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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홍대용(洪大容)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8|조회수40 목록 댓글 0

1. 개요

18세기 중반 조선의 관료, 교육자, 천문학자로 노론 북학파 실학자로 분류된다.

2. 생애

1731년 5월 12일 충청도 청주목 수심면 장명리(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장명마을)에서 목사(牧使)를 지낸 아버지 홍력(洪櫟)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론 사림의 으뜸으로 꼽히던 석실서원의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학문을 연마했으며 과학 탐구와 서양 문물에 관심이 있어, 무한 우주론과 지전설을 지지했고 대중에 설파하였다. 저서로는 《담헌서》, 《사서문의》, 《의산문답》, 《임하경륜》, 《건정필담》, 《주해수용》, 《을병연행록》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의 교분이 깊었고 박지원과 온갖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는데 박지원이 홍대용 사후에 직접 지은 홍덕보묘지명에 그 찬탄이 잘 나타나 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후세대 실학자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나경적과 함께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개량했다.

가야금과 거문고를 잘 타는 것으로도 유명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연경에 갔을 때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가톨릭 성당이었던 천주당 남당에 방문하여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본 적 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음률에 밝았으며, 양금을 최초로 조선에 들여온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775년 홍대용은 세자익위사의 시직으로 출사하여 젊은 세손을 보필하고 가르치는 자리를 1년간 맡게 되었다. '계방'으로 불리는 세자익위사(그래서 이 시절에 세손과의 문답을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서> 내부의 기록도 '계방일기'다)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는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시직은 종8품으로 품계는 낮지만 믿을만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들이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세자의 말동무도 하고 선생도 하는 까닭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요직에 발탁되기도 했다. 홍대용은 이후 외직만 돌았고 정조가 보위에 오른 이후 몇 년 안 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게도 중히 쓸 일은 없었다.

세손은 서연 자리에서 홍대용에게 연경의 풍속을 묻기도 하고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등 1년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의양이 홍대용을 고문으로 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홍대용의 막힘없는 대답을 보고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 만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관은 다른 편이었는데 격물치지와 실천을 중시하던 홍대용에 비해 "그게 중요한 것은 알지만 치국 평천하의 일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답한다거나 "강희제의 치세가 성군의 치세였다"라든지 연경의 번화함을 연경의 등으로 설명하는 홍대용에게 "조선 궁중에서 사용하던 등이 아름다웠다"며 응수하는 세손의 모습은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린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일화일지도 모른다.

3. 업적]

3.1. 홍대용의 사신 방문

1650년대의 조선인들은 공식적 사신 교류를 일본보다 더 빈번하게 진행하였음에도 청나라에 대해 한층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병자호란과 명, 청 왕조 교체 이후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지배한 숭명반청(崇明反凊) 이념 아래에서 만주족 왕조와의 사대 관계는 치욕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18세기 초부터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안정기에 이르며 양반 사신들은 문화 교류에 복귀하기 시작한다. 홍대용은 1720년 아버지 이이명의 수행원으로 북경에서 여행하며 유익한 문물을 탐문하고 조선에 도입하길 희망한 이기지(李器之)가 작성한 「일암연기」를 접하게 된다. 홍대용은 이기지가 반세기 전에 선보인 새로운 방식의 북경 여행을 훨씬 더 적극적, 창의적인 방식으로 재현했으며 나아가 널리 읽힌 그의 연행 기록을 통해 새로운 여행 실천을 양반 학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홍대용은 1765년 말 숙부가 북경으로 가는 연공사에 임명되자 사신단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했다. 그는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지만, 사행에 대한 기대와 함께 중국인들과 교류하기를 열망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던 초반 몇 주 동안 홍대용은 중국 지식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청에 대한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자신의 의관을 자주 활용하였다. 그는 다른 청나라 지식인 특히 엄성, 반정균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잘 배운 문인들은 그의 시각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향시 답안지를 교환하였다. 조선시기의 연행사와 통신사를 다룬 후마 스스무(夫馬進)에 따르면, 조선 양반 학자와 한족 학자 사이의 깊이 있는 인간적, 학술적 교류로는 알려진 것으로만 보자면 조선 시대 들어 홍대용이 사실상 첫 사례였다고 한다.

