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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만덕(金萬德)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8|조회수28 목록 댓글 0

1. 개요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

채제공 작, 김만덕과 만난 자리에서 써준 휘호

恩光衍世(은광연세)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편액 명(銘) - "김종주의 대모(김만덕)가 굶주린 제주도 백성들을 크게 돌본 이유로 정조 임금의 남다른 은혜를 입어 금강산을 구경까지 해서 사대부들이 나서서 기록으로 남기거나 노래를 읊기도 했으나 옛부터 매우 드문 일이다. 이 편액을 써주어 그 가문을 널리 알린다"

추사 김정희 작, 유배생활 중인 자신의 편지를 여러 번 전해준 공마리 김종주에게 김만덕의 이야기를 듣고 김만덕을 칭송하며 써준 편액

제주의 바람은 제주로 돌아가야 한다.

조선 시대 제주도에서 활동한 상인.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사와 빈사 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이 공로로 제주도민들은 그녀를 의녀(義女)로 부른다.

2. 생애

양인(良人)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이름 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오빠와 동생은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면서 외삼촌 집안에서 얹혀 살다가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은 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를 받고 그만두었다.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객주들의 시기심 때문에 부정축재로 허위 신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의 상소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심노숭이라는 문인은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고 한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그렇게 벌어서 만덕은 제주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라는 글을 썼는데 아마도 그녀와 경쟁 관계였던 객주들이 퍼뜨린 루머 중 하나인 모양이다.

1795년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식량 생산이 저조했던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본토에서 2만 섬을 보냈지만 가던 중 침몰해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본토에서 쌀 5백 섬을 사와 제주도민의 구호에 써 달라고 관가에 헌납했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한양에 한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그녀를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직접 만났으며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제주도 출신 여성인데 제주도 사람들은 인조 7년(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에서 태어난 이상 평생 섬을 나갈 수 없었다. 사실상 그녀는 제주도 출신으로서 이례적으로 한양 땅을 밟아본 거의 유일한 여성인 셈이다.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는데 채제공은 그녀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같은 실학자와 김정희, 조수삼 같은 문인들도 그녀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친오빠 김만석의 아들이자 조카인 김성집의 장남 김시채를 양손자로 들여 키웠다. 1812년 고향 제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손자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장례는 고으니모르라는 곳에서 치렀으나 도로 공사로 인해 1970년대에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오름 근처로 이장했다. 김만덕의 묘와 사당은 모충사라는 이름으로 성역화되고 김만덕 묘탑과 공덕비와 기념관이 있다. 모충사 정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커다란 김만덕 묘탑이 만들어져 있고 묘비와 기념관(만덕관)은 묘탑 밑으로 있었으나 기념관은 산지천 일대에 김만덕기념관을 크게 지어 내부 전시물을 옮겨 전시하고 있으며 묘비는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현 묘탑 건너편에 자리해 있다.

3. 평가

김만덕은 본관이 김해(金海)로, 곧 탐라 양가(良家)의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영락(零落)하여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이 가난으로 고생하였으며, 자라서는 어여뻐서 교방(敎坊)에 의탁하였는데,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줄여서 재산이 불어나 커졌다.

정조 을묘년(1795) 제주 섬사람들이 크게 굵주릴 때 능히 재산을 모아서(육지에서) 곡식을 실어와 살린 목숨이 아주 많았다. 목사가 이를 어질게 여겨 조정에 보고하였다. 임금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으니 답하기를, 서울과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보기 원할 뿐이라고 하였다.

특명을 내려 고을마다 차례로 음식을 잇게 하고, 내의녀(內醫女)에 충원하여 베푼 은혜가 아주 많았으니, 이로 인하여 역말을 내어주어 1만 2천 봉우리를 두루 구경하게 하였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경대부들 모두가 전별하는 글을 지어 전해지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 현숙했던 여인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없었던 일일 것이다. 칠순에도 얼굴빛과 머리털은 신선과 부처를 방불케 하였고, 중동(重瞳)은 밝고 맑았다.

다만 하늘의 도가 무심하여 애석하게도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양손(養孫) 시채(時采)가 동기(同氣)로부터 나와 능히 유지(遺志)를 좇으면서 영원히 향화(香火)를 받들게 되었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할 것인가?

원릉 기미년(1739)에 태어나서 지금 임금님 임신년(1812) 10월 22일에 돌아갔다. 다음달 병원지(並園旨) 갑좌지원(甲坐之原)으로 장사지냈다.

