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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류사원(柳思瑗)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9|조회수20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해 성사시킨 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문흥군(文興君)에 봉해졌다.

2. 생애

증조부는 조산만호(造山萬戶) 류승적(柳承績)이고, 조부는 증좌승지 류유(柳濡)이며, 아버지는 강화부경력 류질(柳秩)이고, 어머니 진주 류씨는 첨사 류저(柳渚)의 딸이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3등 58위로 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뒤이어 식년시 2등 24위로 급제해 진사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년) 식년시 을과 7위로 급제해 조정에 발탁되었다.

류사원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최초의 기록은 1593년(선조 26년) 2월 18일 평안도 도사로 직무를 수행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정은 명나라군이 조속히 압록강을 건너와서 조선군과 합세하길 희망하고 있었는데, 승정원은 평안도 도사 류사원으로 하여금 가서 명군의 도강(渡江)이 끝났는가를 탐지하도록 했다. 류사원은 "대장이 이미 도강했습니다."라고 회보했지만, 전관 이종일(李宗一)이 돌아와 대장이 지금까지 도강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595년(선조 28년) 8월 28일 호조정랑에 제수되었으며, 10월 25일 명나라군에게 식량을 제공하고자 충청도 아산창(牙山倉)의 미수 전세(田稅)를 상납하도록 독촉하는 임무를 맡았다. 1596년(선조 29년) 10월 4일 장령(掌令)에 제수되었고, 그 해 10월 11일 장령 윤형(尹泂), 집의 김시헌(金時獻), 지평 이형욱(李馨郁)·김대래(金大來)와 함께 수산군(守山君) 이지(李智)가 공로를 지어내서 상을 받으려 들었으니 개정해야 하며, 강진 현감 나대용이 "사람됨이 간교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주제넘으며 술과 떡 같은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명성을 구하고 남의 말[馬]을 약탈하여 뇌물로 썼고, 사신이 바다를 건널 때에는 수호용 선박을 배정하는 것이 전례인데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선조는 나대용의 파직은 받아들였지만, 수산군 이지에 대해서는 처벌을 거부했다.

1596년(선조 29년) 11월12일 명나라에 원군을 추가로 보내달라고 청원하는 사절단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고급청병주문사(告急請兵奏聞使) 정기원을 보좌했다. 이후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맡았으나, 1597년(선조 30년) 4월 26일 사헌부 지평 남이신(南以信) 등에게 조운(漕運)하여 봉납(捧納)하는 때를 당하여 10일 중 7일을 출사하지 않은 태만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당했다. 그해 6월 12일 장례원 판결사로 제수되었다. 이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말값으로 은 9천 9백 46냥을 받았지만, 선조는 중국 조정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을 우려하여 중국 사신이 도로 가져가게 했다.

1601년(선조 34년) 4월 1일 고성군수에 제수되었다. 이때 사관은 유사원에 대해 사론을 달았다.

류사원과 민선(閔善)은 이항복의 매부(妹夫)인데, 류사원은 동론(東論)이 되고 민선은 서론(西論)이 되었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동론, 동론 하지만 류사원을 말하겠으며, 서론, 서론 하지만 민선을 말하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위인이 용렬하여 동(東)·서(西)에 별다른 영향력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1일자 기사.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해 성사시킨 공으로 선무 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10월 29일에 정기원, 권협,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무의공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과 함께 선무공신 3등으로서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한 자급 초천했으며,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했다. 또한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받았다.

1605년(선조 38년) 5월 11일,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 이때 사관은 류사원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본디 명망이 없었는데, 단지 청병(請兵)한 공훈만으로 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선조실록 187권, 선조 38년 5월 11일자 기사.

선조 39년(1606년) 10월 14일, 행 상호군 민몽룡(閔夢龍)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한 공으로 가자받은 것에 대해 도로 거두어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는 "황제의 은혜가 망극한데 이것은 사신의 정성에 말미암은 것이니 경들이 나라를 위하여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은 것을 가상히 여긴다. 사양하지 말라."고 답했다.

1608년 6월 14일에 자택에서 사망했고, 고양군 아연리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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