홍대용은 조선인이 머무는 곳에서 엄성, 반정균과 의관에 대한 대화를 한다. 이들은 조선인 주인과 함께 명, 청 교체기와 중국 역사에서 청의 지위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드러낸다. 특히 조선인 주인이 반정균과 엄성에게 만주족의 두발 모양, 의복, 모자, 명나라 이야기에 대한 아슬아슬한 질문을 하지만, 반정균은 이러한 질문에 신중하게 대답하고 청나라를 상찬했다.

엄성과의 또 다른 긴 대화에서 홍대용은 다시금 조선인의 복식 양식을 이용해 청을 비판하고 명을 애도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서의 중국은 금조나 원조의 통치 때보다 안 좋은 상황이며, 명에 대한 충성심을 당당히 드러낸다. 이에 대해 엄성은 1644년 청이 반란군을 쓰러뜨리고 정의를 수호해 바로 세워 정통성 있는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화 말미에 홍대용은 명이 부당하게 조선을 이용한 것과 달리, 청은 조선에 훨씬 관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홍대용은 한족 문인들이 정치적 의미에서 명의 정당한 계승자이자 문화적 의미에서 유교의 정통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홍대용은 조선인이 명나라 방식의 의관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근본적으로 여전히 “바다 위의 오랑캐(海上之夷人)”에 속한다고 인정한다. 그는 청이 조선의 눈에 아무리 야만적일지라도 문명화된 ‘중국’이며, 조선이 아무리 마음 속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오랑캐의 범주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홍대용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저술을 집필하며 개인 차원에서의 인식의 변화를 표출한다. 문인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청으로 넘어온 서양 과학 개념을 바탕으로 땅이 둥근 공 모양이라는 지구설, 그 지구가 하루에 한 번 자전하는 지전설, 우주가 무한하다는 무한우주론, 우주는 무한하므로 지구의 세계와 같은 여러 다른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다중우주 등을 주장하였다.

단, 이러한 주장들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고찰을 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홍대용의 핵심 의도는 바로 세계의 상대화였다. 중심이 없는 구, 심지어 무한히 펼쳐지며 우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 그 세계에서는 우리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통해 홍대용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을 비판했다. 청나라를 적대시하던 조선의 학자들, 심지어 중국으로 떠나기 이전의 자신까지 비판했던 것이다.

3.2. 학문적 노력

3.2.1.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 언급

홍대용은 특이하게도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외계인에 관한 상상은 친구였던 실학자 박지원의 글을 통해서도 남아있는데 1780년에 중국을 방문했던 박지원은 추석날 밤에 중국 학자들과 어울려 달 구경을 하면서 저 달 속에서 지구를 쳐다 보며 이야기 하고 있는 '달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달뿐만 아니라 다른 별에도 그 별의 조건에 맞는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이런 생각은 자기의 친구 홍대용의 주장이라 소개하고 있다. 천문에 조예가 깊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우주는 무한하다는 주장을 펼친 인물인 만큼,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상당히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이러한 면모 덕분에 그의 이름은 2001년, 한 소행성의 이름에 헌정되기도 했다.

3.3. 서양 악기 소개

1772년 6월 18일 오후 7시경, 담헌 홍대용의 저택인 유춘오(留春塢: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뜻)에는 홍대용의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홍대용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람들이 유럽의 바로크 고음악 악기인 덜시머와 하프시코드를 모방해 만든 악기인 양금(洋琴)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이날 연주회는 홍대용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양금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연주법을 몰랐던 홍대용은 수 년간 노력한 끝에 조선의 고유한 방식으로 양금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홍대용은 스스로 독주법을 터득한 맑고 청량한 타악기의 소리를 최초로 조선에 전했다. 홍대용이 중심이 된 '유춘오 악회'란 이름의 정기 음악회에서 서양 악기를 통한 음악을 처음 들은 청중들은 감탄했고 자리에 있었던 연암 박지원은 그때의 감동을 자신의 문집 <연암집>에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조선의 음악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해 국악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홍대용은 서양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악기인 양금뿐만 아니라 청나라 연경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즉석에서 연주해 천주교 신부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독학으로 혼천의를 만들기도 했던 홍대용으로서는 서양의 악기를 다루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절대음감을 소유한 음악인이자 거문고 연주자로도 정평이 난 홍대용이었기에 몇 번의 궁리 끝에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법을 터득했던 것이었다. 이때 김창즙의 아들이자 당대의 기인으로 유명했던 김용겸이 그 연주에 감동하여 홍대용에게 큰절을 했다고 한다.

