이유 중 하나이다.
이 때문에 사절단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해 캐나다 밴쿠버로부터 미국으로 입국 후 대륙을 철도로 가로질러 뉴욕에서 다시 기선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가서 다시 독일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 대관식에 참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반년에 가까운 여행을 해야만 했다. 대관식에 참석했으나 정작 일행은 우즈벤스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는데, 유교 예법에 따라 갓을 벗지 못하겠다고 고집했기 때문. 조선 사절 외에도 청나라, 오스만 제국 및 페르시아의 사절 또한 모자를 벗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민영환은 호딘카의 비극 소식을 듣고는 안타까워하는 기록을 여행기에 남겼다. 이후 러시아 재무상 세르게이 비테를 만나기도 했다.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는 약 2개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르며 외교전 2라운드와 함께 문물을 두루 구경하고, 왔던 길 그대로는 당시 유행하전 전염병을 우려해 가지 않고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 이주 지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1바퀴 돈 셈이 되어 버렸다. 총 걸린 시간은 6개월 20일이었고, 당시의 기록을 정리한 여행기 ≪해천추범(海天秋帆)≫은 조선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기가 되었다. 이전에도 청나라와 일본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의 러시아 여행을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러시아로 향하는 길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제국 등 당시의 서구 열강을 전부 순회 방문하였으며 이들의 발전된 문물 제도를 직접 체험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귀국 후에는 의정부 찬정을 지내던 도중 광무개혁과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군대의 근대화를 강력하게 주장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군령권이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만들었다.
1897년 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의 특명 전권 공사로 발령을 받았다. 유럽에 체류하면서 특명 전권 공사의 자격으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1897년)의 즉위 60주년 기념식(다이아몬드 희년)에도 참석한 바 있는데 이때의 기록을 ≪사구속초(使歐續草)≫로 남겼다. 이후에도 탁지부대신, 표훈원(表勳院) 총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민영환은 당시로서는 해외 경험이 풍부한 사람었으므로 개화 정책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킬 것을 지속적으로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전제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소는 거부되고 군사 개혁안만 받아들여졌다.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상 기초적인 제도 기반도 없이 표면적인 모방만을 추구했던 군사 개혁은 지나치게 무리한 시도였다.
이후 독립협회를 후원하여 '독립ㆍ자강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민권의 신장과 의회의 설치 등 정치 개혁 여론을 선도하려 했다.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혁파를 옹호하고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고종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로부터 "독립당을 옹호하여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는 바람에 의회 제도의 도입은 좌절되었다.
그 뒤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 탁지부 대신을 거쳐 민영환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 총장, 표훈원 총재, 헌병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육군 부장(지금의 중장급)에 올랐으며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수여받았다.
조병세가 의정대신을 맡았으나 사직을 했으므로 사실상 국무총리 서리나 다름없었으니 실질적인 국무총리 위치로 보아도 무방하다. 러일전쟁을 전후해 참정대신, 내부대신, 학부대신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일본을 비난하며 친일 내각과 대립했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대신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결국 한직인 시종 무관장으로 좌천당하였으며 순국할 때까지 시종 무관으로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 의정대신(議政大臣 : 영의정에 해당)인 조병세를 대표로 조약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규합해 이를 철회하고 을사오적 등의 을사늑약 찬성파 신하를 처벌하라는 공동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대에 의해 조병세가 체포되고 입궐이 거부되는 소동이 있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자신이 대표가 되어 상소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의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평리원(平理院 : 법원)에서 왕명 거역죄로 견책까지 당하게 된다. 그는 이에 분노했다.
그리고 1905년 11월 29일 오후 민영환은 귀가해 마지막으로 아내와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중추원 의관(醫官) 이완식(李完植)의 집으로 가 유서 3통을 남기고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한다. 처음에는 작은 칼로 복부를 찔렀으나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다시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망일은 1905년 11월 30일로 향년 44세.
그가 남긴 유서는 전부 3통으로 백성들에게 보낸 것이 가장 유명하고 대한제국에 주재하는 외국 외교 사절들에게 보낸 것과 고종에게 올린 것이 따로 있어서 내용이 서로 달랐다.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한문의 부호(느낌표, 마침표 등)는 원문에는 없는 것들로 읽기 용이하도록 임의로 붙인 것이다.
백성들에게 남긴 유서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行將殄滅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倍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結心戮力,復我自由獨立,則死者當喜笑於冥〻之中矣。鳴呼,勿少失望!
