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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방원(李芳遠)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38 목록 댓글 0

1. 개요

成吾志者必汝也 (성오지자필여야)。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총서 70번째 기사 中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1367년 6월 13일,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 사이에서 6남 2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여 신진사대부와 함께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활약하였다.

1398년 막내 동생 이방석이 세자 책봉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둘째 형 이방과를 정종으로 즉위시켰다. 이후 넷째 형 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며 이방원은 정종의 양위 후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즉위 이후로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유교 중심의 국가 시스템 확립을 목표로 하였다. 불교 탄압 정책을 실행했으며, 대마도 정벌로 외환을 제거하는 한편 명에 대한 사대로 실리주의적인 외교를 펼쳤다. 이후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외척 세력을 척결한 후 상왕으로 물러나 말년을 보내다 병사하였다.

태종이 만든 정책들과 환경은 이후 세종 시기에 꽃을 피우며 조선을 크게 번영시켜 조선사에선 손에 꼽히는 명군으로 평가받지만, 즉위 전 일으킨 여러 도덕적 과오로 인해 도의적인 부분에선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사를 통틀어 봐도 극적인 일생, 그리고 태종 본인의 뛰어난 업적과 한국사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 불리는 세종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는 점 덕분에, 드라마나 영화 같은 여러 대중매체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왕이기도 하다.

2. 묘호와 시호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 이름과 지위를 세상 높이 드높이는 일)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령(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子孫)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計策)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 《용비어천가》 10권, 제109장 中

묘호 : 태종(太宗)

시호 :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태종이란 묘호 자체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 영예의 묘호이다. 사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가 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절대적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성종(聖宗)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의 별호는 '성조(聖祖)'였었다.

3. 이름과 작위

조선의 왕들 중에서 외자로 개명하지 않고 원래 이름을 계속 쓴 둘 뿐인 국왕이다. 다른 한 명의 왕은 태종 본인의 증손자인 단종이며, 이름은 이홍위이다. 출생시 왕족이 아니어서, 즉 개국 전에 태어나 피휘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지 않은 자가 개국 후 왕이 되면 피휘 문제 때문에 개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芳)과 멀 원(遠)자를 휘로 계속해서 사용했다.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모친 안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두 글자 이름도 실질적인 피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 규칙을 따라 개명과 피휘를 모두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사의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인데, 그가 죽은 뒤 낱글자 피휘 금지가 후손에 의해 뒤집히면서 책 한 권에 100번은 나올, 방원보다 더 흔해빠진 한자들인 세(世)와 민(民)이 따로 쓰이는 경우까지 모두 피휘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이 두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거나 아예 뜻이나 모양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대체되는 바람에 복잡한 한자로 된 문서들이 당나라 때 잔뜩 생겨났다. 이런 사례를 의식해서인지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개명했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曔)으로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정작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전부 외자로 지어놓고도 본인만은 원래 이름을 고집한 이방원이 정말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는 아버지 이성계처럼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수결(手決, 서명)도 이름자인 '방원'을 갈겨 쓴 것이다.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이 있긴 했었겠으나, 피휘는 왕의 권위에 훨씬 더 중요한 예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와 양민들 불편하지 말라고 피휘 관리를 과감히 포기한 걸 보면 시원한 인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권위에 자신감이 넘쳐 후대가 감히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과시적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이전 왕조들에 비해 강력한 군주권으로 유명했던 명나라 황제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역시 흔한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들어간 두 글자 이름을 여러 세대에 걸쳐 잘만 썼고, 이에 따른 낱글자 피휘 금지도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비교적 흔하지 않은 부수를 사용한 외자로 지음으로써 본인의 사례를 관행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방원이 독보적인 사례가 되었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태조 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어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이 되었다. 이에 《정종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1401년(태종 원년)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이 된 사람들은 정종을 제외한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태종의 아들들인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관례를 마친 후인 1412년(태종 12년)에 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14년(태종 14년) 태종은 여덟살의 아들을 성녕대군으로 봉하며 왕의 아들로서 왕비 소생은 대군(大君), 후궁 소생은 군(君)으로 호칭을 완전히 법제 확정하였다. 따라서 이방원과 이방과는 '정안군 / 정안공', '영안군'이었지 '정안대군', '영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와 이방간은 1401년(태종 원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 이방과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태조의 왕자들은 조선 시대의 야사집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 일을 말할 일이 생기면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을 대군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나머지 왕자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이미 왕이 된 정종과 태종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딱히 없었다. 이는 이미 더욱 높은 자리인 왕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아무개 임금이라고 하지 아무개 왕자라고 하지 않는 데다가, 어쩌다 왕자 시절의 호칭을 언급하더라도 대군 호칭 사용 이전의 과거 발언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중 인물의 대사로 나오면 고증 오류.

