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 남작처럼 학식이 높고 덕망 있는 분이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귀의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 1914년 11월 1일 선종 포교장 백용성의 평가
구한말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1835년 3월 19일 공조판서를 지냈던 김온순의 아들으로 태어났다. 양 외조카로 서재필이 있으며 잠시 서재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61년 (철종 1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1872년 성균관 대사성,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874년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1879년부터 높은 관직을 거쳐 1883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 복귀해 이조참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1886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공조, 형조, 이조, 예조 등의 장관직을 두루 거쳤다. 1894년 (고종 31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민심 수습과 사태 진압을 담당했다.
1894년 개화파 정권이 성립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4년 후 궁내부 특진관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900년에는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 이후 의정부찬정, 홍문관 학사를 지냈다.
1900년, 을미사변 당시 군부대신인 안경수를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고 일본으로 도주한 유길준, 박영효 등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3년 탁지부 대신이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보유한 백여 명의 하인 중 하인 몇 개와 돈의 일부를 기부하였다. 서예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유작으로 사공도의 '시품'이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보물로 소장되어 있다.
1910년 10월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가 수여되었다. 1919년 11월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작위는 손자 김호규에게 습작되었다.
3. 기타
글씨를 잘 써서 현판이나 서예를 많이 남겼다.
과거에 아들 2명을 일찍 잃었다고 한다.
외국산이 희귀했던 당시에도 파텍 필립사의 회중시계를 보유했다고 한다.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는데 현재 서울대학교를 나온 것과 동일한 수재였다. 백성(국민)들을 매우 멸시하였다.
1907년 02월 27일,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해 1일화 100원을 의연한 적이 있다.
1911년 혹은 1912년에 치아 뿌리와 그 주변에서 사리(舍利) 3개가 나오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1914년 11월 1일, 그의 인사동 자택과 인접한 곳에 있는 선종 중앙포교당에서, 수불 봉안식이 거행되었다. 그 수불은 그의 집 안채에 임시로 모셔졌던 이 수불인데 자수는 선종 신도인 안제(安濟)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그날 그는 당시 선종 포교장이었던 백용성에게 집 앞뜰에 있는 삼나무 가지 하나가 자연스럽게 원형의 연꽃 자리(방석) 모양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궁금하여 물었는데 백용성은 "이는 불법에 귀의한 공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답하자, 이에 그는 감복하여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봉안식 당일, 식장에는 수많은 남녀 신도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는데 김성근과 포교장 백용성을 비롯하여 아베(阿部) 본사 사장과 이해창(李海昌)의 어머니도 참석했고, 의식은 풍경 소리와 연주 속에 찬불가를 합창하며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며, 백용성의 기념 법문이 이어졌다. 백용성은 법문에서 "김 남작처럼 학식이 높고 덕망 있는 분이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귀의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라며 찬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