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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충선(金忠善)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8|조회수49 목록 댓글 0

1. 개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항왜 출신의 장수

2. 생애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을 맡아 휘하 다수의 철포수들이 포함된 3,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에 상륙했다. 김충선이 썼다고 알려진 《모하당 문집》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에 심취해 있었고 조선과 중국의 문화를 흠모했으며 살인과 약탈, 배신을 일삼는 당시 일본의 비속한 풍속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하여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후 부하들에게 노략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에게 돌렸다. 이후 경상도 병마 절도사 박진에게 서신을 보낸다.

"사람이 사나이로 태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태어나서 끝내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웅으로 한이 되는 일이 아니랴 하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서신을 통해 우리는 싸움을 원치 않으니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부하 500명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서 투항하였다.

선조는 그의 투항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행재소(行在所)에서 그를 맞아 무예를 시험해보고는 곧바로 벼슬을 내려주고 전장에 활용하도록 했다.

김충선은 당시 조선에 조총을 보급했고 훈련하게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일본에서 서양으로부터 조총을 일찍부터 도입한 기이 지방 출신인데다가 집안 대대로 각종 무구를 만들어 무기 제조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그의 가문도 손꼽히는 조총 부대 지휘관들을 배출했다. 말 그대로 일본의 조총 개발 역사와 아주 인연이 깊은 인물인지라 조총에 대한 구조와 제조기술에 밝았다. 그는 조총을 제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약의 제조에도 관여했고, 조총을 이용한 고급 전술도 직접 가르쳤다. 또한, 사격뿐만 아니라 검술에도 능했는지, 검술을 비롯한 단병접전도 훈련하게 했다. 20세기 들어 김충선의 집을 수리하다가 담장 속에 감춰진 조총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총 전문가의 귀순과 적극적인 협조는 조총을 체계적으로 운용하던 일본군에 비해 대인화력이 부족했던 조선 처지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같은 해 12월, 종2품 가선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잇따라 공을 세웠으며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 주청하여 한국식 성명을 하사받았는데 이름을 김충선이라 했다. 이후 곽재우 등의 의병과 함께 활약하며 왜군 격퇴에 일조하였다. 조총 전문가인 김충선의 노력으로 불과 1년 만에 조선은 일본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품질의 조총을 양산하게 되었고, 이후 조총은 궁시를 넘어 조선의 국방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모하당술회>(慕夏堂述懷)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불만을 품었던 반대파 세력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고, 결국 도요토미의 뜻을 꺾진 못했으나 출병하는 척하며 귀순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당시 일본에서마저 임진왜란을 명분도 실속도 없는 도요토미의 가장 큰 실책으로 여길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했는데 이건 현대에 와서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현대 일본 미디어를 보면 '도요토미가 미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의 부정적인 묘사가 많다. 당장 도요토미의 최측근들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나 이시다 미츠나리도 전쟁 반대파였다. 비록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도요토미의 최측근들조차 이건 명분도 없고 실속도 못 챙기는 멍청한 짓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던 걸 고려하면 사야가가 실제로 반대파였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겨우 전국시대가 끝나고 평화가 오나 했는데 뜬금없이 바다 건너 옆 나라에 쳐들어가서 또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하면 염증이 일만도 하다.

