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문관. 뛰어난 문장력과 우수한 과거 시험 성적으로 성종 초반 정계의 중심으로 부상했으나, 지방관 부임 후 저지른 부정부패로 몰락한 인물이다.
1456년(세조 2년) 식년시에서 2등(방안), 20년 뒤인 1476년(성종 7년) 중시(重試)에서 또다시 2등(탐화)를 차지할 만큼 학문과 행정 실무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1472년에는 사헌부 지평으로서 한명회 등 훈구파 권신들의 '원상(院相)'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강직한 언관의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밀양 부사로 부임한 후 관찰사 윤효손에게 뇌물을 바치고, 관아의 곡식을 횡령했으며, 창고 화재를 은폐하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사실이 발각되어 의금부에 압송되었다. 이후 유배지에서 복직을 위해 백성을 위한 정책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으로부터 "말은 취할 만하나, 그 소행을 보면 말과 다르다"는 평가를 받으며 권력의 중심에서 영구적으로 배제되었다.
능력과 도덕성의 괴리가 공직자를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반면교사적 인물이다.
2. 생애
2.1. 과거 급제와 옥중 상소
박시형은 전라도 장성현 소곡(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에서 할아버지 박영보(朴英寶)와 아버지 박홍(朴鴻)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어 1451년(문종 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56년(세조 2년) 식년시 문과에서 을과 2위, 즉 전체 2등에 해당하는 방안(榜眼)으로 급제하며 직장(直長, 종7품)으로 관직에 발을 들였다.
관직 진출 직후인 1457년(세조 3년) 무렵, 아버지 박홍이 세상을 떠나 고향 장성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르게 된다. 이때 인명 사고 책임으로 파직되어 역시 낙향해 있던 동향(同鄕) 사람 이병규(李丙奎)와 만나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숨어 살아야 한다"며 정국을 한탄했다. 이 대화는 10년 뒤 그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 불씨가 된다.
1462년(세조 8년)에야 세자시직(정9품)으로 임용되며 복귀했다. 이후 그의 뛰어난 문장력은 점차 조정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문예가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해 예문관 직사(直司)로 임명하여 정기적으로 글을 짓게 했는데, 이때 박시형도 발탁되어 국왕의 친강(親講)에 참여했다.
그러나 1467년(세조 13년), 도교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의 책임자인 영(令)으로 재직하던 중 큰 위기를 맞는다. 과거 시묘살이 시절 이병규와 나누었던 한탄이 뒤늦게 비방죄로 엮여 의금부에 하옥된 것이다. 이듬해인 1468년(세조 14년)까지 이어진 국문 속에서 그는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박시형은 옥중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지어 올렸다. 이 글은 단순한 탄원서가 아니라 시경(詩經)과 옛 성현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충심과 억울함을 유려하게 풀어낸 명문장이었다. 글을 읽은 세조는 박시형의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하며 용서하였고, 박시형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게 된다.
2.2. 강직한 언관
세조 사후 예종 대를 거쳐 성종이 즉위하면서 박시형은 언관(言官)으로서 중앙 정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1471년(성종 2년) 최항으로부터 "문사가 훌륭한 자"로 천거되었고, 《세조실록》 편찬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상을 받기도 했다.
1472년(성종 3년),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된 박시형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당시 조정은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 대신들이 '원상(院相)'이라는 임시 직책을 맡아 국정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박시형은 왕의 총애를 받는 무장 최경 등에게 무분별하게 당상관 품계를 내리는 것을 비판하며, 그 화살을 훈구 대신들에게 돌렸다.
그는 성종에게 "대신을 제조(提調)로 삼는 관례를 파하소서"라며, 사실상 권신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이었던 원상 제도의 전면 폐지를 정면으로 주장했다. 이는 당대 최고의 실세였던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을 크게 분노케 했고,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결국 박시형은 대간의 논의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발언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대사헌 권감 등 동료와 상관들의 탄핵을 받게 된다. 하지만 성종은 그의 강직함을 아껴 파직 대신 예문관 수찬으로 체직(좌천)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했다. 비록 직위는 강등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박시형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선비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게 되었다.
