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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한확(韓確)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33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조선 왕실과 명나라 황실의 외척이다.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부친이며, 강혜장숙여비·공신부인와 남매 관계이다. 양국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성종의 외조부이므로, 성종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10대 연산군~27대 순종)은 모두 한확의 후손이다.

2. 생애

'삼한갑족'이라 불렸던 전근대 한반도의 명가 중에서도 대성이었던 청주 한씨의 자손으로, 아버지가 의정부 영의정 서성부원군을 추증받은 한영정이었다. 가문의 명성 덕분에 이미 어린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종7품 부사정에 올랐다.

당시 명나라가 후궁으로 들여보낼 공녀를 바치라는 요구를 조선에 해오자, 1차로 공녀들을 보냈으나 명나라 영락제는 미모가 없는 여자들만 골라보냈다며 다시 미모의 여자들을 골라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2차 선발에선 심혈을 기울인 결과 한확의 누나 한씨를 비롯해 3명의 여자가 선발되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녀가 떠나던 날 길가의 모든 이가 슬퍼하며 울었다고.

그리고 그 공녀로 바쳐진 누나가 바로 명나라 제3대 황제였던 성조 영락제 주체의 후궁 강혜장숙여비 한씨였다. 미색도 뛰어났지만 영락제의 비위를 잘 맞췄던 그녀는 총애를 받아 곧 비(妃)로 책봉되었고, 그 총애는 동생인 한확에까지 미쳤다. 이때부터 한확의 입지는 그야말로 언터쳐블이 되는데, 역시 공녀로 뽑혀 명나라로 가던 황씨가 이미 외간 남자와 사통해 임신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조선 사신단의 목숨은 물론 조명관계마저 위태로워질 지경이었으나 한씨 남매가 대노한 영락제를 달래어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확은 작게는 단신으로 황씨 일가와 진헌색 관리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고, 크게는 조선의 대명 외교 참사를 수습한 것이었다. 이후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수시로 그를 영접하여 현안을 논의했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영락제는 한술 더 떠 한확을 아예 정5품 봉의대부 광록시 소경에 봉하면서 조선의 신하임과 동시에 명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그의 잘생긴 외모에도 호감을 가져 심지어 부마로 삼으려고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은 그의 외모를 가리켜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번역하자면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당대의 미남이었던 듯.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던 영락제는 곧 쇠약해졌고, 여비 한씨가 중국 역사상 희대의 궁중 암투인 어여의 난에 휘말리면서 유폐되더니 곧 죽어버린 영락제의 장릉에 순장되고 말았다. 단순히 외모가 뛰어나단 이유로 20대의 어린 나이에 정든 조국과 가족을 떠나 말도 안 통하는 명나라에 바쳐졌던 한확의 누나는 겨우 24살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죽을 때의 일화는 더욱 슬픈데 죽기 직전 여비 한씨는

"어머니, 저는 갑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라고 울었지만, 도중에 집행관이 그녀의 목을 매달아 유언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확의 권세는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으로 끈 떨어진 연이 되나 싶었으나...

영락제의 뒤를 이은 인종 홍희제가 일찍 죽고, 그 다음 선종 선덕제가 즉위했을 때 조선 출신의 환관들이 여비 한씨의 막내 여동생인 한계란이 그녀만큼 절색이라고 운을 띄우자 이번엔 아예 한확의 막내 여동생을 공녀로 바치라고 딱 꼬집어서 지명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확은 누나의 비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얼씨구나 하며 그에 응했다. 1427년 5월 1일과 1428년 10월 4일 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장차 공녀로 바치기 위해 혼기가 지난 누이를 시집보내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누이를 슬피 여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도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보아 명나라에서의 지명도 있었겠지만, 한확 본인이 권력을 위해 누나에 이어 여동생마저 명나라에게 '진상'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한확의 여동생 한씨는 절망하여 앓아누운 상태였는데 오라버니 한확이 약을 지어오자

"이미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지극하거늘 나까지 팔아 호사를 누리려는가?"

라며 울었다고 한다. 여동생 한씨 입장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들어버린 언니의 죽음을 보고도 기어코 자신마저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 버리려는 오라버니 한확이 원망스러웠던 듯하다. 자신이 공녀로 바쳐진다는 소리를 듣자 애지중지했던 혼수를 칼로 찢고 패물을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시름시름 앓아 예정된 시기보다 1년 늦게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한씨가 명나라로 떠나던 날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녀를 태운 가마가 명나라로 향하자, 이를 본 사람들은

"언니가 생매장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번엔 동생이 산송장이 되어 떠나는구나''

라며 비통해했다고 한다. 명나라로 떠나는 한씨의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비극적으로 죽었던 언니와는 달리 남편인 선덕제 사후에도 살아 남았으며, 영종 정통제가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에게 포로로 잡히고(토목의 변) 그의 동생이었던 대종 경태제가 황제가 되면서 폐태자가 되어 버린 정통제의 3살배기 어린 아들을 거두어 애지중지 보살피며 지냈는데... 8년 후 다시 정통제가 복귀하는 데 성공했고(탈문의 변) 특히 그 폐태자가 복권되어 천자인 헌종 성화제로 즉위하면서 황실에 크게 기여한 웃어른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녀의 입지 덕분에 오라비 한확뿐만 아니라 그 아래의 조카들까지 명나라를 왕래하며 호화롭게 지냈다고 한다. 이 한씨는 성화 연간 19년까지 천수를 누리고, 죽은 후에는 공신부인에 봉해졌다.