4. 직접 쓴 글과 시

명나라 영락 황제에게 바치는 시

자줏빛 봉황 편지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먼 지방의 기쁜 기분 노래로 감응하네

오랫동안 숨어 있던 용과 범은 소리로 응대하고

죽지 않은 고래들은 기세 오히려 씩씩하네

만 리 강산에 정통성이 돌아왔고

백 년 인생이 맑은 조정을 보네

노안에 황제의 명령으로 새로운 변화 보게 되니

백발에 너그럽지 않음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열성어제

 

마니산 제단

외진 지역 인적 드문 곳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밤낮 재계한다

국화꽃은 우물물을 내려다보고

흰 이슬은 섬돌 이끼에 스며든다

장수 기원함이 얼마나 절실한가

샛별 응당 자연히 배열하리라

봄가을 제사 기일 어기지 않아

임금의 덕 또한 생각나는구나

열성어제

 

마니산 제단

왕명 받들고 이 재궁에 다다르니

눈에 가득한 가을 산 비단에 붉은 수놓았다

소나무 창가 꿇어앉아 하는 일 하나 없는데

휘영청 달빛 성 동쪽에 빠져있구나

열성어제

 

1390년(공양왕2)에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쓴 시 두 편이다.

 

회안대군 방간에게 내려준 글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백형 부자가 순천으로 옮기던 날에 말을 달려서 피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경진년(1400년, 정종 2년)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형을 보전하려고 하는 마음이 날로 두터웠습니다. 근래에 김여생과 중 묘봉 등이 망령되게 "백형이 난을 꾸몄다."라고 일컬었으므로 이미 조사하여 밝혀서 반좌율에 처하였고, 또 일전에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군대를 일으키자 백관들이 대궐에 나아와 백형을 제주로 내치자고 청하였는데, 내가 제주는 바다를 사이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형께서는 의혹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성어제

 

1402년 음력 12월 2일 형인 회안대군 방간에게 보낸 글이다. 이방간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태종 이방원과 마찰이 있었다. 글을 보면 태종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부터 이방간을 잘 보호하려고 했다고 한다.

 

5. 기타

아들인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국왕으로 손꼽힌다. 여말선초의 격정기에서 보인 비범한 활약과 왕위를 향한 쟁탈전, 아버지 태조와 스승이었던 정도전 및 정몽주와의 갈등에 이어 즉위 과정에서 형제와 전쟁을 벌이며 왕위에 올랐고, 즉위 이후로는 아들 양녕대군 및 정실인 원경왕후와의 갈등 등 무수한 투쟁 끝에 충녕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태종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한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매력적인 서사로 손꼽히며, 조선왕조실록 및 연려실기술의 구체적인 기록 덕분에 가장 많이 영상화된 군주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과거 시험에 급제한 왕이었기에 정치력 또한 압도적이었다. 특히 본인이 관직 생활을 직접 해 봤기 때문에 신하들의 생태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었고, 유학자답게 늘 명분을 가지고 움직였다. 또한 신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숙청이 필요할 땐 늘 그들의 입을 빌려 명분을 만들어냈다. 실록을 보면 난 말리려고 했으나 온 신하의 뜻이 이러하니 마지못해 따른다는 발언이 많다. 본인 능력이 너무나 뛰어났기에 경연도 굳이 안 했고, 신하들도 이에 대해 찍소리 못 했을 정도.

