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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병학(金炳學)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8|조회수17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2. 생애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이 그의 숙부다. 철종비 철인왕후 김씨와는 사촌지간인 셈. 동생으로는 김병국이 있다. 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일원이었다. 세도가의 자제답게 1853년 급제한 이후 곧바로 대사헌과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막을 내렸음에도 대원군과의 친분 관계로 인해 동생 김병국과 함께 중용되어 186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이듬해 공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실록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을 편찬하고 찬집소총재관이 되어 대전회통을 완성하였다.

개화에 어느 정도 생각이 있었던 동생 김병국과 달리 대표적인 보수 척화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를 대원군에게 천거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게 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강화도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사망하기 직전에도 인천의 개항만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을 정도로 철저한 척화론자였다.

3. 당백전의 입안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고종 3년(1866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경복궁 중건을 위해 찍어낸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상평통보 최고액권이 당이전이었으니 갑자기 50배의 주화를 시장에 쏟아내게 되어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그 입안자가 바로 김병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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