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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권람(權擥)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34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관, 작가

절친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으며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좌의정을 지냈다.

2. 생애

1416년(태종 16), 종1품 좌찬성을 지낸 안동 권씨 권제(權踶)와 전의 이씨 이준(李儁)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좌명공신 권근의 손자이며, 세종과 훗날 영의정이 되는 정인지를 가르친 당대의 대학자 권우(權遇)가 그의 종조부이다. 숙부 권규는 태종의 사위로, 숙모는 경안공주이다.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권제는 문장에 능하고 달변가였으나 기생 첩에 빠져 가족들을 소홀히 대했으며, 부인과 자식들을 자주 구타하였다. 권람은 이를 말리다 자신 또한 폭행을 당하였고, 그의 누이 중 한 명 역시 가정폭력을 말리다가 권제에게 발로 차여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권제는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고려사 편찬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딸과 첩을 살해한 사실은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끝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내쫓자 권람은 집을 떠나 방랑하였다.

권람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지혜와 꾀가 많았다고 한다. 방랑하던 시기에 한명회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마음이 잘 통했는지 이후 조선의 관포지교라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명회와 함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고, "남아(男兒)는 창[矛]을 드날리고 말을 달려서 변경 사이에서 공을 세우고 마땅히 만 권(卷)의 서적을 읽어서 불후(不朽)의 이름을 세워야 한다."라고 서로 다짐하기도 했다.

세는나이로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 장원 급제를 하였다. 절친이었던 한명회는 이때도 과거에 낙방하여 결국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사실 이 장원 급제에는 문제가 있었다. 본래 권람의 성적은 4위였으나 당시 1위를 한 김의정(金義精)의 아버지 김자강이 수군의 아들이라 집안이 변변치 않고 명망이 없다는 이유로 문종의 명에 따라 4위였던 권람이 장원으로 올려졌다. 이로 인해 김의정은 석차도 을과 2위 아원(亞元)으로 밀렸으며 관직도 종6품 현감에 그쳤다. 또한 이때 2위였다가 3위로 억울하게 강등당한 인물이 이시애의 난 때 살해된 강효문(康孝文)이다.

어찌 되었든 과거 급제를 한 직후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곧바로 집현전 교리가 되는데 이때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그에게 자신의 친구인 한명회를 추천하면서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였고, 1453년 10월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1등 정난공신에 올랐다. 곧바로 승정원 동부승지로 특진하고 우부승지, 좌부승지로 차례대로 승진하면서 한명회와 함께 단종을 사실상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에는 이조참판을 거쳐 1456년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에 집현전대제학과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고 길창군에 봉해졌으며, 1457년 8월에는 판중추원사, 1458년 12월에는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459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공신 3인방이라 불리는 한명회, 신숙주와는 달리 이때부터 몸이 좋지 못해서인지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465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3. 가계

3.1. 친가(안동 권씨)

고조부: 영가군(永嘉君) 권고(權皐) - 검교시중(檢校侍中)

고조모: 문화 류씨 류승(柳陞)의 딸

증조부: 영가군(永嘉君) 권희(權僖) -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

증조모: 한양 한씨 한종유(韓宗愈)의 딸

조부: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 - 예문관 대제학 증 좌의정(藝文館 大提學 贈 左議政)

조모: 경주 이씨 이존오(李存吾)의 딸

아버지: 증 길창부원군(贈 吉昌府院君) 권제(權踶) - 좌찬성 증 영의정(左贊成 贈 領議政)

어머니: 전의 이씨 이준(李儁)의 딸

숙부: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 - 태종의 부마

숙모: 경안공주 - 태종의 적3녀

3.2. 배우자 / 자녀

정부인: 영원군부인 고성 이씨(寧原郡夫人 固城 李氏) - 이원의 딸

장남: 권걸(權傑)

며느리: 의령 남씨 남척(南倜)의 딸

차남: 권건(權健)

며느리: 전의 이씨 이덕량(李德良)의 딸

장녀: 청주 한씨 한서귀(韓瑞龜)의 처

차녀: 상주 박씨 박사화(朴士華)의 처

3녀: 평산 신씨 신억년(申億年)의 처

4녀: 의령 남씨 남이(南怡)의 처

5녀: 구 안동 김씨 김수형(金壽亨)의 처

6녀: 거창 신씨 신수근(愼守勤)의 처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7녀: 평산 신씨 신말평(申末平)의 처

8녀: 여흥 민씨 민사건(閔師騫)의 처

4. 여담

남이와 신수근은 그의 사위들이다. 남이는 권람의 넷째 딸과, 신수근은 여섯째 딸과 결혼하였다. 권람의 딸이 남이와 결혼할 당시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지는데, 이는 남이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위감을 점지하기 위해 사위감인 남이를 데리고 점을 보러 갔다고 한다. 이때 무속인은 남이가 요절할 상이라고 하였으나, 권람의 딸 역시 요절하되 평생 복만 누리다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권람은 자신의 넷째 딸을 남이와 혼인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권람과 그의 넷째 딸이 죽은 뒤 남이는 남이의 옥으로 인해 장인의 동지이자 친구였던 한명회, 신숙주와 당시의 신진 관료 유자광 등에 의해 처형되었다. 권람의 아들들은 누이가 일찍 사망하여 예종 초 남이 집안과 아무런 관련이나 교류가 없음을 들어 극적으로 멸문지화를 면하였다.