상식적으로 영주들로서는 전국시대가 끝났으니 더는 영지를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고 영지에서 자신과 자손들이 어떻게 천년만년 해먹을지 생각하는 것이 이득이고, 잘 모르는 외국까지 나가서 죽을 위험을 겪거나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실제로 조선으로 건너갔다가 엄청난 추위와 기아, 풍토병 때문에 끔찍하게 고생했고 몇몇은 죽기까지 했다. 거기에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나간 병력은 도요토미 직할병이 아니라 전부 영주들이 자기 영지를 쥐어짜서 징발해야 했기 때문에 7년이라는 장기간이나 전쟁이 이어진 이상 영주들은 에도 시대의 번영이고 나발이고 전쟁 도중과 직후에는 큰 손해를 봤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임진왜란 직전 그 당시의 일본에서는 조선 침략을 반대했던 다이묘들도 꽤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일본 통일 이후 휘하의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눠줘야 하는데 일본의 땅만으로는 부족해서였다. 물론 도요토미의 야망대로 명나라까지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일본 본토 따위는 신경도 쓸 필요가 없었겠지만 명나라까지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조선 반도의 절반만이라도 점령한다면 부하들에게 나눠줄 영지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 내 세력이 부족한 중소규모 다이묘들이나 세력 기반이 될 영지마저 없는 아시가루 및 잡장들은 임진왜란에 적극 동참했으나, 이미 일본에 거대한 세력 기반이 확실히 다져진 다이묘들은 굳이 전쟁에 나갈 이유도 없었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도요토미와 비등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력 동원을 요청하는 도요토미의 명령에도 이에야스의 군대는 조선에 상륙하지 않고 일본에서만 놀았는데, 이 행보는 이후 이에야스가 쇼군에 오른 후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도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더불어 다테 마사무네는 도요토미를 상대로 한번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어서 약점을 잡힌지라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마지못해 조선에 상륙하긴 했으나, 날씨도 추울뿐더러 전쟁이 너무 오래간다는 핑계로 반년 만에 일본으로 되돌아가면서 철수해 버렸다.

이외 우에스기 카게카츠도 조선을 침략하긴 했지만 적극 전투에 참가하진 않고 점령 후 당시 일본에서 보물로 통하던 조선의 서적, 도자기같은 재물을 약탈하거나 조선의 도공이나 장인들을 납치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이조차도 3개월 후엔 그만두고 본국으로 철수하는 등 철저히 자기 잇속만 챙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구로다 나가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 현대에도 명장 내지는 명 다이묘로 대접받는 인물들이 임진왜란에 적극 참여하긴 했으나 그들은 원래 도요토미의 부하였거나 도요토미와 전쟁하다가 패배해서 도요토미에게 다시 한번 개겼다가는 목이 날아갈 처지의 인물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이었다. 즉, 사야가 역시 전쟁에 소극적이었는데 그렇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뻗댈 수 있을 만큼 입지가 강하지는 않아서 강제로 임진왜란에 참여하게 됐다고 볼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명성은 있으니 지휘관 자리를 맡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조선으로 귀순한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사야가의 투항에는 그의 정치적 배경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사야가는 자신과 파벌이 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강제징병되어서 사실상의 화살받이로 조선에서 차도살인으로 버려지는 처지였고, 임진왜란에서 살아남더라도 어차피 정치적인 숙청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살기 위해서라도 조선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모든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정치적 상황 또한 조선으로 투항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귀순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일본군과 여러 번 싸움을 벌였고,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해 일본군을 상대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三品)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경서(金景瑞)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하인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

벼슬로 보건대 논란(아래 참조)에도 인정할 만한 전공 자체는 충분했으며, 조선 조정 역시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항왜 출신 무장에게 벼슬을 내리고 치하함으로써 대외적으로 항왜 출신이라도 조선으로 투항하고 충성을 보여주면 이만큼 대우를 해주겠다고 선전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사야가의 정체에는 논란이 있으나 일단 다이묘 정도의 계급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한데, 당대 일본에서 웬만한 공가와 다이묘도 정2품에 대응하는 관위까지 승진하는 일은 드물었다는 걸 고려하면, 조선에 항복해서 일본에서 살았다면 평생 오를 일이 없던 품계에 오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 쯤 되면 김충선이 말년까지 조선에 충성했을 만하다.