訣告我
大韓帝國二千萬同胞。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머지않아 생존 경쟁 중에 모두 다 멸망해버리겠구나.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살아날 것인데,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각국 공사들에게 남긴 유서
泳煥為國不善,國勢民計乃至於此,徒以一死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死者已矣,今我二千萬人民,行當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貴公使豈不諒日本之行為耶?貴公使閣下,幸以天下公議為重,歸報貴政府及人民,以助我人民之自由獨立,則死者當喜笑感賀於冥〻之中矣。嗚呼!閣下幸勿輕視我大韓,誤解我人民之血心!
영환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서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생계가 이에 이르렀으니, 그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합니다. 죽은 자는 그 뿐이라지만, 이제 우리 이천만 인민이 머지않아 생존경쟁 중에 모두 다 멸망해버리게 생겼는데, 귀 공사들은 일본의 행위를 어찌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귀 공사 각하들이 만일 천하 공의(公議)의 무거움을 알고, 돌아가 귀 정부와 인민에게 보고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준다면, 죽은 자라 하여도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며 감사하리다. 아, 각하들은 우리 대한을 가벼이 보지 마시고, 우리 인민의 피같은 진심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백범 김구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조문하였으며,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를 비롯해 학부 주사 이상철, 의정부 찬정 홍만식 등 여러 사람이 의분에 찬 그의 자결에 동참하여 연이어 자결하였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 역시 종로 거리에서 "민영환이 죽은 오늘은 전 국민이 멸망한 날"이라고 연설하고는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 투쟁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오늘 아침 6시쯤 무관 민영환 대감이 자결했다. 죽기를 결심했다면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좋았을 텐데. 민영환 대감의 조용한 용기에 경의를 표하라. 그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라. 그의 영웅적인 죽음에 경의를 표하라. 그의 죽음은 그의 삶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오후에 수많은 청년들이 종로에서 군중들에게 애국적인 연설을 하거나, 하려고 시도했다. 일본 헌병과 군인들이 그들을 해산시켰다. 실랑이가 뒤따르면서 일본 헌병과 경찰이 그들을 겨냥한 돌에 부상당했다. 일본인은 100명 이상을 체포했다.
『윤치호 일기』 1905년 11월 30일 자 기사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민영환의 장례에 각종 장례 물품과 담당 인사들을 파견해서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민영환의 죽음을 위로하는 조령(詔令)을 내렸다. 사망 직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이 추서되었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3일 후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고쳤다.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의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 후 17년 뒤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마성초등학교, 구성중학교, 구성고등학교 사이에 있으며 묘역에는 민영환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던 이승만의 친필 묘비가 남아 있다.
4. 평가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우국지사로서의 평가와,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민씨 척족 출신에 매관매직, 부정부패에 연루되기도 한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다.
부정적인 반박하는 견해는 젊은 시절에 여흥 민씨 척족 중 1명이었던 것은 맞지만, 민씨 세도(勢道) 기간 중 그가 직접 저지른 과오라 할 만한 점을 지적하기가 어렵고, 전봉준 등 동학 세력이 민영환을 매관매직을 일삼은 부정부패의 우두머리로 지목한 것 또한 그가 민씨 척족의 대표로서 알려져 있었기에 지목된 것에 가깝다고 본다. 게다가 민영환이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표현하여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이 그를 경멸했다는 내용도 있다. 또 조정 내외에서 민영환은 청렴한 관료로 유명하였다. 같이 지목된 민씨 척족 민영준은 당시 수구 세력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었던 반면 민영환이 보여준 행보는 그와는 거리가 먼 개화파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당시의 인식과 현대에 와서 밝혀진 사실이 다른 아주 좋은 사례이다. 애초에 민씨 일족은 부정부패가 심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면 온건 개화파이지 최익현 류의 개화 반대파가 아니다. 이들이 수구파로 알려진 것은 급진 개화파가 자신들과의 개화의 속도 차이로 상대를 수구당으로 싸잡아 분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민씨 일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개판이 된 것도 당시의 사회 · 문화적 환경에도 어느 정도는 원인이 있다. 전근대적인 인식에서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중앙 정치의 책임인데 임금에게 책임을 직접 물을 수는 없기 때문에 임금 주위의 정치 세력에게 책임을 돌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멸망의 책임을 전적으로 고종이나 민씨 세력에만 묻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마음 편하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당연히 있다. 그러므로 동시대에 쓰여진 역사 자료라 할지라도 철저한 사료 비판을 거친 현재의 연구 성과를 통해 살피는 것이 객관적 이해를 위한 길이다.
