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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박사우(朴思愚)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0|조회수10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태인(泰仁)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꼽히는 아곡(莪谷) 박수량의 아들로 태어나, 1546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청빈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 극단적인 가난을 뼈저리게 원망하여 지방관 시절 탐관오리로 전락, 결국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인물이다.

훗날 그의 고향 향토 사료에서는 그를 '아버지를 닮은 청렴결백한 관리'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는 청백리 가문의 수치를 덮기 위해 후손들이 꾸며낸 기록 세탁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2. 생애 및 관직 이력

아버지 박수량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 등 중앙의 고위 요직을 두루 거치던 1546년(명종 1년), 병오(丙午) 식년시 진사시(進士試)에 3등 58위로 합격하였다.

이후 정식 문과에 급제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당하관)에 이르렀으며, 이후 진안 현감(鎭安縣監) 등 주로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외직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공식 국가 기록인 관찬 사료와, 후대 문중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향토 사료를 비교해 보면 박사우라는 인물에 대한 가문의 '기록 세탁' 정황을 엿볼 수 있다.

2.1. 선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6년(1573년) 9월 19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진안 현감이었던 박사우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사헌부가 올린 탄핵 사유는 다음과 같다.

진안 현감 박사우(朴思愚)는 아비의 청빈(淸貧)을 원망하여 탐욕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사물(私物)을 많이 만들었으니, 파직시키소서.

이는 그가 조선 시대 최고의 청백리로 사후 백비(白碑)까지 하사받은 아버지 박수량의 명예를 이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명예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빈곤을 원망하며 타락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는 지방관의 권력을 이용해 백성을 쥐어짜고 부정 축재를 일삼다 결국 선조의 명으로 벼슬길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2.2. 장성읍지

반면, 그로부터 약 350여 년이 흐른 뒤인 1927년에 편찬된 고향의 지역 사료 『장성읍지(長城邑誌)』에서는 그를 정반대의 훌륭한 인물로 포장하고 있다.

朴思愚 號淸節堂 莪谷守良子 丙午進士 出宰鎭安 有治積 遭喪 廬墓三年 性廉勤無私 故名堂

박사우는 호가 청절당(淸節堂)이다. 아곡 박수량의 아들로 병오년 진사가 되었다. 진안 현감으로 나가 다스림에 업적이 있었다. 상을 당하자 여묘살이 3년을 하였고, 성품이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사로움이 없었으므로 당호(호)를 그렇게 지은 것이다.

실록에 명시된 '탐관오리로 파직된 진안 현감' 시절에 대해, 읍지에서는 노골적으로 '선정을 베풀어 업적이 있었다(有治積)'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나아가 성품마저 '청렴하고 사사로움이 없다(廉勤無私)'며 '청절당(맑고 절개 있는 집)'이라는 호까지 붙여 칭송하고 있다.

조선 후기와 근대의 향토 읍지는 해당 지역 유력 가문(문중)의 자료 제출과 입김에 의해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위대한 청백리 조상(박수량)의 얼굴에 먹칠을 한 아들의 치부를 어떻게든 숨기고 미화하려 했던 태인 박씨 문중의 '명예 회복' 시도로 보는 것이 역사학적으로 타당하다.

3. 가족 관계

박사우가 탐관오리로 탄핵당해 파직된 사건은 가문의 위상에 치명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방증하듯, 정통 관료(문과)의 길을 걷던 가문의 계보는 그의 세대를 기점으로 잡과로 급격히 방향을 틀게 된다.

아버지: 박수량(朴守良)

한성판윤, 우참찬 등을 지낸 조선 중기 대표적 청백리

동생: 박사로(朴思魯)

형인 박사우의 진사시 방목 기록 중 안항(鴈行, 형제 관계)에 기재되어 있다.

형제(서자 추정): 박평(朴平)

박사우가 파직된 지 3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잡과인 의과(醫科)에 합격하여 혜민서 참봉 등을 지낸 의학 전문가가 되었다. 잡과에 응시한 것으로 보아 서얼로 추정된다.

아들: 박성남(朴成男)

박사우의 아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문과와 사마시를 거친 것과 달리, 아버지가 탄핵으로 몰락하기 직전인 1570년(선조 3년)에 기술직인 음양과(陰陽科)에 급제하여 천문·지리 분야 기술관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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