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의인물

박영효(朴泳孝)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6|조회수52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의 관리, 갑신정변의 주역, 개화파이자 조선의 마지막 부마.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망명했고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일례로 1894년 동학혁명 이후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종료를 경축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병사를 위로하고자 1895년 2월 5일(양력 3월 1일) 고종이 개최한 행사에서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선창할 만큼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으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김홍집의 명에 의해 역관 이응준이 사괘를 바탕으로 약식을 만들었고 박영효가 4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정식 사용했다.

당시 파견되었던 사절들은 아편전쟁 이후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의 국제법을 상기시킨다. 예컨대, 수신사, 조사시찰단, 영선사, 보빙사 등은 사실상 자주적이었던 국내 상황을 설명하기 보다는, 외부 세력인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외교적 간섭을 설명하기에 좀 더 부합하다. 특히 박영효가 파견된 4차 수신사는 더욱 그러한데, 왜냐하면 시기상으로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와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4차 수신사와 같은 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는 점은 강대국들 사이의 실리와 간섭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후 박영효는 한성순보를 창간하는 등, 한국인 최초로 근대 신문을 발행하여, 외국의 기사를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일까지 기재하며 국중에 알리는 역할을 두루 맡았다.

2. 생애

2.1. 초기

정안옹주의 10대손이며, 여말선초 대신 박은의 18대손이다. 즉, 박영효는 고종의 실제 혈통상 21촌 조카, 호적상 22촌 형제이다. 배우자인 영혜옹주 역시 22촌 형제다.

1861년 경기도 수원의 진사 출신 가문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무량(無量)이다. 12세 때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과 후궁 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에 봉해졌으나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사망하면서 홀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영혜옹주 하가 당시 영혜옹주를 모시러 따라온 궁녀들을 하사해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영혜옹주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이들은 서자가 되어야 하지만 영혜옹주 소생 자녀가 하나도 없는지라 이들은 국가공인으로 적자로 인정받았다. 박영효의 차남 박일서(1897~1931)의 장녀가 이우의 부인 박찬주다.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개화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갑신정변을 일으킨 핵심 세력들은 부마인 박영효를 제외하고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자들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1882년 4차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4년 11월 박영효는 내부대신이 되었다. 얼마 후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하고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돼 오자 박영효가 직접 심문했다.

2.2. 개화파의 선두 주자

조선보다 앞서 대외 개방, 근대화를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 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 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정변 실패로 찬밥 취급을 당해 1885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 하지 못해 다시 일본으로 온다. 주동자 중 1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나라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은 10살 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일본에 망명하면서 수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과는 사이가 나빠져서 "김옥균에게 갑신정변에 뭐 한 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며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 김옥균과는 달리 나머지 동지들은 일본의 찬밥 취급에 박영효는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1885년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 환경에 적응을 못하였고 서재필, 서광범을 제외하고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영어를 제대로 못하는 상태에서 갔으니 고생이 심했던 듯 하다. 그나마 찬밥 취급이었던 일본이 나았던 것. 1888년 도쿄에 위치한 메이지학원 영어과를 졸업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이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면서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 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 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 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에 일본으로 2차 망명을 가는데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 조종 혐의까지 받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명성황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일로 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이후 조직된 독립협회의 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이나 심지어 고종을 폐위시키고 군주제를 폐지한 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헛소문까지 나왔을 정도.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 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때문에 일본 정부에게서 고종이 퇴위당한 뒤 순종의 즉위 시기에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박제순이나 일본 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으로 귀국한 것처럼 행세했다.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 미수한 혐의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때도 다시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를 경상남도 마산에서 맞이한다.

2.3. 국권침탈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8년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인촌 김성수 등과 함께 경성방직 창립에 기여해 1935년까지 초대 사장을 지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1920년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 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3년 경희궁 내 전각인 황학정을 철거해 등과정 터로 옮기는데 앞장섰으며 1925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33년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33년 조선방송협회 초대 부총재도 맡았다.(총재는 없었다.)

