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건축가
2. 생애
예문관 대제학과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시를 잘 지은 것으로 유명했던 문정공 교은 정이오와 안동 권씨의 외동아들이다. 부인으로는 정인지의 누나인 하동 정씨와 원주 변씨가 있었으며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장릉배식록의 삼상신 중 하나다.
음서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는 공조참판과 호조판서를 거쳐 우찬성까지 진급했다. 문종 때는 좌찬성이 되었고 문종이 붕어한 뒤에는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단종을 보필했다. 남지가 병으로 사직하자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우의정에까지 오른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신임에도 토목에 조예가 깊어 토목 공사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우의정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공사를 지휘하러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신료들이 채신머리에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공사를 할 때 크게 했다고 한다. 숭례문을 개축했고 서산의 해미읍성도 그의 작품이며 그 외에 세종~문종조의 건축이나 토목 공사는 정분과 민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강직한 김종서보다는 성격이 원만한 황보인과 비슷했던 인물로 김종서와 뜻을 같이했으나 그의 독단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약간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계유정난 직전 하삼도의 도체찰사로 나갈 때는 단종이 친히 배웅하고 도성의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후 부임지에서 돌아오던 중에 유배를 당했고 수양대군에게 먼저 포섭된 처남 정인지의 거듭되는 회유를 모두 뿌리친 끝에 교형에 처해졌다.
숙종 때 황보인, 김종서와 같이 벼슬이 환원되었고, 영조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는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는 그와 그의 양아들인 정지산을 함께 모신 정려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3. 후손
후사는 사촌형인 홍주목사 정효안(鄭孝安)에게 당부하여 정효안의 장남이자 자신의 5촌 조카인 정지산(鄭之産)이 봉사손이 되어 이었고 도망가서 미친 척하며 숨어 산 아들이라는 정광로(鄭光露)의 후손이 나중에 나타나 묘의 지석을 근거로 같이 복권됐다. 복권 이전부터 봉사손의 후손인 공주계는 채제공 계열의 근기남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나중에 나타난 후손 계통인 광양계의 이야기가 노론과 영조의 입맛에 맞았기에 두 집안의 송사는 당시부터
후손 중 근현대 유명인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정세권, 대법관 정기승 등이 있다.
4. 여담
영의정이었던 황보 인이나 6진 개척 등으로 널리 알려진 김종서보다 인지도는 낮은데 조선 초기를 다루는 대체 역사물에서는 토목과 건축의 전문가라는 특성상 거의 빠짐없이 등장해서 장영실, 정인지와 함께 영고 라인으로 갈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