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정치인, 작가.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 시초이다.
2. 생애
김일손은 1486년 문과에서 2등을 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이는 후술할 이극돈과의 첫 악연이었다. 사림파의 거두였던 김종직의 수려한 문장을 빼닮은 김일손의 문장을 알아 본 훈구파 이극돈은 당시 출제와 채점을 담당하는 시관(試官)이었는데, 당시 윤필상·유지 등의 시관은 김일손에게 1등을 주자고 했으나 이극돈만이 반대하였다. 김일손은 이후 홍문관,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조선시대 엘리트 관원들이 역임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김일손은 일찍이 스승으로 섬긴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사림파 중의 1명으로 무오사화의 희생양이었던 그는 이극돈과 두 번째 악연을 맺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평하며, 김일손의 이조전랑 추천을 여러 차례 반대하였던 것이다. 무오사화의 단초가 되었던 사초논란 또한 당시 실록청의 당상이었던 이극돈이 자신에 관한 부정평가를 사초에서 지워달라고 김일손에게 요청한 것이 발단이었다.
다만 자세히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에 위치한 일련의 사건들은 진짜 부정함을 숨기거나 은폐하려고 이극돈이 벌인 악행이라기 보다는, 자기 계파 아니면 모함을 해서라도 다 공격하고 보던 사림의 전통적인 단점을 극대화하여 이은 김일손이 원인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애초에 이극돈이 삭제를 요청한 기록은 증거나 수사 기록도 없는, 카더라 수준의 글이었기에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오사화의 결정적인 증거자료가 됐던 조의제문은 당시 시선으로 보든 지금 해석으로 보든 간에 세조의 혈통 전부를 반역자라고 매도하는 글이라는 게 중론이다. 설령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 그럴 의도로 쓴 글이 아니라는 일부 의견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김일손 본인이 그런 의도로 이 글을 써먹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조차 없다. 게다가 조의제문 말고도 김일손의 저술은 제대로 된 근거도 없는 뜬소문에 가까운 내용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김일손 본인이 작정하고 악의적으로 왜곡한 내용마저 존재했다. 즉, 희생양이라고 미화되고는 있지만 실상은 없는 죄를 뒤집어 쓴 것조차 아니다. 이런점 때문에 중종반정 이후 갑자사화 관련자들의 신원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 반면 김일손 김종직등 무오사화 관련자들의 신원은 몇 년 이상 지리하게 끌다가 종국에는 성종도 조의제문을 알고 있었다는 거짓말까지 해서야 겨우 신원을 받는다.
연산군 때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성종 재위시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썼던 사초(史草)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김일손을 비롯한 신진 세력인 사림파(士林派)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는데 《연산군일기》는 이 과정을 생중계하듯이 낱낱이 적어서 후세에 전했다.
3. 기타
김해 김씨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고등 문관에 진출하는 일이 드물어지게 된다. 기술직이나 중인층에서는 조선 후기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그림 부문에서 단원 김홍도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일손은 정실 부인으로부터는 친자식이 전혀 없었고, 대신 첩으로부터 아들 둘을 얻었으나, 전부 효수되었다. 김일손이 34세의 나이에 친자식 없이 죽었으므로 그의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김대장(金大壯)은 두 아들을 뒀는데, 장남은 김갱(金鏗), 차남은 김장(金鏘)이다. 무오사화 때 김일손의 친척들도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유배를 가게 됐는데, 김대장은 그의 형 김대유(金大有)와 함께 남원부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장남 김갱(金鏗)은 고향 청도로 돌아갔으나 차남 김장(金鏗)은 아버지 묘소를 돌보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북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김갱은 자식이 없이 죽었으나 김장의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김장(金鏗)의 후손들로는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 정치인 김무성 등이 있다.
중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었고, 순조 대에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하는데, 실제 그가 사용했던 거문고(탁영금)이 보물로 지정되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