2.3. 중시 급제
사헌부에서의 파동 이후, 박시형은 1474년(성종 5년) 성균관 전적(정6품)으로 복귀하여 국왕과 독대(윤대)하는 등 다시 신임을 회복했다. 이듬해에는 형조 정랑에 제수되어 법무 실무를 맡았다.
그의 천재성이 다시 한번 만개한 것은 1476년(성종 7년)에 치러진 중시(重試)였다. 중시는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있는 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특별 승진 시험이었다. 박시형은 성균관 직강(정5품)의 신분으로 응시하여 '어융안민지책(馭戎安民之策, 오랑캐를 제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논하는 책문에서 전체 3위(2등 제1위, 탐화)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한 그는 1477년(성종 8년), 서거정이 편찬한 문학 비평서 《동인시화(東人詩話)》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하는 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2.4. 뇌물과 횡령
그러나 화려했던 천재의 몰락은 허망하게 찾아왔다. 1478년(성종 9년) 4월, 박시형이 직속 상관인 경상도 관찰사 윤효손에게 부채, 갓, 기름 장판, 밤 등 상자 두 개 분량의 뇌물을 바친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성종은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박시형의 비리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즉각 의금부(義禁府)에 압송을 명했다.
수사가 진행되자 뇌물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이 드러났다. 박시형은 밀양 창고에 불이 나 관아의 곡식 수백 석(혹은 8천여 석)이 불타버리자 자신의 실책을 덮기 위해 허위 보고를 하고,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박시형이 많은 미곡을 내어 옥중에서 자봉(自奉)할 비용으로 하였고, 또 전 정자 박말주(朴末柱)는 박시형이 타는 가마[轎]를 부러뜨려서 우물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는 도둑놈이 타던 것이다."고 하였다.
- 성종실록 92권, 성종 9년 5월 6일 정묘 4번째기사
죄수를 호송하는 가마가 분노한 백성(박말주)에 의해 우물에 처박히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도둑놈(盜賊)"이라 불리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잡혀가는 와중에도 감옥에서 편히 지내려 관아의 쌀 30석과 벼 40석을 횡령(양옥, 養獄)했다는 사실은 성종에게 돌이킬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겼다.
결국 1478년 6월 22일, 의금부는 박시형에게 당시 관리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선고했고 성종은 이를 그대로 재가했다.
전 밀양 부사 박시형이 뇌물로 주고 (...) 출고하여 양옥(養獄)하는 자재로 삼은 죄는, 율(律)이 결장(決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자자(刺字)는 면하고 고신(告身)은 모두 추탈(追奪)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 성종실록 93권, 성종 9년 6월 22일 임자 3번째기사
곤장 100대와 3,000리 유배형, 그리고 과거 급제와 모든 관직 경력을 삭제하는 고신 추탈(告身追奪)이 내려지면서, 1472년 원상(院相)을 호령하던 대쪽 같은 언관 박시형은 역사에서 그 명예가 완전히 지워지게 되었다.
유배지로 쫓겨난 박시형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유배 생활 중에도 성종에게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백성을 다스리는 계책'을 진언하며 정계 복귀를 타진했다. 1481년(성종 12년) 7월 4일, 영사 홍응이 "박시형은 다시 쓸 만한 인재"라며 그를 천거했으나, 성종의 반응은 냉담했다.
박시형이 두 번 상소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계책을 아뢰었는데, 매우 취할 만한 말이었으나, 그 소행을 보면 말하는 것과 다르다.
- 성종실록 131권, 성종 12년 7월 4일 정축 1번째기사
성종은 그의 탁월한 정책 기획력(계책)은 인정하면서도, 과거에 보여준 탐욕스러운 행동(소행)을 지적하며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를 이유로 복귀를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불과 20일 뒤인 7월 24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억울한 죄수를 풀어주는 대규모 사면 정국이 조성되자, 성종은 특별히 박시형의 직첩을 도로 내어주며 신분을 복권시켰다. 직첩을 돌려받은 박시형은 8월 16일, 예비 관료들을 양성하는 성균관의 전적(典籍)으로 임명되며 화려한 복귀를 눈앞에 두는 듯했다.