2.2. 임진왜란 이후

남풍이 때때로 불제

고향을 생각하니

조상의 무덤은 평안한가

일곱 형제는 무사한가

구름을 보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과

봄풀을 보고 솟아오르는 생각이

어느 때인들 없을쏘냐

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선조로부터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 즉 사금(沙金)에서 따와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 가야 수로왕계인 김해 김씨와 구별하기 위해 '사성(賜性 : 하사받은 성) 김해 김씨'라 칭한다. 김충선이 낙향 후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友鹿里)에 사슴을 벗하여 살았기에 우록(友鹿) 김씨라고도 한다. 이 우록이란 지명은 김충선이 직접 지은 지명으로 이곳은 현재까지도 사성 김해 김씨들의 집성촌이 조성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김충선의 사당인 녹동 서원이 있는데, 뒷 편 산 중턱에는 김충선의 묘가 있고 옆편에는 달성 한일 우호관이 있으며 일본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한 해 1,000명 정도 방문한다고 한다.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 소식 가져온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

이내 생전에 골육지친 소식

알 길이 없어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 중에서

임진왜란 이후 북방 경비를 위해 북방에서 근무했으며, 이 공로로 정2품 상 정헌대부 벼슬을 받는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이괄 군에 항왜들이 많이 가담했다가 토벌당했는데, 그중 무예가 뛰어난 서아지(徐牙之)라는 항왜는 도저히 조선군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김충선이 서아지를 만나 잘못을 꾸짖은 후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땅을 받았으나 군대의 둔전으로 사용하라고 다시 반납했다. 이때 참전한 이유는 이괄의 반란군에 항왜가 일부 가담했기에 조정에서는 이러한 항왜들을 배은망덕한 놈들이라 여기며 분노하였고, 같은 항왜인 김충선으로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씻기 위해 공을 세워 그 의심을 풀어야 했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 1636년(음력) 병자호란이 터지자 쌍령 전투에도 참전하여 청나라군 500기를 전멸시키는 등 활약했으나, 결국 조선 조정이 항복하자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우록동에서 은둔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42년 사망하였다. 일본에서부터 조선, 청나라까지 이어지는 수차례의 전쟁 속에서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인생을 보내다 간 셈.

사후 1776년 삼도 유림들이 나서 김충선에 시호를 내릴 것과 정려를 세우고 증직을 높여 줄 것을 상소하는데, 이후 사(祠)를 세우자는 논의로 이어졌다. 그 결과 1794년 정조 18년 우록리에 녹동사(鹿洞祠)와 녹동서원이 세워지고, 1812년 유생 김경탁이 김충선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과 관직의 추증을 요청하였으나 반려되었다. 다만 1892년 고종 29년 12월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로 증직됐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이름이 뭔지 알 수 없다'였던 내용이 2009년 들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며 '현재 사야가의 자손이라 자칭하는 일족이 살고 있다'는 후손들이 보면 분개할 만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이후 과격한 표현이 완화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 사관은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의 기록을 마구잡이로 깎아내렸고, 일본 학자들은 김충선에 대해 조선에서 지어낸 가공의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한마디로 학술적으로 수준이 매우 낮을 뿐더러 이미 70여 년 전에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 난 구닥다리 학설에 근거해서 작성되어 있다는 얘기다. 현실은 집성촌 후손들의 유전자 검사에서 한국인과 다른 조몬인의 유전적 특징이 발견되어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실제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전전의 사관과 분위기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진보했다. 특히 나카무라 히데타카 같은 학자는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모화당문집》도 사실에 근거한 부분이 많다고 보면서 사야가를 실존 인물로 학계에 널리 알려서 이미 사야가 실존은 수십 년 전에 정설로 인정받은 지 오래다. 여기에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은 문호 시바 료타로가 사야가에 관한 수필을 쓴 것으로 말미암아 우록동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 없다-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 한국과 일본 교과서에 김충선 장군의 이야기가 실렸다.

 

즉, 사야가에 대한 위키 백과의 폄하적 서술은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수십 년 전에 폐기된 것이다.