임금님 즉위 12년(1812) 11월 21일

황진이나 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여타 조선사를 장식한 여성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지만 나름대로 명성은 없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당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이 올라있기도 하다. 혼자 힘으로 사업을 시작해 부자가 되었다는 입지전 스타일 인물에 대인배 업적까지 더해져 전근대의 한계를 극복한 '자수성가한 여성'의 대표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1976년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慕忠祠) 경내에 김만덕기념관을 만들고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2004년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들에 대한 지원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8일에는 국립합창단에서 한국 합창곡 창작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극작가 김문환과 작곡가 이영조에게 위촉한 칸타타 '만덕할망'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달 22일에는 순천시에서도 공연되었다.

제주도에선 "김만덕 할망"으로 불리며 도내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 지역위인들을 가르칠 때 많이 언급된 데다 1977년에 방영된 제주 출신 배우 고두심 주연의 MBC 일일드라마 <정화>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어 신사임당만큼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4. 여담

2020년 9월 경에 출생지와 관련하여 용역 연구를 한 결과 현재의 이도동에 해당되는 제주성 내로 밝혀졌다. 김만덕을 다룬 문학작품을 분석한 결과 김만덕의 출생지는 크게 2군데로 언급되어 있다고 확인했는데 제주성 내와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다. 그런데 연구팀은 김만덕 당대 사료와 후대 사료, 후손들의 증언에 기초했을 때 김만덕의 출생지는 "제주성 안"이라고 결론냈다. 정비석 작가가 책 머리말에서 보일 수 있는 (김만덕 자료 수집 차 제주를 방문해)"김만덕 후손들을 직접 취재했다"는 기록이 없었다는 점을 밝힌 건 덤이다.

김만덕은 아들이 없었기에 조카 김성집의 장남 김시채를 양손자로 들여 가계를 잇게 했다. 김만덕이 사망한 이후 그녀의 묘역을 양손자 시채의 직계후손들이 관리하였다. 양증손 김종주와 양현손 김경원의 대까지는 김종주의 직계후손이 관리하였지만 김경원의 아들 김동인이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를 떠나 일본과 부산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기에 김만덕의 묘는 김동인의 외가인 백씨 문중에서 관리한 이래로 김종주의 아들 김경원계 후손에서 김종주의 형인 김종백의 아들 김춘원계 후손으로 관리주체가 넘어가게 된다. 이후 김춘원의 손자 김두평이 묘역을 관리하다 김두평 사후, 그의 아내 한계월이 관리하다 그녀가 노쇠하자 서울에 살던 그녀의 아들 김연식을 대신해 조모를 보살피던 손자 김영호와 함께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 주변에 자동차 정비소와 주거지역이 들어서자 묘역을 이장하기로 하고 장지를 찾아다니다 1976년 박정희의 특별지시로 모충사가 건립되자 묘탑을 세워 1977년 1월 묘탑에 관을 안치하였다. 더불어 제주시 시내지역에 안장했던 김만덕 가족들의 묘도 도시개발로 인해 구좌읍 덕천리 가족묘지로 이장하였다. 다음은 묘지 이장에 관한 상황설명이다.

구묘 주변에 자동차정비공장이 들어서고 주택이 늘어나면서 김만덕 묘를 이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1971년 10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사라봉과 산천단(제주시 아라동) 등지로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1976년 5월 <총력안보 제주도협의회>의 주관 하에 모충사를 건립함에따라 김만덕묘 이장도 동의를 얻었다.

따라서 1977년 1월 3일 사라봉(제주시 건입동 소재)으로 이묘해서 묘탑을 세웠다. 김만덕묘탑 왼쪽에 유공자 기념탑 2기가 있다. 그 당시에 여성인 김만덕 묘탑을 중앙에 세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의견이 있어서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구원의 여인상 김만덕』(김봉옥 편, 제주도, 1989)

1977년 1월 25일 <김만덕 의인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한계월(80세)은 김만덕의 7대 후손 며느리로 김만덕의묘를 벌초하고 관리해 왔다. 한계월은 김두평(구좌면 덕천리 거주)의 아내이다. 그 아들 김연식(당시 60세)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한계월은 맏손자인 김영호(당시 32세, 구좌면 동김녕리 청수 마을)와 같이 살고 있다.

김상돈(1962년생)은 김만덕묘 이묘 당시 조모(고창월)와 함께 7일간 사찰에서 기도했다(사라봉에 있는 절). 그 당시 김만덕 후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았고, 김만덕묘와 조상 묘는 친척들이 공동으로 관리했다.

김영호(1945년생)의 증언을 들어보면 김만덕 무덤을 파 보니 관 속에는 진흙과 붉은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개판은 느티나무이고, 관은 비자나무로 되어 있어서 관은 온전히 그대로 있었다. 다만 시신은 다 녹아서 아무것도 없었다. 새 관을 짜서 관 속에 있던 흙을 담고, 이묘했다. 현재 탑 밑에는 관이 묻혀 있다.

『제주개발』 1977. 2-3월호, 김봉옥 투고.

