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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박상의(朴尙義)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0|조회수25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지관(풍수지리 전문가). 이의신(李懿信)과 함께 당대 최고의 풍수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청백리 박수량의 종손(從孫)이기도 하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 초기에 걸쳐 왕실의 능지(陵地) 선정과 궁궐 영건(營建) 등 국가의 중요한 공간 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초기에는 사대부들에게 "글도 모르는 무식한 기술자"라거나 "술법이 괴이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견제당했으나, 특유의 현장 중심적인 안목과 실력으로 국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기술직으로는 이례적으로 동반직(문관직)을 제수받았다.

그의 생전에는 명나라의 풍수 전문가들과 대립하거나 실패한 예언(이호민 묘역 침수 사건 등)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조선 후기(영조~철종 연간)에 이르러서는 "무학대사와 비견되는 신안(神眼)"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재평가되었다. 특히 그가 그토록 주장했던 건원릉(동구릉) 내의 명당론은 후대 왕릉 선정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250년에 걸쳐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조선 풍수지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출신 배경

박상의는 태인 박씨의 일원으로,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일대에 세거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어모장군 박사순(朴士珣)이며, 그의 종조부(작은할아버지)는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다.

종조부 박수량이 30년간 판서와 참찬을 지내면서도 집 한 채 없을 만큼 청렴한 성리학자 관료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달리, 박상의는 성리학 대신 천문·지리·기문둔갑 등을 다루는 상수학(象數學)에 깊이 심취하며 비주류 학문의 길을 택하였다. 당대 사람들이 그를 북송의 학자 소강절에 비유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황윤석의 《이재유고(頤齋遺藁)》에 전한다.[이재유고]

3. 생애

3.1. 초기 생애

공식적인 관직에 오르기 전의 일화는 황윤석의 개인 문집 《이재유고》에 자세히 전해진다. 박상의는 젊은 시절부터 "술법이 괴이하다"며 주류 사대부들에게 이단아 취급을 받았으나, 그 특이한 학문적 배경이 오히려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예언자적 명성을 만들어 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임진왜란 발발 전 "푸른 옷을 입은 적(靑衣賊)이 도성의 동문이나 남소문으로 들어올 것"이라며 왜란을 예언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의 경리 양호(楊鎬)가 조선에 파병을 왔을 때 그의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군사(軍師)로 예우하며 군사 기밀을 논의했다고 한다. 박상의는 출진 전 "이로움도 없겠지만 패배도 없을 것"이라 예언했고,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외성을 파괴했으나 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나며 그 예언이 맞았다고 전해진다.[이재유고]

이 같은 활동으로 1594년(선조 27년, 갑오) 정월, 임진왜란 중 조정이 왕명으로 "명유이며 상수에 밝은 자"를 특별 선발하여 6품직을 직수(直授)하는 절차에서 관상감(觀象監) 겸 교수(봉훈랑)로 발탁되었다. 이것이 박상의의 첫 관직이었다. 천거한 인물은 당대 최고의 학자·문장가 중 한 명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였는데,[이재유고] 이정구는 이미 1587년(정해)부터 부친을 따라 장성현 관아에 살며 일찍이 박상의를 알아보고 그와 깊이 교분을 맺어온 사이였다.[이재유고] 이후 1598년 7월 통덕랑 행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로 승진하였다.

3.2. 동묘 건립

기록상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99년(선조 32년)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동묘(東廟)를 짓고 있었는데, 이때 터를 잡는 지관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국왕 선조의 첫 반응은 냉담했다. 선조는 박상의에 대해 "그의 술법이 괴이(怪)하여 쓸 만한 것이 못 된다"며 대놓고 불신을 드러냈다. 그를 조정에 천거한 것은 윤근수(尹根壽)였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박상의는 그저 "전날의 벼슬아치" 혹은 "술사" 정도로 불리는 기술자에 불과했다.

