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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종서(金宗瑞)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2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초기의 정치인, 문관, 군인

세종 때 6진을 개척해 문관 출신이면서도 크게 용맹을 떨쳐 별명이 대호였다. 세종의 고명을 받고 단종 대에 좌의정에 올라 섭정을 했으나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출생 연도에는 1383년설과 1390년설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1451년 기록을 보면 김종서가 다음 해에 세는나이 70세가 된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오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역산하면 1383년이 정확한 생년이 되는데 과거 급제 연령이나 활약 시기를 감안해도 1383년설이 설득력이 있다. 1390년설의 경우는 16살에 급제한 것이 되어서 조선 시대 과거 급제 연령에서 연소자 쪽에서 2위가 된다. 출생지는 충청남도 공주시이고, 선대와 부친 김수(金陲)의 고향은 전라남도 순천시이다. 생원시에 입격하고 1405년(태종 5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3위로 급제한 뒤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은 인물로 초기에는 주로 간언하는 간관직과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감찰직을 주로 맡았으며 세종에게 크게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아래는 세종 대 북방 개척의 1등공신이었던 김종서의 시조로 유명한데 그의 변방 정벌의 포부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활약은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국경선을 확정짓게 된 세종의 북방 개척 때 활약이다. 1433년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북방에 파견된 이후 8년 동안 변방에 있으면서 4군 6진 중 6진의 개척을 총지휘하고 두만강 이남을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이때의 기세가 대단했는지 "큰 호랑이(大虎)"라고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북방으로 파견되기 전에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 활과 화살을 주며 "항상 가지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라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김종서는 북방에 파견되었다. 북방에서 돌아와서는 형조판서와 예조판서 직을 역임하다가 세종 말년에 명나라 황제 정통제가 오이라트에게 사로잡히는 사태가 발생하여 요동 지역이 어수선해지자 다시 노구를 이끌고 평안도 도체찰사로 북방에 파견되기도 했다. 세종은 "북방의 일은 김종서가 있어도 과인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과인이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이라는 말로 김종서의 공적을 평가했다. 하지만 북방에 있으면서 세종에게 "제발 한양으로 올라가게 해 주세요"라고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렸던 것을 보면 북방에 짱박힌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듯.

북방 개척 때의 활약 때문인지 세종 당시 영의정이자 원로였던 황희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황희가 자신의 후계자로 김종서를 점 찍어놓고 맹사성이 말릴 정도로 사정없이 굴렸다. 오죽했으면 김종서가 황희 앞에서 늘 각 잡고 지냈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런데 분명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았는데도 장군의 이미지가 강하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도 여러 외직과 언관직을 거치며 훌륭한 행정 수완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학, 경학, 역사에도 밝아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와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세종 사후에 문종 즉위년에는 의정부 좌찬성이었다가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고 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와병으로 사직하자 좌의정이 되면서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단종 시기에는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과 정국을 주도했는데 이때 인사와 관련된 황표정사라는 것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왕조 최초로 사초를 왜곡하다 걸린 사람이기도 한데 단종 원년(1453년) 5월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당시 책임자였던 김종서가 안숭선(安崇善)의 가장사초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발견했다. 내용은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송골매를 조공할 것을 요구하여 전국 일대를 뒤져 겨우 7마리를 잡았을 때 당시 좌승지였던 김종서가 세종에게 아첨하기 위한 목적에서 2마리를 몰래 빼돌려 바치려다 세종의 분노로 실패한 일이었다. 이걸 그대로 적어놓은 걸 보고 기사관을 시켜 구절을 삭제한 것인데 곧 들켜버렸다. 단, 들킨 당시에는 김종서가 고명대신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고 이런 연유로 진짜 사초 왜곡질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종 때의 민수사옥을 첫 케이스로 본다. 다만 <단종실록>이 엄청난 왜곡과 미화로 악명높은 실록인지라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

의외로 단종을 지키려는 뜻은 같았으나 한 뜻이 되지 못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었다. 그 이유는 김종서의 전례없는 독단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학사가 그의 황표정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대신을 참소하니 죽어 마땅하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김종서는 서슬퍼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권신이 되려면 국법을 어기고 전횡을 부리며 부정부패를 해야 하는데 김종서는 청렴결백했을 뿐 아니라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두고 다투던 수양대군에게 눈엣가시가 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살해 0순위로 지목되게 된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만 죽이면 나머지 무리는 걱정할 것도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는데 후에 진짜 그렇게 되기는 했다. 적어도 이런 사육신을 포함한 소장파 신료들이 김종서를 포함한 고명대신들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는 인식을 가진 것은 확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불시에 김종서의 집에 도착한 수양대군이 집 앞에서 "관모뿔이 떨어졌는데 관모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한 마디 이야기를 하고 서찰한 장을 읽어보라고 김종서에게 건네주자 김종서는 서찰을 달빛에 비추었는데 그때 수양대군의 종인 임어을운이 철퇴를 휘둘러 그를 살해한 줄 알았으나 눈치를 챈 아들 김승규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몸으로 감쌌고 양정이 칼로 찌르자 아들인 김승규만 죽고 김종서는 그 자리에서 죽지는 않았다. 살아남아 다시 깨어난 김종서는 궁에 들어가 수양대군과 대결하기 위해 부인의 가마를 타고 4대문을 모두 돌았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둘째 며느리 친정인 사돈댁에 들어가 숨었는데 날이 밝자 있는 곳이 들키고 다시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였던 양정과 이흥상 등에게 결국 살해당했다. 실록에 기록된, 살해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을 가져오너라!"였으며 이후에 목이 저잣거리에 내걸리는 효수형을 당했다.