김만덕에 관한 연구는 아직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아래의 글들은 2010년 이후 진행된 연구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으로, 향후 새로운 연구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이밖에 최신 연구자료가 김만덕기념관의 자료실에 업데이트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외모는 체구가 크고 칠순의 나이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이나 부처와 같았다고 한다. 당대에는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정약용이 직접 만나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다산시문집에 기록을 남겼다.

4.1. 가족 관계

김만덕의 가족관계는 기록마다 다르게 나와 있어 족보가 꼬인 감이 없잖아 있는데 김만덕이 아버지 김응렬과 어머니 제주 고씨의 소생이며 위로 오빠 김만석, 아래로 동생 김만재가 있다는 것은 이견이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세운 아버지의 원 묘비에만 기재되어 있는 인물들이 존재하는데 전처인 진주 강씨와 그의 소생이자 만덕의 이복오빠 김금석인데 이들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후대인 1972년에 묘역을 재정비할 때 새로 비석을 세우면서 이 둘의 존재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비교를 위해 김만덕 자료총서(II)에 수록된 김응렬의 두 묘비문을 모두 싣는다.

가의대부 김공지묘

공의 휘는 응열이다. 강희 신축년(1721) 8월 초 8일에 태어나고 건륭 무인년(1758) 정월 12일에 돌아가서 같은 해 10월 21일 인시에 신산지 처 강씨의 묘 왼쪽 오작지원에 합장했다.

진주강씨는 강희 정유년(1717) 5월 17일에 태어나고, 건륭 신미년 (1751) 5월 초 3일에 돌아가서 같은 해 10월 21일 오른쪽 원으로 장사지냈다.

장남은 금석인데, 뒤에 탐라 고씨에게 장가 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다음은 만석, 다음은 딸 만덕, 다음은 아들 만재이다.

가의대부 김응열 원비

가의대부김공 응열 정부인 탐라고씨지묘

공은 성 김, 휘 응열, 본 김해, 입도 시조 휘 성순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휘 영세이다. 배는 탐라고씨로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 만석, 만재는 일찍 죽었고, 손자는 성집이다. 딸 만덕은 도민 유공자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정월 12일에 돌아갔고, 배는 6월 3일에 돌아갔다. 묘는 덕천 지경 어대악 아래 댁밭 산림 입구 북향 쌍봉으로, 배는 왼쪽이다.

서기 1972년 임자 8월 1일 8대손 재흥 재길 삼가 세움.

가의대부 김응열 개비

4.2. 면천 여부

제주 목사의 장계에, “전 순장(巡將) 홍삼필(洪三弼)은 의기(義氣)를 발휘하여 진휼을 도왔으므로 두 고을의 수령 중에 빈자리가 나면 의망(擬望)하고, 노기 만덕은 기민(饑民)을 진휼하고 부족한 것을 구제하는 데 특별히 수고하였으니 바라는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유지(有旨)의 내용을 홍삼필과 만덕에게 반시(頒示)하니 만덕의 소고(所告)에 저는 늙고 자식도 없으니 면천(免賤)할 마음은 없고 육지로 나가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그가 바라는 바에 따라 육지로 나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에 연유를 급히 장계합니다.”하였다.

일성록 정조 20년 7월 28일 6번째 기사.

만덕의 성은 金이며 탐라의 良家女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기녀에게 의탁해서 살았고, 관청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안에 올리자 기역을 수행했지만 그 자신은 기생으로 처신하지 않았고, 20여세에 그 사정을 관에 읍소하였고 관에서는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빼주자 다시 양인이 되었다.

채제공, 『번암집』 「만덕전」 권55. 국문번역은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

채제공은 『번암집』 「만덕전」 권55에서 김만덕이 20여 세 즈음에 양인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채제공의 만덕전을 제외한 당대의 기록들에는 김만덕의 면천에 관한 내용이 없다. (후대의 기록 중 김만덕을 양인으로 서술한 것은 대부분 채제공의 글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논문 참고 바람. 예를 들면, 만덕을 직접 만난 또 다른 인물인 정약용의 경우, 『여유당전서』에 만덕을 제주기녀(濟州妓)라고 기술하였다.

이밖에도 관기가 쉽게 면천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김만덕이 양인으로 면천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약 18종의 조선후기 기생안(妓生案)에 관해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18종의 조선 후기 기생안 중에서 면천 기록이 확인되는 비·기는 단 2건 뿐이었다. 이는 만덕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당시의 시대상과 기녀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상술되었듯이 이 문단에서 다루는 논쟁은 만덕이 20여 세 즈음에 면천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그가 끝내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은 아니다. 상술되었듯이 그는 비록 명예직이라 할지언정 관직을 받았는데, 관직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더는 천민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덕이 아니라도 조선 왕조 역사상 천민 출신임에도 큰 공을 세웠거나 비상한 재주가 있음을 인정받아 관직에 올라 면천된 사례는 많다.