일찍이 권람(權擥)이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하였다. 권람이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장이는 “이 분은 반드시 나이 젊어서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합니다.” 하였다. 자기 딸의 수명은 또 보게 하였더니, “이 분의 수명을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권람은 그 말에 따랐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극진히 입었으며 28세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람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6권, 예종조 고사본말(睿宗朝故事本末)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中

민간에 전하기를,

남이가 젊었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보자기 위에 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그 가는 대로 따라 갔더니, 그 종은 어떤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물었더니, 주인 집 작은 낭자가 별안간에 죽었다고 하였다.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 하자, 그 집에서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하였다.

남이가 문에 들어가 보니 분 바른 귀신이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다가 남이를 보는 즉시 달아났는데, 그러자 낭자는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자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남이가 “어린 종이 가져온 상자 속에는 무슨 물건이 있었더냐?” 하고 물었더니, “홍시가 있었는데 낭자가 이 감을 먼저 먹다가 숨이 막혀서 넘어졌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가 본 대로 상세히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하였더니 낭자가 살아났다.

이 낭자는 곧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인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좋은 날을 가려 혼인을 정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6권, 예종조 고사본말(睿宗朝故事本末)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中

무오사화 때 김일손의 공초에 따르면, 권람은 단종의 후궁 숙의 권씨와 같은 안동 권씨 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의 권씨의 노비와 토지를 모두 차지하였다. 이후 숙의 권씨가 노비에서 방면된 뒤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져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는 조금도 나눠주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사육신과 함께 처형된 김문기의 맏며느리 권영금(權英今)은 당시 이조판서였던 권람 덕분에 사실상 노비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권람의 5촌 당질이었기 때문이다. 사육신 집안의 다른 여성들처럼 권영금 역시 노비가 되었으나, 권람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노비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권람의 노비가 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따지면 당숙의 빽으로 풀려나 보호받은 셈이다.

사육신 사건 때 처형된 이들의 여자 가족들은 공신들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어졌는데, 안평대군의 며느리 의령 남씨 남오대(南五臺)는 권람에게 내려졌다. 남오대는 좌의정 남지의 딸이자 임영대군의 첫 번째 부인 남씨와 자매이며, 영의정 남재의 증손녀였다. 즉 세조는 자신의 친조카며느리이자 세종의 손자며느리를 공신의 노비로 내려준 셈이다.

한편 권람의 장남 권걸(權傑)의 부인이자 권람의 맏며느리는 홍주목사 남척(南倜)의 딸이었는데, 남척은 좌의정 남지의 동생인 대사헌 남간의 차남이었다. 따라서 권람의 며느리 의령 남씨와 노비로 삼은 안평대군의 며느리 남오대(南五臺)는 서로 5촌 관계였다.

국법(國法)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관례에 따라 잔치를 열어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권람은 과거 급제를 기념하여 어머니 전의 이씨를 위해 잔치를 열었다. 흰 머리의 어머니가 대청에 앉아 있었고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를 비롯한 지체 높은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손님들의 수레가 집 앞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또한 권람의 모친을 위해 열린 이 잔치에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세조도 찾아와 권람의 어머니에게 직접 축수(祝壽, 오래 살기를 빎)하였다고 한다.

권람은 은퇴 직후부터 아버지 권제가 편찬하려 했던 안동 권씨 집안의 족보 편찬과 사료 수집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족보의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수집하던 족보는 1476년(성종 7년)에 간행되었는데, 이때 간행된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는 후대에 전해지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알려져 있다.

절친 한명회가 권람을 도와주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이 야사에 따르면 권람은 젊고 미모가 뛰어난 여종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부인의 눈치를 보느라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한명회는 권람에게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가장하도록 한 뒤, 회화나무 꽃을 삶은 물을 주며 이를 온몸에 발라 황달에 걸린 것처럼 꾸미라고 하였다. 이후 한명회는 권람의 부인 앞에서 통곡하는 연기를 하며 "아이고! 부인께서 계집 하나를 아끼느라 내 친구가 죽게 생겼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권람의 부인은 길일을 택해 해당 여종을 권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다음 날 한명회가 권람을 찾아가자 권람이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였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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