일본에도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귀화한 뒤에도 일본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전향한 죄로 몰살당한 것인지 직계든 방계든 간에 현재 일본에서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족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확인된 그의 후손은 조선에서 새로 가정을 꾸린 뒤 태어난 자식들과 그 자손들뿐이다. 한때 한국의 후손들이 조선 사기장 자손들을 찾는 움직임과 더불어 일본에서 그의 후손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아래에서 서술하듯이 여타 조선 기록에 등장하는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김충선은 일본에서는 누구였는지 정체가 불분명한 상태라 일본에서 후손을 찾으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우록동에 살던 후손들은 1904년 대한제국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 제국 경찰 및 일본의 탐험가들과 만났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당시 혹심한 폭력은 없었지만, 우록동에 왜경이 와 시비를 걸거나 매국노, 비국민의 후손이라며 매도하는 등 후손들을 귀찮게 한 적이 많다고 한다.

시조가 일본인이라 그런지 비교적 족보가 늦게 열려서 그런지 사성 김해 김씨는 조선 후기 족보 위조의 파도 속에서도 사칭 당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3. 정체에 대한 가설

쇼와 덴노 연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상적 귀순자. 노부나가 쪽 가신의 일족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 사망 이후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으면서 노부나가의 가신들을 대부분 숙청시켜 반감을 많이 사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병사 직전에도 이들의 원한이 두려웠던지 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도쿠가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 시바 료타로의 어느 수필에서는 '사야가'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일본어의 감탄사를 음차한 것이라는 설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 가설이 사실이면 김충선은 전혀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사이카슈의 일원 설

일본의 호족 연합이자 용병 집단이었던 사이카슈의 일원이었다는 설. '사야가'의 발음이 '사이카'와 유사하고, 사이카슈는 철포에 능숙한 것으로 유명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에게 조총 만드는 법과, 이후 조선의 정예총병을 육성한 기틀을 마련한 것이 김충선이기에, 매우 유력한 가설이다.

스즈키 요시유키(鈴木善之)

김충선은 자신의 자(字)를 '선지'(善之)로 지었는데, 일본 측의 기록에서 사이카슈(雑賀衆)에 스즈키 요시유키(鈴木善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에 출병했다가 실종된 것까지 확인되기에 가장 유력한 설. 스즈키는 호족 연합이었던 사이카슈의 두령을 세습하는 지도자 가문이었기 때문에 스즈키 가문의 일원이었다면 유학 공부에 심취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은 높다.

사이카 마고이치

사이카슈의 두령인 사이카 마고이치,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대 스즈키 시게히데가 김충선이라는 설이다. 스즈키 시게히데는 1585년 히데요시의 키슈 정벌 이후로 기록에서 사라지기 때문. 다만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김충선은 90세 이상으로 장수했다는 의미인지라 당대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이 설은 김충선 = 사이카 마고이치 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인 《바다의 가야금》로 유명한데, 정작 이 《바다의 가야금》에서도 나이 문제 때문에 스즈키 시게히데가 아닌 그 아들 '스즈키 고겐다이'를 4대 사이카 마고이치이자 김충선인 인물로 설정했다.

오카모토 에치고

네임드 항왜인 오카모토 에치고(岡本越後)가 김충선이라는 설. 오카모토 에치고는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에 속해서 군대를 이끌고 울산성에 화의 사자로까지 갔던 항왜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항왜 월후(越後)를 사신으로 울산성에 보냈다고 나오며 일본 측 기록에는 8,000명을 이끄는 항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장 항복하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대화가 진행되자 일본을 버린 것을 후회하고 울면서 지금이라도 일본에 다시 귀순하고 싶다고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일본 측 기록은 적당히 걸러 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울산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열악한 상황을 볼 때 항복을 받아내러 간 사람이 대화 도중 지레 겁먹어서 다시 귀순하길 원하며 울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좀 떨어지기 때문.

이 설은 키타지마 만지와 심수관이 제기한 설로 창작물 중에는 안병도의 《일본정벌기》, 김경진과 같이 쓴 소설인 《격류》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 다만 위에 나온 사이카 집단 설도 포함해서 사이카 집단의 일원이었던 오카모토가 조선에 와서 항복했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임진왜란(김경진)》에서도 이 설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라다 노부타네

일본에서는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라는 설도 있다. 카토 키요마사의 가신들을 조사해 본 결과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총과도 관련이 있는 보급 관련 직책으로 임진왜란에 참가해서 조선으로 간 후 생사불명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라다 노부타네는 울산성 싸움에서 전투 중 실종되었다는 설이 다수설이다.