세조가 즉위한 이후 역적으로 남아서 <고려사> 편찬자 명단에서도 삭제되고 권력을 탐한 신하로 남았으나 정작 <조선왕조실록>에 김종서의 비리나 개인적 결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렇게 된 것은 김종서가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막나가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오히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 일파야말로 갖은 부정축재와 비리 사건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한명회나 홍윤성이 대표적인 예. 그나마도 한명회는 능력이라도 있었지, 홍윤성은 안하무인에 흉폭하여 살인마 정승이란 소리까지 듣는 지경이었다. 수양대군 일파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핑계를 꾸며내느라 김종서를 권신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김종서 뿐만이 아니라 세종 시대의 많은 명신들이 이때 사라졌는데 그나마 살아남았다면 세조의 편에 선 정인지나 신숙주 정도다.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선왕들의 뜻을 받들어 단종을 모신 충신이자 명신이면서도 의정부 서사제로 권력의 최정점에서 초기 조선을 호령한 권신이란 모습도 보여진다. 그 활약상과 명성에 걸맞게 야사에도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현재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데 활약한 걸 생각하면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숙종 45년 후손 김익량(金翼亮)이 장녕전 참봉으로 제수 되었다. 300여 년이 지난 영조 22년, 사육신과 함께 복권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무덤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다.(김종서 장군묘) 원래 공주시 장기면이었다가,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곳임을 알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장군면'으로 개칭됐다. 세조에게 죽고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신 수습을 제대로 못하여 현재 묘에 묻혀 있는 것은 김종서의 다리 하나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위치한 공주 지역의 어른들은 '대교리'란 이름의 지명을 그를 기억하여 '한다리' 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사실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니 정확히는 다리도 묻지 못한 가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3. 기타

전설에 의하면 김종서의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자 하나가 요행히 탈출해서 수양대군의 악행을 보고 가출한 서녀와 만나 일가를 이루어 간신히 대를 이었다고 한다. 다른 버전은 나중에 온천에 온 수양대군을 이 부부가 만나서 욕을 한바탕 해주었다고도 한다. 이는 고종 대에 출간된 야사집 금계필담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전승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주의 남자다. 하지만 실제 기록에서는 이 서자의 행방은 찾아볼 수 없으며, 김종서의 적손은 끊기지 않았다. 김종서의 손자 김행남, 김중남, 김팽, 김효달이 은진, 익산, 순창, 담양 등지에 은거하였기 때문이다.

황희가 일찍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주시하다 보니, 황희와 연관된 야사들이 몇 개 있다. 김종서가 의자에 비딱하게 앉아서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황희는 "여봐라. 김 판서 저 놈이 앉은 의자 다리가 한 쪽이 망가진 모양이니 나무 토막을 가져다 받쳐 놓도록 해라."라고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세를 고쳤다.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이 일을 하던 도중 식사 시간이 되자, 김종서가 아랫 사람들에게 명해서 음식상을 차려 정승들을 대접했다. 그러자 황희는 고맙다는 말 대신 "관리들을 대접하는 일은 조정의 예빈시가 맡아서 하는 것인데, 왜 자네가 멋대로 월권 행위를 하는가? 당장 치우게!"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또는 황희가 밤늦게 일을 하느라고 시장할까봐 김종서가 정승들을 위한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는데, 문제는 당시에는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라 든든히 먹어 두고, 저녁은 자기 전이므로 적게 먹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황희가 김종서가 예의를 어겼다고 정승들 앞에 세워 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자신보다 20여 년 어린 남지가 본인보다 승차가 빠르자 질투를 했다는 기사가 있는 반면에 그의 동생 남간을 도와준 기사가 실록에 전해 온다.

정조대왕급 구축함(DDG-II)의 3번함이 김종서의 이름을 따서 대호김종서함(DDG-997)으로 명명되었다. 다만 이전까지의 함정 명명법에서 사용하던 호나 시호가 아닌 대호라는 별명을 사용한 것은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 되었다. 특히 김종서의 호인 절재가 이미 대중에 널리 알려졌기에 더욱 큰 의문점인 듯하다.

김종서의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지금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으로서 몸집이 작고, 관리로서의 재주는 넉넉하나 무예(武藝)는 모자라니 장수로서 마땅하지 못하다. 다만 그가 일을 만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며, 4진(鎭)을 새로 설치할 때에도 처치한 것이 알맞아서 갑자기 그 효과를 보았으니, 이것은 포상(褒賞)할 만하다."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년) (음력)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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