4.3. 객주였는가?

만덕이 객주업을 통해 재산을 모았는지, 기녀 활동으로 재산을 모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다. 만덕이 객주였음을 확증할 수 있는 문헌기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화를 늘리는 데 재능이 있어서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내어 팔거나 쌓아 놓거나 했다. 그런 지 몇 십 년 만에 제법 부자로 이름이 드높았다.

채제공, 『번암집』권55, 「만덕전」. 국문번역은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

성격이 또한 구애됨이 없고 장부의 기상이 있어서 재산을 잘 다스렸다. 배 만들어 쌀을 사들이고, 점포를 차려 놓고 삿갓과 말총을 판매하니 재물이 쌓여 자못 풍요하였다. (性又不拘有丈夫氣善治産造船而貿遷米設舖而販賣籉騣積貲頗饒.)

이면승(李勉昇), 『감은편(感恩編)』권3,「만덕전(萬德傳)」.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

만덕의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 언급한 당대의 대표적 기록으로는 채제공의 「만덕전」 그리고 이면승의 「만덕전」 2개 정도가 있다. 이 중에서 채제공의 글은 상업의 기본을 서술한 것일 뿐이므로 구체성이 떨어진다. 이면승은 ‘교역’의 모습을 묘사함과 동시에 ‘점포’를 차렸다고 기술한 점에서 확인해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만덕의 사업을 ‘객주업’이라고 특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 당대 기록 중 이면승의 글 외에는 만덕의 재산축적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한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보면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제주의 도외 유통에는 화북포, 조천포 두 포구가 주로 이용되었으며 건입포구는 도내 유통을 위한 포구였다. 만약 김만덕이 건입포에서 활동하였다면 김만덕이 육지를 오가는 무역인들을 상대하는 ‘객주’였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추가적으로 19세기 중엽까지 제주 도내에는 장시가 없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18~19세기 제주의 상업 실태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추가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4.4. 심노숭의 기록에 대하여

지난해 제주 기녀 만덕이 곡식을 내어 진휼하니 조정에서는 그녀를 예국(隸局)의 우두머리 종으로 삼고 금강산 유람까지 시켜주면서 말과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조정의 학사들로 하여금 그녀의 전(傳)을 짓도록 명하여 규장각의 여러 학사들을 시험하였다. 지난날 내가 제주에 있을 때 만덕의 얘기를 상세하게 들었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으니 이렇게 해서 가지고 있는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 되었다. 매번 쭉 늘어놓고 햇볕에 말릴 때면, 군의 기녀들조차도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육지에서 온 상인이 만덕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이가 잇달았더니 이리 하여 그녀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형제 가운데 음식을 구걸하는 이가 있었는데 돌아보지도 아니하다가 섬에 기근이 들자 곡식을 바치고 서울과 금강산 구경을 원한 것인데, 그녀의 말이 웅대하여 볼 만하다고 여겨 여러 학사들은 전을 지어 많이 칭송하였다. 내가 「계섬전」을 짓고 나서 다시 만덕의 일을 이와 같이 덧붙인다. 무릇 세상의 명과 실이 어긋나는 것이 이러한 것이 많음을 혼자 슬퍼하나니 계섬의 이른바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심노숭(沈魯崇),『효전산고(孝田散稿)』 권7, 「桂纖傳」, 학자원 영인본 3책, 1163-1164.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

만덕에 대한 당대의 기록 중 유독 심노숭의 기록만 결이 다르다. 채제공의 기록과 심노숭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정보의 원천이다. 심노숭은 1794년 제주를 방문하였기 때문에 제주 도민으로부터 직접 정보를 입수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반면 채제공은 만덕전에서 밝혔듯이 서울에 올라온 김만덕을 1~2차례 대면하고 당사자인 만덕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였다. 모든 사료는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구술 기록의 경우 구술자의 기억의 한계, 구술자의 의도 등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 즉, 채제공의 「만덕전」 역시 다른 사료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사료이다. 그러나 타 사료와의 교차검증 시 심노숭의 기록만 따로 노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2번째는 저술 이유다. 1796년 정조가 개최한 초계(抄啓文臣制)의 친시(親試) 주제 중 하나가 ‘만덕’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채제공을 비롯한 당대 집권층이 김만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에는 정조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반면 심노숭은 자발적으로 만덕의 이야기를 기술하였는데 『효전산고』 「계섬전」을 저술할 때 기생 계섬과 김만덕을 비교하기 위해서 만덕의 이야기를 짧게 인용하였다. 심노숭은 위에 소개된 내용을 끝으로 김만덕에 관한 이야기를 작성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파적으로 노론 소속이었던 심노숭이 정조와 채제공의 관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기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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