아소씨 가문 가신 설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구마모토는 원래 아소산을 섬기는 대신관인 아소씨 가문이 다스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땅을 빼앗겼고 가토를 따라 강제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소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겠느냐는 설이다. 위에 나온 오카모토 에치고가 아소 가문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주목받는 설이다. 특히 일본의 기록에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 외에 아소미야 에치고노카미(阿蘇宮越後守)라는 항왜도 기록되어 있고, 아소 일족이 '타이코 검지'에 대한 반발 등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당주인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 1581~1593)가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책임을 지며 처형당했다는 기록을 볼 때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아소 일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설이다. 실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많아서 최소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는 아소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키타지마 만지는 아소 일족의 아소미야 에치고노카미=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김충선으로 추정했고, 심수관은 사야가라는 이름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사이카 일족 연계설도 언급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4. 일본에서의 평가

1915년 일본인 연구자들의 모임인 '조선 연구회'는 사야가 문집인 《모하당문집》을 다시 간행한다. 책머리에 가와미 히로타미는 "적혀 있는 글은 위서이며, 사야가 같은 매국노가 우리 동포라는 것이 유감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고 단정했다. 1924년 역사학자 세데하라 탄은 "사야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며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에이코는 현지 조사를 시행하고 1차 자료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통해 1933년 청구 학총에 논문 <모하당 김충선의 자료에 대해서>를 쓰면서 사야가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증명하여 그 학설이 정당성을 얻고 있다.

해방 이후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후 일본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우록동을 찾으면서 1971년 시바 료타로가 쓴 《가도를 가다. 한국 기행》에 사야가와 우록리가 소개되면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99년에는 무려 1,500명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공영 방송인 NHK에서 <출병에 대의 없다, 히데요시를 등진 사나이>(1992년 3월 30일 방송.)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는가 하면, 아사히 신문에서 "양식 있는 무사의 의로운 결단" 등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88년 한국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나왔으며, 일본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 등으로 묘사되어 실리기도 했다.

5. 그 외

이 사람 외에도 유명한 항왜 장수로는 여여문과 김성인(金誠仁: 사여모. 함박 김씨(咸博 金氏)의 시조)이 있다.

선조가 김충선에게 하사한 사성 김해 김씨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성씨이다. 대표적으로 법무부장관, 내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역임한 김치열(金致烈) 장관이 김충선의 후손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무언가 김충선을 떠올리게 하는 한 왜장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전교하기를,

"왜적의 장수가 투항한 것은 사건이 중대하니 속히 비변사로 하여금 회계토록 하라. 그 문서나 처리하는 일을 혹시 유 총병과 상의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울러 비변사에 문의하라."

하니,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 일은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므로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다시 모여 의논해서 아뢰겠습니다. 총병에게도 고하여 그 처리를 묻는 것은 극히 마땅합니다."