물론 당시 고종이나 흥선대원군은 대놓고 매관매직으로 자금을 마련했고 민씨건 종친이건 조씨건 벼슬 좀 하는 이들 중 수탈을 일삼던 관리가 차고 넘쳤던 것도 사실이니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평가로 바뀌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비록 젊은 시절에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외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국제 정세를 깨달아 개화파가 된 점, 고종에게 여러 가지 정치 개혁안과 근대화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던 점, 친일 단체로 변질되기 전인 초기의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를 후원하고 민권 신장에 찬동하였던 점 등은 그의 공적이라고 본다. 젊었을 때의 과오와 나이가 든 다음의 공적을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는 지체 높으신 집안 출신 젊은이로 방약무인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정신을 차려 개화파 우국지사다운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세계 유람 전과 후의 민영환이 보여준 행보는 매우 다르다. 조지훈의 <지조론>에서도 초년보다 후반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민영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경술국치 때 자결한 황현은 평소에 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매서워서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 : 매천필하무완인)'라는 평을 들었는데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는 민영환과 이용익 등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도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만으로는 이를 사실로 입증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민영환을 평가할 때에는 이러한 사료 부족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젊은 시절보다는 나이든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춰 판단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런 황현의 <매천야록>도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슬퍼한 대신 조병세, 병졸 김봉학, 이름없는 인력거꾼이 뒤따라 자결하였다는 얘기를 실어 놓았으며, 뒤이어 민영환의 장례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백성들이 민영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음을 밝히고 있다.
二十一日,葬閔泳煥于龍仁。上親下階遙送,以示敬禮,各國公領事等,皆來弔奠,撫棺悲慟。上自搢紳下及坊曲皂隷・婦嬬・乞丐・各寺僧徒,塡街哭送,聲震原野。自典洞至江上,疊圍如排陣。送葬之盛,近古未有也。郷兵韓某,見閔泳徽於葬所曰:君亦護喪來乎?君不姓閔乎?何閔死,何閔不死?君亡國至今日,而不一死贖罪,乃隨忠正公靈柩而至,天日獨不畏乎?可速去。否者,死吾靴尖。泳徽,嘿然而出。聞者快之。
21일, 민영환을 용인에 예장하였다. 이때 황제가 친히 뜨락까지 내려와 멀리 떠남을 전송하며 경의를 표하였고, 또 각국 공사 및 영사들도 모두 와서 조문을 하며 관을 어루만지고 애통해하였다. 위로는 높은 벼슬하는 사람부터 밑으로는 동네동네의 머슴, 부녀자, 걸인, 각 절의 승려들까지 거리가 빽빽하게 모여 곡하며 전송하였으므로 그 소리가 산야를 뒤덮었다. 이때 전동(典洞)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인파가 첩첩으로 쌓여 진을 친 듯하였다. 상여(喪轝)를 전송할 때 이렇게 인파가 많은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이었다. 이때 향병(郷兵) 한(韓) 아무개라는 사람이 장지에서 민영휘를 보고 “당신도 호상(護喪)을 하러 왔습니까? 당신의 성도 민씨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죽지 않습니까? 당신이 나라가 망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한 번 죽어 속죄를 하지 않고 충정공(忠正公)의 영구를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하늘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내 군화에 차여 죽을 테니까!”라고 하자 민영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 곳을 떠났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친일인명사전 또한 이러한 관점에 기반하여 생애 초기에는 항일 행보를 보였으나 이후 친일파로 전락한 장지연이나 민영기 등의 인사들은 등재한 데 비해 이와 반대로 일제에게 작위도 받는 등 생애 초기에는 식민 통치에 협력하거나 창씨개명까지 하였으나 이후 항일 운동에 투신하여 독립에 힘쓴 김가진, 이봉창, 민태곤 등의 인사들은 등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독립운동가로 대우받는다. 아울러 민영환은 당시 중앙 정계의 실세 가운데 국가를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한 인물이라는 점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영환의 애국 충정을 기억하고 후에 그의 50주기 추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기리며 평가하였다.