숙청의 달인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킬방원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외척에게 매우 잔혹했으나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겐 관대한 편이었다. 오히려 이숙번이 막나가려는 낌새를 보이자 공신임에도 가차없이 유배보내고 다신 찾지 않는 등 매우 현실적인 입장을 고지했다. 같은 공신인 하륜도 만만찮게 비리가 많았지만, 그는 나이가 많았던 데다 이방원 정권의 상징격 존재였기에 어지간한 일로 문제 삼진 않았다. 이숙번이 귀양 간 이유는 그가 젊었기에 아들 세종을 가지고 놀 요지가 있었기 때문. 이처럼 그의 숙청에는 언제나 확고한 명분과 철저한 현실주의적 시각이 존재했다.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 살아있는 메뚜기를 그대로 삼켰다. 깜짝 놀란 신하들이 혼비백산하며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태종 본인은 멀쩡했으며 이후 메뚜기떼는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당태종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는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둘 다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가 있다.

시종들이 쑥갓과 비슷한 식물을 먹고 돌아간 이후로 쑥갓을 싫어했었다.

코끼리를 처음으로 길들여본 조선 왕이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에서 바친 코끼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 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전서인 이우(李禹)가 코끼리를 보고 추하게 생겼다며 대놓고 놀려댄 데다가 침까지 뱉는 바람에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였다는 거다. 이에 놀란 태종은 처음에는 코끼리를 살처분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선물해 준 것이라 외교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결국 전라도 순천도호부 장도(獐島)로 코끼리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코끼리가 섬에 귀양간 뒤부터 미역과 풀 등의 모든 먹이를 거부하고 슬프게 울기만 하여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버려서 이를 불쌍하게 여긴 태종이 결국 1년 만에 귀양을 풀어주라고 했으나 먹이를 워낙 많이 먹어대는 터라 결국에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후 세종 집권기에서야 관찰사의 상소로 다시 섬 가운데의 목장 지역으로 가게 되고 이후에 실록 내에서 코끼리의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보면 코끼리는 조선 입장에서는 식량만 축내는 큰 애물단지였다.

고려가 원나라에 그랬듯이 조선 역시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들이고 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는 자들에게는 왕명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엄벌에 처하며 가산까지 전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자를 44명으로 압축했다가 5명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태종은 환궁한 후 대신들에게 대상자들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무슨 인물이냐?"라고 불평했다. 공녀 차출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혹시나 자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중종과는 정반대.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실록(實錄)'으로 만드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말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심지어 낙마한 것을 사관에게 비밀로 하라고 말한 그 사실까지 전부 기록했다. 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걸려 잡혔을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사관들을 몰살하거나 제도를 없애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당초 당시 사관들이 워낙 극성맞은 면이 컸을 뿐이다. 특히 민인생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로, 왕의 사적공간(사생활 공간)까지 침입한 정신나간 인물이라 당대 사관을 통틀어서도 매우 괴팍한 편에 속했다. 이 일로 태종의 미움을 산 민인생은 얼마 안 가 귀양을 가게 된다.

태종: (말에서 떨어지고) 이를 실록에 남기지 마라.

조선 사관: 태종대왕께서 낙마하시고, 실록에 이를 남기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말에서 떨어지고 사관에게 그걸 비밀로 한 게 실록에 기록된 사실을 어느 레딧 역사 게시판 이용자가 위와 같은 짤로 만들어 올린 덕에, 해외에서는 말에서 떨어진 왕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왕자의 난(1,2차)과 숙청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가 죽인 인물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 태종은 왕권 안정을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핵심인물만 핀포인트로 제거했으며 연좌제가 당연시되던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이나 주변 인물은 거의 건들지 않았다. 가령 정도전의 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연산군 대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정승이 되기도 했다. 또한 잠재적인 권신이 될 수 있는 외척 세력만 철저히 숙청했을 뿐 왕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는 충분한 명분이 있음에도 오히려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애당초 먼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측근이었던 세력이라든지 자신의 공신들은 권력에서 밀어냈을 뿐 어지간 해서는 죽이지 않았다. 친형 이방간은 물론이고 불온한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신하들도 내버려 두었다. 실제로 역모성 발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거이와 불충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숙번 역시도 목숨만은 살려뒀고 말년에는 여러 말실수들로 구설수의 오르내렸던 하륜은 아예 작정하고 보호하기도 했다.