하고,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왜인의 항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말단의 맹문(盟文)은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혈점(血點)으로 얼룩진 흔적이 있으니 반드시 스스로 찔러서 피를 내어 우리 나라에게 진실을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유 총병을 보고 의논하고자 합니다. 다만 이 일은 관계가 극히 중요하니 신들이 다시 생각하고 헤아려서 내일 아침에 신 유성룡이 유사 당상인 신 김수(金睟), 신 이항복과 함께 가서 총병을 보고 은밀히 처리할 방법을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항복한 왜적에 대한 일은 관계가 가볍지 않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오늘 다른 대신들이 오지 않았고 소신만 홀로 왔으니 처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적과 대치해 있는 중에 무리들이 항복해 오려는데 이를 막으면 무모한 데에 가깝고 받아들이는 것도 난처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서들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항복하는데 받지 않은 일은 전고(前古)에 없었는데 더구나 이 왜인들은 받지 않으면 관계가 극히 중대해지는 경우이겠습니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처리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그들의 사연을 보면 애걸하는데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대우를 욕구대로 안해주면 아마도 다른 생각을 낼까 걱정됩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그 항서에 혈점이 있으니 왜적이 남에게 믿음을 받으려면 꼭 이와 같이 합니다.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으며 받는다 해도 난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왜적의 장수인데 무슨 일로 항복하려 하는가? 저들 속에 반드시 서로 화합치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어찌 우리에게 오려고 하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자해(李自海)가 이르기를 ‘왕자가 북도에서 사로잡혔을 때 파주 사람도 사로잡혔는데, 말하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 왜인 중에 전왕(前王)과 친하고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불복하는 자가 스스로 하는 말이, 자기 무리 여섯 사람은 모두 일본에 있는데 저만 보냈다고 하면서 청정이 우리 나라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언제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원하여 풀어주었다. 평양 승첩의 소문을 듣고서 청정이 황정욱(黃廷彧) 부자(父子)를 죽이려고 하니, 그 왜인이 말하기를, 이미 사로잡았다고 관백(關白)에게 고하고서 이제 말없이 죽이면 관백이 반드시 책망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실상 구원한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대개 이 왜적은 수길에게 불복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싶지 않으므로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장은 한 사람도 얻기가 어려운데 이제 투항을 해도 받지 않는다면 참으로 영상의 말과 같이 된다. 다만 50명을 거느리고 오려고 한다 하니 그러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며, 또 온 후에도 처음에는 배반할 마음이 없겠지만 우리 나라의 사정을 보면 반드시 다른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총병과 더불어 의논하고자 한다. 가령 당상(堂上)·가선(嘉善)의 직첩을 가지고 변장(邊將)을 시켜 보이면서 ‘오면 이 벼슬을 주겠다.’하되, 설사 일이 발각되어 왜장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애석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또 말하기를 ‘족하(足下)가 만약 50인을 거느리고 오면 우리 나라에서 의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만 약간의 심복(心腹)만 거느리고 온다면 수직(受職)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다.’고 하게 하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는 먼저 50인을 보내고자 함이고 한꺼번에 내보낸다는 것은 아니니 난처하게끔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장수로서 투항하는 자가 많음은 좋으나 우리 나라는 꾀가 없어서 늘 사기를 당할까 두렵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옛날의 명장들은 이러한 기회를 만나더라도 평온하게 처리하여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그가 50인을 거느리고 오더라도 한 곳에 모여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나누어 두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들은 매우 사납고 우리 나라의 처사는 자못 소활하니 그들의 욕구는 큰데 잘 대우하지 못하면 마침내는 제어하기 어렵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만약 부득이하면 요동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장 한 사람과 50인을 벼슬 주는 일이 작은 일은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비록 이같이 한다 해서 꼭 왜적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왜병 50명이 어찌 중대하지 않겠는가. 총병에게 의논해서 처리하려 한다. 속히 선전관을 보내도록 하유하라."하였다.

선조실록54권, 선조 27년 8월 13일 무오 2/3 기사 /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투항한 왜장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다

요약하자면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 장수 한 명이 자신의 피를 내어 점을 찍은 문서를 조선에 전달하며 귀순 의사를 밝혔는데, 조정의 대신들과 선조는 수하 50여명을 거느린 이 왜군 장수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꺼림칙하다면서도 선조는 일단 당상관, 가선대부라는 후한 벼슬 임명장을 보여주면서 유혹해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카더라통신이긴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함경도에서 지내던 사람이 가토의 부하 중에 히데요시를 몹시도 싫어하고 전왕과 살갑고 친근하게 지내는 자가 있다고 증언 했다는 것도 몹시 흥미로운 부분.