그러나 대간(臺諫)들은 부패한 천재의 귀환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 정광세는 "부패하고 뇌물을 바쳤던 자가 어찌 유생들의 모범이 되는 사표(師表)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며 맹렬히 탄핵했고, 성종은 즉각 보직을 취소했다.
이틀 뒤인 8월 18일, 장령 안침은 아예 성종이 내뱉었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과거의 발언을 근거로 들며 그의 등용 자체를 반대했다. 결국 성종은 대간의 끈질긴 반대에 굴복하여 다음과 같은 최종 선고를 내린다.
대간에서 박시형을 논하여 동반(東班)에 서용할 수 없다고 하니, 우선 서반(西班)의 직책을 주게 하라.
- 성종실록 132권, 성종 12년 8월 18일 경신 2번째기사
문과 방안(2등) 출신의 엘리트에게 국정의 핵심인 동반(문관) 서용을 영구 금지하고, 실무직인 서반(무관 및 기술관)으로 내쫓은 것이다. 이로써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천재 관료 박시형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을 맺게 되었다.
3. 주요 논란 및 비판
뛰어난 문장과 지식 뒤에 숨겨져 있던 박시형의 진짜 인품은 사관(史臣)이 남긴 논평에 드러나 있다. 실록은 특정 관료의 사생활을 세세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드문데, 박시형의 경우는 매우 구체적인 악평이 기록되어 있다.
박시형은 성품이 인색(吝嗇)하여서 집에 있을 때에는 비록 음식과 같은 작은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스스로 출납하여 처첩이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였고, 밀양 부사가 되어 부임하던 날에는 새벽에 바로 들어가서 아전들이 미처 영접하지 못한 자가 많았었는데, 모두 연포(면포)로써 속(贖)하게 하였으니, 그 행한 일이 대개 이와 같았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 성종실록 92권, 성종 9년 5월 6일 정묘 7번째기사
가정 내에서는 쌀알 하나까지 통제하는 극단적인 인색함을 보였고, 행정 현장에서는 부임 첫날부터 권위를 앞세워 아전들과 백성들을 가혹하게 쥐어짰다는 것이다. 1472년 권신들을 비판할 때 보여주었던 그 서슬 퍼런 '원칙'들이, 사실은 타인을 향한 지독한 인색함과 엄격함에 불과했음을 방증하는 기록이다.
그의 가장 큰 비판점은 글(文)과 삶(生)의 괴리였다. 그는 과거 시험 책문(어융안민지책)과 수차례의 상소문을 통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법'과 '관료의 원칙'을 화려한 수사로 설파했다. 그러나 실제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는 뇌물, 공금 횡령(양옥), 화재 은폐, 백성 수탈이라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태를 보였다.
성종이 그를 내치며 남긴 "말은 취할 만하나 소행이 다르다"는 평가는, 조선 시대 공직자에게 지식보다 도덕성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장이 되었다.
4. 여담
그가 밀양 부사 시절 세상에 빛을 보게 한 《동인시화(東人詩話)》는 임진왜란 이후 판본이 거의 소실될 뻔하였으나, 훗날 거듭 간행되어 조선 전기의 문학 비평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았다. 자신의 정치적 명예는 무너졌으나, 그가 남긴 학술적 결과물은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진 셈이다.
1476년(성종 7년) 중시(重試)에서 박시형(전체 2등)과 함께 나란히 1, 2등을 다투며 전체 1등(장원)을 차지했던 인물은 손비장(孫比長)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하게도, 박시형이 뇌물 사건으로 구속되던 1478년, 손비장 역시 임사홍과 결탁하여 붕당을 형성했다는 혐의로 성종의 국문을 받고 처벌받게 된다.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던 두 관료가 불과 2년 뒤 나란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