4. 여담

한성부에 들어갈 때 홍대용은 말을 타고 당시 선진 문물이었던 선글라스(오수경)를 쓴 채 양금을 가지고 들어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의 양금은 남양 홍씨 가문에 대대로 전수되었는데 조선 말 대구도호부 사람인 서찬규가 홍대용의 고향인 천안군을 지날 적에 아주 청량하고 맑은 금속 악기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홍대용의 후손이 연주하던 하프시코드 소리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의외의 이야기지만, 한국인 최초로 천체망원경을 직접 구매하여 천문 관측에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숙부를 따라서 자제 군관 자격으로 연행사 사절단에 참여, 멀고 먼 여정 끝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홍대용은 소문으로만 듣던 동양 최고의 천문학이 집대성된 천주당 남당에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이전의 조선인 방문객들의 무례하고 언짢은 행언에 반감을 가졌던 천주당 남당 신부들은 미개하고 무례하단 이미지가 박힌 조선인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3차례의 선물을 통해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었고, 마지막 선물에 같이 붙여 보낸 진심 어린 편지를 보내고 나서야 신부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마침내 공식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으나, 천문은 천자의 영역이었던 탓에 함부로 관여했다간 역모죄로 연행되어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천주당 남당 신부들은 청나라의 천문 연구 기관인 천문감 관료를 겸직하였던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기대를 하였던 홍대용은 비교적 보안 순위에서 매우 밀리는 천체망원경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러한 소극적인 접대에도 불구하고 천체망원경의 장점, 즉 멀리 있는 천체를 비교적 더 선명하게 확대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북경에서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민 없이 천체망원경을 구매하였다.

젊은 시절에 예송논쟁을 벌인 송시열을 비판하는 글을 지어 스승 김원행과 사이가 소원해진 적이 있다.

현대 기준으로하면 인싸성향의 선비였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당대 서얼 출신이지만 능력은 출중했던 이들이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과거에 못 붙은, 백수였던 박지원 등과 친밀한 관계였는데 이들보다 나이가 10살가량 많아 모임 중에서도 고문의 역할이었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이서구(李書九) 원중거(元重擧), 백동수, 성대중, 이희관(李羲觀), 윤가기(尹可基) 등이 이 모임에 어울렸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에는 백탑파, 혹은 북학파로 불리는 학자들이다. 다만 홍대용은 천안에 살고 다른 이들은 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인근에 살았기 때문에 실제 좌장은 박지원이었다. 하여튼 이들은 '백탑동인'이라는 일종의 동호회를 결성하여, 사람들과 자주 만나 시문과 학문에 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주위에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의 글을 소위 검서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의 시는 형식주의에 빠진 당시의 시와는 달리 간결한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들이 나중에 검서관이 되었으므로 검서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 성향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도 드러났는데, 청나라 고위관료였던 서성맹이 청나라 관료를 업신여기는 조선 관료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 궁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억압했을 때 홍대용이 나서서 직접 대면하여 정중하게 대하자 서성맹은 인품에 감격하여 흔쾌히 궁 밖을 나가 사신단이 성 내부를 유람하는 것에 대해서 허용했다고 한다. 인품이 어찌나 훌륭했는지 유람 중에 만난, 청나라 선비였던 엄성과 반정균이란 인물은 홍대용을 두고 "중국에서조차 얻지 못한 진정한 친구를 조선에서 만나게 되었다."라고 평했다. 엄성과도 우연히 만난 이후로 급격히 친해져 그의 집에 초대까지 되었는데 엄성의 아들인 엄앙은 어린 시절 홍대용을 만났을 때의 인상이 워낙 깊었는지 홍대용을 '큰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누구든 만나면 금방 친밀해지는 탓에 임용한과 같은 역사학자는 우스갯소리로 그의 친화력은 '미스터리' 같다고 평한다. 홍대용은 우연히 청나라 친구들을 만났던 일화를 <회우기>라는 책으로 기록하였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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