태종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단, 부산에 있는 태종대는 조선 태종이 아니라 신라 태종 무열왕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여말선초 시대에 왕실의 많은 인물은 초상화가 남아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때 이미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았고 대신 외모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남아있는데 아버지인 태조의 용모와 서로 닮았다는 것과 태종 이방원 본인의 피셜 차남 효령대군이 자신의 외모와 닮은 꼴이라고 언급한 적이있다. 한편 효령대군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세종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태조실록>에서 태조가 명나라 사신을 보낼 때 아들 이방원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고 묻는 것을 보아서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졌다고 추정되나 태조 초상화를 보면 알다시피 무장 답게 체격이 크고 태조의 아들들도 무장 집안 출신 답게 체격이 컸기에 그에 비해서 태조가 볼 때는 호리호리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태조 이성계 내외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해 회암사의 승려들에게 으름장을 놓은 뒤 연비 의식을 행했으며, 재해가 극심했을 때 낙산사에 가서 기청법회를 열었다.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成俔)은 태종을 "문관(文官)으로 패업(覇業)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다만 크롬웰과는 사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다른데,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크롬웰과 달리 태종은 사냥이며 여색이며 놀고 싶은 건 칼같이 챙겨서 놀았다.

조선 왕 중 가장 자식이 많은 정력왕이다. 자녀를 많이 두어 왕실을 굳건히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조선 국왕들 가운데 독보적으로 여색을 매우 밝혔다.

태종의 왕자들 작호에는 모두 寧(녕)이 들어간다.

자신이 상왕이 되고 원경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거기다 세상을 떠나게 되는 1422년 그 해까지도, 이직의 딸과 이운로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는데, 두 여인 모두 남편을 잃었던 젊은 청상과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의 나라 조선의 왕인 태종이 여성의 재혼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그러나 태종이 곧 그 해 세상을 떠나면서 젊은 과부에서 상왕의 후궁된 두 여인들은 다시금 과부가 된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만큼이나 그 과정이 유명한 군주이기도 하다. 정작 즉위 이후로도 외척 숙청, 아들 양녕대군과의 갈등이 유명하며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비교적 인지도가 적은 편. 학계에서는 딱히 태종에게 의의를 부여할만한 업적이 있다고 평가하지는 않으나 대신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져 후대에 한국사상 유례 없는 성군을 남겼다는 점을 높게 치는 편이다.

6. 가족 관계

총 12남 17녀 (9명 조졸)

원경왕후

신빈 신씨

의빈 권씨

장녀 정순공주

차녀 경정공주

아들(조졸)

아들(조졸)

아들(조졸)

3녀 경안공주

장남 양녕대군

차남 효령대군

3남 충녕대군(세종)

4녀 정선공주

6남 성녕대군

왕자(조졸)

5남 함녕군

6녀 정신옹주

7남 온녕군

7녀 정정옹주

8녀 숙정옹주

9녀 숙녕옹주

11녀 소신옹주

13녀 소숙옹주

16녀 숙경옹주

왕자(조졸)

5녀 정혜옹주

정빈 고씨

9남 근녕군

숙의 최씨

10남 희령군

숙의 이씨

11남 후령군

선빈 안씨

소빈 노씨

8남 혜령군

12남 익녕군

12녀 경신옹주

14녀 숙안옹주

10녀 숙혜옹주

효빈 김씨

후궁 김씨

4남 경녕군

15녀 숙근옹주

알 수 없음

궁인 이씨

왕자 2명(조졸)

옹주 2명(조졸)

17녀 숙신옹주

(숙의에게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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