이처럼 한확은 누나와 여동생을 희생시키고 조선 정계의 초대형 거물이 되었다. 특히 여동생은 명나라 황제들의 총애와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권세도 막강해졌다. 심지어 궁중의 궁녀와 통정하는 죄를 지었다가 발각되었는데도 세종조차

"이 사람은 (죄를 지어도) 내가 벌 줄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미 누나를 공녀로 바치고 돌아왔을 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려 한성판윤에 도관찰사, 장군절제사, 이조판서, 찬성, 의정에 이르기까지 고위직을 두루 해먹었으며, 간통 혐의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왕이 처벌을 거부해서(...)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보고

"누이들을 팔아 권세를 누리는 구나."

라며 욕을 했다고.

이후 세조의 사돈이었던 만큼 계유정난에도 적극 협조하였고, 그 공적으로 우의정에 봉해졌다. 세조의 왕위 찬탈 직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로비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하고 귀국하던 중 객사했다.

그러나 한확이 단순히 명나라 빽만 믿고 안하무인하게 군 한량이었다면 언젠가 몰락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한확은 능력도 출중한 중요한 인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외척관계를 빼고도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한 조선의 대중국 외교통이자 로비스트이기도 했으며, 선위사로서 조선을 대표해 황제 알현이나 사신 접대 업무를 수시로 도맡아 해서 환관 출신인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초기의 조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고작 20살의 나이에 하연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태종 이래 추진했던 황금과 은의 조공을 면제받기도 했고, 공녀 차출도 없어졌다. 이런 인재를 고작 여자 관계 따위로 날려버렸다간 명에서 어떤 후폭풍이 불어 닥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인정을 받아내어 정통성 없는 세조의 즉위를 완성시켰을 만큼 트러블은 일으킬지언정 외교 면에서 엄청난 능력을 가진 한확을 가능한 만큼 써먹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세종과 세조가 한확의 딸들을 며느리로 삼은 것에는 이러한 사실도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한 명은 세종의 서자였던 계양군의 아내였고, 다른 한 명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였다. 한확의 3남이었던 한치례(韓致禮)는 세종의 적녀였던 정의공주의 차녀와 혼인했고 한확의 뒤를 이어 작은 고모 빽으로 중국에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다.

묘지는 능내역 인근에 있다.

3. 가계

3.1. 친가(청주 한씨)

증조부: 서원군(西原君) 한방신(韓方信)

조부: 한영(韓寧)

아버지: 한영정(韓永矴)

어머니: 의성 김씨 김영렬(金英烈)의 딸

누나: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

매형: 영락제(永樂帝) - 명 제3대 황제

남동생: 한전(韓磌)

제수: 평산 신씨 신정리(申丁理)의 딸

여동생: 공신부인(恭愼夫人)

매부: 선덕제(宣德帝) - 명 제5대 황제

남동생: 한절(韓石+失)

제수: 한양 조씨 조서(趙敍)의 딸

조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한치형(韓致亨)

3.2. 배우자 / 자녀

정실: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적장남: 한치인(韓致仁)

며느리: 배천 조씨 조서안(趙瑞安)의 딸

적장녀: 성주 이씨 이계녕(李繼寧)의 처

적차녀: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

사위: 계양군(桂陽君)

적3녀: 구 안동 김씨 김자완(金自琓)

적4녀: 최정(崔侹)의 처

적5녀: 안동 권씨 권집(權輯)의 처

적6녀: 소혜왕후(昭惠王后)

사위:(추존)덕종(德宗) 이장(李暲)

외손자: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외손녀: 명숙공주(明淑公主)

외손자: 성종(成宗) 이혈(李娎)

적차남: 한치의(韓致義)

며느리: 전의 이씨 이항전(李恒全)의 딸

적3남: 한치례(韓致禮)

며느리: 죽산 안씨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정의공주의 딸

첩: 성씨 미상

서장남: 한유산(韓榴山)

서차남: 한유산(韓柚山)

서3남: 한감산(韓柑山)

서4남: 한시산(韓枾山)

서5남: 한이산(韓梨山)

서6남: 한도산(韓桃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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