추념사 원문
고(故) 민충정공 50주기 추념식 추념사 1955년 11월 30일
세계 역사상에 나라마다 한번 성했다가 쇠하는 것은 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는데 나라가 성할 때에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만들다가 쇠해갈 적에는 욕스러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 동서양 각국을 물론하고 국가 수명의 장단은 차이가 있으나 나라가 성할 때에는 지도자와 민중이 잘해서 되는 것이고 쇠할 적에는 정부와 민중이 다 잘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4천년 역사에 제일 못되게 쇠폐한 역사는 우리나라 이조 말년에 된 것이니 이때에는 우리나라의 관민이 어떻게 못되게 했던지 우리 4천년 역사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이웃 나라에 뺏기고 40년 동안을 우리나라 사람이 노예가 되는 참상을 당했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이 잘못한 죄로 인연해서 우리가 당할 수 없는 참상을 당했던 것인데, 지금 우리는 우리 민국이 다시 일어나서 또 빛나는 역사를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민중이 다 새 민중이 되어서 전에는 나라가 어찌 되던지 나만 살면 고만이라고 하던 백성들이 다 각각 내 목숨을 바쳐서 우리나라를 영광스럽게 해야 된다는 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일심합력해서 해나가는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나라가 쇠망할 적에는 정부 당국과 민간 전체가 아무리 부패한 중에서라도 충신과 의사(義士)가 나서 욕스러운 역사에 한 빛난 점이 되게 만드는 것이니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고려 말년에 전국이 다 망한 때에 정몽주 충신이 목숨을 바쳐서 그 역사의 끝을 빛나게 했고 이조 말년에는 민충정공(閔忠正公)이 있어서 욕스러운 역사에 빛난 점을 끼쳐 놓았던 것이다. 그때 4천년 역사에 제일 욕스러운 기록 중에 제일 빛난 기사를 두어서 천추에 자랑할 만한 기록이 있게한 것은 우리나라의 민충정공인 것이다.
민충정공은 원래 고목쇄신(喬木世臣)으로 국운을 맡고 국가 개양 시대에 유신 방면으로 부국강병의 계획을 가지고 많이 노력하였으나, 임군이 어둡고 국운이 불행해서 유신 방면으로 개혁 경쟁에 모든 방침이 점점 실패되고 정권이 날로 쇠패해가는 자리에 당해서 유신당(維新黨)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필경은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한 나무로 바로잡지 못해서 종사(宗社)가 없어지고 고국 강산이 남의 손에 빠지게 될 적에 이분이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자수(自手)로 목숨을 버려서 절의를 세웠음에 이분이 우리나라 정신을 혼자서 표명한 것이다.
망국 시대에 당해서 나라를 구하는데 목숨을 내놓고 싸운 사람이 어찌 민충정공 한 분이리요마는 제 때에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공헌해서 우리나라의 혼을 경성(警醒)하고 깨우치게 한 것은 이 한 분의 공적이며 우리가 모두 살아서 끝까지 싸운 사람들은 고초와 희생을 이 분보다 더 했을지라도 충성의 직책을 다 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목숨을 다한 자가 충의를 행한 것으로 알게 되나니 민충정공은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그 혁혁한 이름이 높은 자리를 점령하고 또 이 분의 충성을 다한 결과를 우리 한국 정신이 더욱 굳건하며 강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민충정공의 대의를 행한 50주년 기념에 대해서 우리 모든 민중은 그 충의를 치하하여 언제든지 나라가 위태할 때 우리도 이 분의 뒤를 따르고 우리 자손까지라도 다 이 정신을 지켜서 민충정공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들어나서 우리 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고 영광을 길게 누리기를 바라는 바이다.
5. 기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와 중구에 있는 도로인 충정로는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忠正)'에서 따왔다. 충정로역도 충정로에서 따온 것. 민영환 묘역이 있는 용인시 구성 읍내의 도로도 도로명 주소 개편 직후에 '충정로'로 명명했으나, 서울 충정로와 혼동의 소지가 있어 도로명을 '구성로'로 변경했다.
충정로가 충정로로 명명되기 이전에는 갑신정변 당시 일본공사를 지내 한일합방에 기여한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따 다케조에초(죽첨정)이라고 불렸다. 또 일본인들이 많이 거류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충정로로의 개명은 충무로와 같은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전처 민경숙의 7촌 숙부이다. 즉, 윤보선의 처7촌숙부이다.
