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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수(金睟)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9|조회수15 목록 댓글 0

1. 개요

1547년(명종 2) ~ 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구 안동(舊 安東),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시호는 소의(昭懿).

2. 생애

1547년(명종 2) 사재감 정(司宰監正:정3품)을 지낸 아버지 김홍도(金弘度)와 어머니 한산 이씨 진사 이계백(李繼伯)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2등 16위로 입격하고 1573년(선조 6) 알성시 문과에 병과 1위,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

선조 때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왕명을 받고 경상우도 관찰사(종2품)으로 부임해 경상우도 도내의 진주성 등 성 11채를 보수하는 등 전쟁 대비에 힘썼다. 그러나 서원과 향교에 있는 유생들까지 동원하여 군사훈련과 축성하는 바람에 지방 사족들과 평민들이 반발하여 도중에 중단했다.

그 뒤, 여러 차례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활동을 이어나간다. 김수는 조정에서 활동하며 전시의 재정 관리와 군량 확보에 주력했고 종전 후에는 정 1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오르는 등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손자 김비(金祕)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는 등 말년이 썩 좋지는 않았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재무 능력이 출중하고 청백리란 긍정적 평가를 받던 인물이다.

또한, 왜군에게 투항하여 순왜가 되었다는 의심받는 부산진 전투의 정발과 동래성 전투의 송상현을 끝까지 변호하였고, 이는 훗날 두 사람이 명예회복에 성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부정적 평가에서 언급된 곽재우와의 갈등도 애초에 지방토호가 개인 사병을 갖는 것에 병적으로 경계하던 조선에서는 군벌이 될 수 있는 의병에 경계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다. 병화를 대비하고자 김수가 축성을 하고 시험 난이도를 높혀 유생들도 군사 훈련을 받게 만든 일 때문에 수많은 사대부와 백성들이 반발해서 유야무야된 사건의 경우, 이러한 조치가 혹독하다고 보일 수는 있으나, 김수는 경상도의 전쟁 대비 수준을 8도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끌어 올렸다.

거기다 전쟁 초기의 패배와 도주 행위에 김수도 할 말은 있다. 조선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병력이 기습을 해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이를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초, 부산진 · 동래 · 상주 · 탄금대 · 용인 등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주한 장수와 지방관들도 상당수 존재했으며 도주한 이들도 김수처럼 조정의 명을 받들거나 할 수 있는 선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행태가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자들은 처벌하되, 도주했더라도 나름대로 의무를 다하려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만회할 기회를 주었다.

3.2. 부정적 평가

전쟁 대비를 목적으로 시험 난이도를 높여 시험에 탈락한 유생들까지 성곽 수리와 군사 훈련에 동원한 탓에 곽재우 등 지방 유림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자 적병을 피해 도망만 다녔다고 비판받았다. 또한 곽재우 같은 의병들과도 불화가 심해 눈총을 샀다.

게다가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도민들이 그를 싫어했으며, 파천 중이던 선조에게까지 이 사안이 보고되어 조정에서 그를 체직하거나 권한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4. 최종적 평가

뛰어난 행정 · 재무 관료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로서 전쟁 대비를 착실히 잘해내고 전시의 혼란 속에 무너진 행정 체계를 복원하는 등 후방에서의 행정과 군수 물자 관리 분야에서는 좋은 실적을 보여 주었지만, 전시에는 급변하는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한 데다 보신주의적이고 속 좁은 행태를 보여 의병과 도민들의 인심을 잃는 등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 할만하다.

서울신문의 서동철 논설위원은 김수는 영웅은 아니지만, 역사책에 합당한 자리는 마련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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