일본은 박영효를 우호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완용 때문에 잠시 '탈선'했던 그를 관대하게 대했다. 일본은 그의 위상을 이완용보다 높게 설정했다. 1910년 한국 강점 뒤에 이완용에게는 백작 작위를 줬다가 1920년에 후작으로 높인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처음부터 후작 작위를 부여했다.

또 1911년에 이완용에게는 은사공채 15만 원어치를 준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28만 원어치를 줬다. 이들은 은행에 예금되는 이 돈의 이자를 받아 곳간에 채웠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평안도와 경기도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이 1910년에 받은 월급은 50원이다. 이완용에게는 이 월급의 3000배, 박영효에게는 5600배가 하사금으로 주어졌다.

일본이 볼 때 한국 강점 이전에는 이완용이 더 필요했어도, 그 후에는 박영효가 더 필요했다. 대한제국을 값싸게 넘겨받는 데는 매국노 이완용의 역할이 절실했지만, 일단 넘겨받은 뒤에는 한반도 민심을 억누르는 게 급선무였다. 왕실 일원인 박영효가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전하는 것이 일본에 더 유용했다.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에게 은사공채 83만 원을 준 데에도 그런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작위와 은사공채로 박영효를 이완용보다 위에 놓은 일본은 두 사람의 강점을 활용해 식민지 한국을 지배해 나갔다.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의 <이완용 평전>은 "박영효는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약했지만, 고종의 폐위를 반대했던 전력으로 인해 조선인에게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라면서 "이완용은 을사조약 이후 매국의 상징으로 송병준과 나란히 비교될 정도로 세간의 혹평을 받고 있었지만, 정치 기반이 탄탄했고 전직 고위 관료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라고 비교한다.

박영효는 조선귀족회장이 되고, 이완용은 중추원 부의장이 됐다.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의장직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겸했기 때문에, 중추원 부의장은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다.

일제는 이 둘을 앞세워 한국인 특권층의 지지를 끌어내려 했다. <이완용 평전>은 "조선귀족원 의장 박영효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을 구심으로 조선 귀족을 포함한 조선인 상층의 결집이 다시 시작"됐다고 서술한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임기 중이던 그해 9월 21일 향년 78세에 노환으로 죽었으며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부산 다대포에 명당이 있다고 추천받아 그곳에 처음 운구하여 매장하였으나 이후 자손이 사업실패로 묘소를 팔고 경기도 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

3. 여담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의 부통령으로 거론되었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조직된 적이 없다는 연구가 축적되어 학계에서도 공인됐지만 인터넷에는 잘못된 정보가 떠돌아다니는 형편이다. 다만 파리 강화 회의의 독립청원서에는 황실의 친인척 박영효를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고 적혀 있다. 박영효는 갑오개혁 즈음부터 악질적인 친일파로 전향했기 때문에 거짓으로 신한청년당에서 대외적으로 유명한 박영효의 경력을 이용한 참칭이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애국 단체 등에서 생애 후반의 친일 행적 등을 지적하며 비판을 받아왔다. 결국 친일 행위가 드러나면서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인 명단,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박영효의 가옥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박영효의 친일 행각 등을 거론하며 친일파 가옥 철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때 태극기 최초 개발자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태극기를 공식 석상에서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태극기의 최초 개발자는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태극기를 개발했던 이응준이다.

갑신정변 직전에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 장학생들 중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진사가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로 그 일본 유학 프로그램도 무산되었다.

같은 친일파인 이완용과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상술했듯이 이완용이 자신을 유배보내고 탄핵하여 앙금이 있었다. 거기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출세지향적인 행보를 보여왔지만 박영효는 처음에는 순수하게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활동했었기 때문에 같은 친일파로만 묶일 뿐 살아온 양상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3.1 운동 때 손병희가 박영효를 민족대표로 영입하려고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설득하려 하자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도 안 된다고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다만 일본 경찰에 밀고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손병희는 이 외에도 이완용, 송병준에게도 회개를 위해 참여하라고 설득했으나 이들 모두 거절하고 신고도 하지 않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