민영환의 자결 1년 후인 1906년 그의 자택 안 자결했던 방의 마룻바닥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실내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이를 그의 피가 대나무가 된 '혈죽(血竹)'이라고 일컬었다. 일제는 조작의 증거를 찾으려다 증거가 나오지 않고 민중의 반일 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뽑아버렸으나 뿌리가 없었으며 그의 부인이 뽑힌 혈죽을 수습해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혈죽은 대나무 종류 중 이대에 해당하며 놀라운 것은 대나무 잎의 개수가 45개로 순국 당시 민영환의 나이와 일치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SBS 백만불 미스터리, KBS 2TV 스펀지 209회에서도 소개되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48화 방송분에도 등장했다.
현재 보관되고 있는 혈죽. 민영환의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는 고려대 박물관에서 보관 중.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은 현재 종로구 공평동 하나투어빌딩(옛 한미빌딩 / 한미은행 본점)이 있는 자리다. 공교롭게도 한국사 고위 지도층 중 최초 세계 일주를 한 이라 의미심장하다. 바로 옆의 태화빌딩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4년 후에 있었던 3.1 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다.
이 문서의 유서 내용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용도서 뉴라이트 논란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새비지 A. 랜도어가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보면 랜도어가 민영환과 친교를 다진 부분, 그리고 랜도어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나온다. 묘사에 의하면 '민 장군'으로 호칭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확히는 당시에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군부대신(갑오경장 이전 병조판서)이었다. 외국 문물에 관심을 가지는 호방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지만,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조선의 구 관료 모습 그대로인 부분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일례로 민영환은 서양화의 원근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왜 옆모습이 안 나오는 거요?"라고 투덜대는 부분도 있는데, 랜도어는 결국 민영환의 측면 초상화를 따로 그려주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영환은 새벽닭이 우는 꼭두새벽부터 관복을 갖춰 입고 찾아왔다고 한다.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한다. 이때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자마자 민영환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아칸소 주 상원의원 휴 A. 딘스모어를 찾아가는데 아마도 그는 과거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재직했을 때에 민영환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딘스모어 의원은 이승만에게 당시 미 국무장관이자 중국에 관한 문호 개방 정책론자로 유명한 존 헤이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고, 국무성에서 그와 30분간 면담을 하며 호의적인 답변을 끌어냈으나, 헤이 국무장관은 얼마 뒤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딘스모어를 통해 외교문서 우편으로 주조선 미 공사에게 발송해 전달하였다. 또한 이 보고서에서 이승만은 주미 조선 공사관 직원들과 장시간에 걸친 면담을 한 후, 신태무 대신에 김윤정 참사관을 공사로 임명할 것을 민영환에게 건의하였고 얼마 후 신 공사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905년 8월 10일, 민영환은 결과를 떠나 애국심을 가지고 노력해 준 이승만과 윤병구를 치하하며 삼백 달러의 돈을 보내주었다.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훗날에 대립하게 되는 친일파 송병준이 김옥균을 만난 죄로 투옥되었을 때, 석방을 주선해 준 흑역사가 있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에서 을사늑약 때 이런 논평을 내면서 송병준을 욕했다. "병준아, 네가 민충정(閔忠正)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어 충정공이 턱끝으로 가리키면 네가 그대로 하며, 손끝으로 부르면 네가 ‘예 예’ 하던 놈이 아닌가."
자결 당시 배에 칼을 꽂았으나 바로 죽지 못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몇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도움을 받아 목에 상처를 내고 죽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시대에는 왕에게 끝까지 간언하여 사약을 받는 정치적 자결이 주였고, 그 외의 자결도 대부분 목을 매거나 독약을 마시는 형태였고 이런 식의 할복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사람이 죽는지 정확한 방법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할복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내세우니 아무리 자살해도 할복은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였을 터이다. 그만큼 을사늑약과 망국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것으로 보이고, 할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턱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복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스로 배를 가른 후에는 뒤에 카이샤쿠가 큰 고통없이 죽으라고 참수시켜주는데, 민영환은 카이샤쿠가 없었기 때문에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블라디미르 레닌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민영환은 대관식에 참석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러 시설을 방문했는데, 이 중엔 당시 레닌이 수감된 감옥도 있었다. 물론 당시 레닌은 젊은 일개 정치범에 불과했고 민영환은 엄연히 외국의 공식 사절이란 고위직이었기 때문에 직접 레닌을 보았다고 해도 별다른 감상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