3.3. 의인왕후 능지 선정

1600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승하하면서 박상의는 능지 선정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 초기에는 명나라 풍수사들이 추천한 교하, 저현 등의 터를 흉지라 비판하며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지관에게 구타를 당해 갓이 부서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 선조가 지관들에게 "기내의 명당을 숨기지 말고 밀봉하여 올리라"고 압박하자, 박상의는 이호민(李好閔)의 부모 묘역을 명당으로 추천하여 파묘(천장)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땅을 파보니 광중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어 공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 뼈아픈 실패 후, 박상의는 "결국 건원릉(태조의 능) 구역 내로 돌아가는 것만이 답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건원릉 내의 산세를 다시 분석하여 선조를 설득했고, 결국 현재의 유릉(裕陵) 자리가 최종 낙점되었다. 이 공으로 박상의는 기술직으로는 이례적으로 동반직(문관직)을 제수받게 된다.

3.4. 목릉 선정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박상의는 국왕의 장지를 정하는 지관으로 다시 활동했다.

사실 1600년 의인왕후의 능을 정할 당시 박상의는 건원릉 구역 내의 '두 번째 산줄기(제2강)'를 "훗날을 위해 아껴두자"며 예비해 두었던 터였다. 그러나 막상 선조가 승하하자 그해의 운세(연극, 年克)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박상의는 '다섯 번째 산줄기(제5강)'를 추천하며 "산세가 웅장하고 명당이 탁 트였다"고 적극 밀어붙였고, 결국 이곳에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인조 8년(1630) 이 자리에 물이 차고 불길하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실제로 천릉(遷陵)이 이루어졌고, 옮겨간 자리는 박상의가 1600년 의인왕후 능 선정 당시 "훗날을 위해 아껴두자"고 제안했던 바로 그 '제2강'이었다. 결과적으로 목릉은 박상의가 처음부터 천하의 명당으로 점찍었던 자리들에 차례대로 자리를 잡게 된 셈이었다.

3.5. 광해군 시기

광해군은 즉위 후 창덕궁, 경희궁(경덕궁), 인경궁 등 대규모 궁궐 공사를 벌일 때마다 박상의를 직접 지목하여 "박상의를 시켜 궁터의 맥(脈)을 살펴보게 하라"고 명할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당시 또 다른 지관 이의신이 "수도를 교하(파주)로 옮겨야 한다"는 교하 천도론을 주장하며 정치적인 풍수를 했던 것과 달리, 박상의는 철저하게 현장의 지형과 맥을 살피는 실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영조 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의신은 도읍(都)을 옮기자 했고, 박상의는 국릉(陵)을 옮기자고 주장했다"고 정리되어 있다.

4. 주요 활동 및 논쟁

4.1. 건원릉(동구릉) 명당론

박상의가 조선 풍수지리 역사에 남긴 가장 큰 발자취는 "건원릉(태조의 능) 구역이 천하의 명당이다"라는 결론을 확립한 것이다.

수많은 사대부 묘역을 후보지로 검토하고 이호민 묘역 침수라는 실패를 겪은 끝에, 그는 "결국 태조 대왕이 잡은 자리가 하늘이 만든 수산(壽山)"이라며 강력하게 건원릉 구역(현재의 구리시 동구릉) 내 안장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이미 묘가 들어찬 곳에 또 쓴다"며 반발도 있었으나, 결국 그의 주장에 따라 의인왕후의 유릉과 선조의 목릉이 모두 동구릉 내에 조성되었다.

이 판단은 사후 수백 년에 걸쳐 왕실 능지 선정의 사실상 정답으로 격상되었다. 영조 7년(1731년), 판부사 민진원은 상소에서 "무학·이의신·박상의 세 사람이 모두 건원릉을 으뜸으로 쳤다(皆以健元陵爲最吉)"고 기술하였다. 이로써 그의 주장은 세 거인의 공통된 판단으로 공인되었고, 이후 왕실은 능지를 새로 정할 때마다 박상의의 의견을 사실상의 지침으로 삼았다.

