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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김효원(金孝元)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9|조회수1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본관은 선산

2. 생애

이황, 조식의 문인이었으며 명종 말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564년 진사가 되었다가 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72년 이조전랑에 추천되었으나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이 반대하는 바람에 거부당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외척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을 추천했다. 이를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김효원 측의 동인과 심의겸 측의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를 보면 이후에는 동서 분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을 후회하고, 심의겸과도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효원(金孝元)이 졸하였다. 효원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로서 전례대로 자급을 올려 영흥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지나서 고을에서 졸하였다. 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 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 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랴.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그의 부친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있었는데 늘 문안갈 적마다 개성을 거쳐가게 되었다. 그런데 심의겸(沈義謙)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매우 다정스럽게 그를 영접하여 주자 효원도 그곳에서 하루 이틀 묵어가며 친구인 것처럼 즐겁게 지냈다. 그 후 효원이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하여 관아에 좌기(坐起)했을 때 의겸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친구를 잃었구나.’ 하고, 이틀간 좌기를 파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아마도 깊이 후회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 4월 1일 임신 11번째기사, 영흥 부사 김효원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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