이 기록에서 가리키는 인물이 김충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의 그 우월한 문명 수준에 크게 감탄해서 상륙하자마자 3000여명의 부하를 데리고 조선에 바로 귀순해 버렸다는 이야기보다는 조선 전역에서 지속적인 전투와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북관 대첩 이후 함경도에서 철수한 후 실시한 점검 결과 군 병력의 1/3 가량인 9000여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 당시 가토 기요마사군 휘하에서 종군하며 50여명 정도를 거느리던 말단 지휘관이 이 참담한 상황을 견디고 견디다 못해 조선 측으로 귀순했다는 추측이 더 그럴싸하긴 하다. 무엇보다 선조가 제시한 당근인 당상관 가선대부 벼슬도 역사에 기록된 항왜 중에선 유일무이하게 김충선만이 거머쥐었던 몹시도 높은 자리이다.

5.1. 자료에 대한 논란

사야가의 일생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사야가 본인이 후일 집필했다고 알려진 《모하당문집》이 출처인데, 여기서는 사야가가 대병력을 이끌고 거의 상륙 직후에 귀순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어서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이 있다.

사야가의 서신 내용 문제. 기록을 보면 일본인 무사인 사야가가 거의 조선인 유학자와 같은 모화사상에 근거하여 화려한 문체로 조선의 백성을 절대 해치지 않겠다는 방을 내걸고, 박진에게 조선과 중국의 문물을 흠모하여 항복한다는 절절한 서신을 올려 귀순했다고 하는데, 일본인 무사들의 지식수준은 매우 떨어졌기에 승려들에게 이런 서류 업무를 대행시키는 실정이었을 뿐 더러 그 승려들도 조선, 중국식의 서식이나 문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일본식 문장을 구사하는 일이 많았다. 일본인 무사가 조선 유학자 같은 사상이 있거나 조선식의 유려한 문장과 서식을 구사할 정도로 문장에 능통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아주 낮은 이야기다.

병력에 관한 기술 문제. 3,000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이끌고 귀순했다면 당연히 일본 측에도 그에 따른 기록이 없을 리가 없고 전장의 상황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텐데,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런 큰 병력을 이끌 수 있는 권한과 직위를 보유했다면 웬만한 다이묘 급. 전선에서 이탈했다면 기록조차 남지 않을 리가 없다.

항왜의 발생 시점 문제. 문집에는 사야가가 전쟁 자체를 나쁘게 보아 상륙 직후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초기의 조선군은 항복하는 왜군을 마구 죽이곤 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항복자의 신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고, 애초에 전격전에 가까운 쾌속 진군을 거듭하던 개전 초기의 일본군이 항복할 이유가 현실적으로 없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기 때문. 《실록》에서 사야가 등 항왜에 대한 논의는 명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일본군에게 크게 불리해지고 일본군의 사상자가 속출하던 계사년(1593년) 즈음에나 등장한다.

《모하당문집》의 신빙성 문제. 《모하당문집》은 본래 사야가가 쓴 기록이 분실되었는데 6대 후의 후손이 그것을 재발견하여 다시 간행했다.라는 몹시 수상한 단서가 붙어 있다. 실제로는 행장류 기록에 가깝다는 이야기인데, 행장은 후손들이 조상에 대한 숭모를 담아서 크게 미화하는 일이 잦은 기록이어서 이렇게 되면 신빙성에 한계가 생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모하당문집》은 그 뼈대가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세부 사항은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야가의 실제 투항 시점은 상륙 직후인 임진년이 아니라 상륙하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르고 일본군이 불리해진 이후인 1593년으로 잡고, 실제 투항 동기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거나 모종의 사정 탓에 도요토미 정권이나 가토의 지배 아래에서 생활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많다. 한국 여행기를 연재하던 도중 사야가에 관심을 두고 집중해서 파고든 문호 시바 료타로 같은 사람도 이런 설을 긍정하면서 '센고쿠 시대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항복한 무사가 어제까지의 아군을 배신하는 것은 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야가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또 귀화한 인원수도 《모하당문집》에서 주장하는 수천 명 규모가 아니라 혈혈단신이었거나 부하를 이끌고 항복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소수 부하만을 이끌고 항복한 것으로 본다. 물론 조선에 귀순한 이후에 죽을 때까지 조선에 충성했으므로 이런 연구들이 사야가의 전공과 존재감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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