4.2. 이호민 묘역 침수 사건

박상의의 안목이 항상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1600년 능지 선정 과정에서 겪은 흑역사로, 당시 선조의 강한 압박 속에 이호민(李好閔)의 부모 묘역을 최고의 명당으로 지목했으나 막상 파보니 광중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풍수지리에서 수맥이 나오는 땅은 최악의 흉지로 꼽히므로, 공사는 즉시 중단되었고 박상의와 명나라 지관들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훗날 인조 대의 관상감은 이 사건을 "지관들을 너무 압박하면 억지로 명당을 찾게 되어 사단이 난다"는 반면교사로 삼았다.

4.3. 교하 명당설과 장릉(長陵)

박상의는 라이벌 이의신처럼 교하(交河, 現 파주)에서도 명당을 주목했으나, 방향이 달랐다. 이의신이 "도읍을 교하로 옮기자"는 정치적 주장을 했다면, 박상의는 "국릉(國陵)을 교하로 옮기자"는 실무적 주장을 했다.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훗날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이 교하로 자리를 잡으면서 박상의의 안목이 또 한 번 재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5. 평가

5.1. 당대의 엇갈린 시선

활동 당시인 선조와 광해군 대에는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국왕들에게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길 만한 전문가"로 깊은 신뢰를 받았다. 선조는 동반직(문관 벼슬)을 파격적으로 내렸고, 광해군은 궁궐 공사 때마다 그를 찾았다.

반면 주류 사대부들에게는 "글도 모르는 무식한 기술자" 혹은 "술법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는 자"라며 철저히 무시당했다. 실록에는 그를 탄핵하거나 비난하는 상소가 수차례 등장하며, 명나라 지관들과의 논쟁 도중 구타를 당해 갓이 부서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는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기술직'이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했을 때 겪어야 했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5.2. 후대의 재평가

그가 죽고 200여 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박상의는 조선 풍수지리 역사상 최고의 거장으로 신격화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헌종의 능지인 경릉을 정할 때,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총호사 조인영은 "이곳은 옛날 박상의가 점지한 곳이니 더 볼 것도 없이 확실하다"며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대신 권돈인은 그를 가리켜 "지가(地家)의 신안(神眼)"이라 칭송했다.

이는 그가 생전에 강력하게 주장했던 건원릉(동구릉) 명당론이 수백 년간 왕실의 안녕을 지켜왔다는 결과론적 해석과, 신뢰할 만한 지관이 사라진 조선 후기의 현실이 맞물린 결과였다.

6. 여담

묘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일대에 위치. 종조부 박수량의 백비와 같은 지역권 내에 있다.

수산사(壽山祠) 배향: 태인 박씨 문중의 사우(祠宇)인 수산사에 파시조 박연생, 청백리 박수량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그를 "부지서자(不知書者, 글을 모르는 놈)"라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박상의가 진짜 글을 몰랐다기보다 과거 급제 경력이 없고 유학적 소양이 부족한 술관임을 겨냥한 표현으로 보인다.

동시대에 활동한 또 다른 풍수사 이의신과는 라이벌이자 콤비로 자주 묶인다. 실록에서도 "박상의·이의신"으로 항상 함께 거론되나, 스타일은 달랐다. 이의신이 "수도를 교하(파주)로 옮기자"는 거대한 정치적 풍수를 주장했다면, 박상의는 왕릉과 궁궐 터의 혈(穴)을 짚어내는 전통적인 풍수에 집중했다.

종조부 박수량은 "청렴의 상징"이었으나, 그 극단적인 청빈함은 후손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박수량의 아들 박사우가 "아비의 청빈을 원망하여" 탐욕을 부리다 파직되었다는 실록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박상의가 정통 유학 대신 기술직인 풍수지리로 이름을 낸 것도, 청빈을 강요당한 집안에서 실용적 전문직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 한 가문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영조 때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주장했던 교하 명당설은 훗날 인조의 장릉이 파주로 천릉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당시 "박상의는 능을 옮기자 했고 이의신은 도읍을 옮기자 했는데, 결국 능이 갔으니 박상의의 말이 맞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실록에 기록이 등장하는 시점(1599년)은 박상의가 62세 되던 해이다. 그러나 실록에서 마지막으로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철종 즉위년(1849년)이므로, 조선 어떤 신하보다도 긴 기간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이름을 남긴 인물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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