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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상진(尙震)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1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증조부 상영부(尙英孚)는 호군(護軍), 조부 상효충(尙孝忠)은 수군우후, 부친 상보(尙甫)는 찰방을 지낸 한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바빠 17~20살까지 글을 몰랐다는 입지전적인 인물. 명종 시대 소윤 정권의 대표적 재상이었으나 청렴하였고 온건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493년 아버지 상보와 어머니 연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24세 되던 1516년(중종 11) 식년 생원시에 2등 22위로 입격했다. 이후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상진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일부러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동료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 기묘사화가 일어났으니 오히려 처세라고 볼 여지도 있다.

이후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했다. 급제 때 인사를 받은 정광필에게 게으른 재상이 될 것이란 평가를 받았고 과연 적중했다.

정쟁에서 한 발을 뺀 순탄한 관직 생활으로 소윤에 아첨하였다는 부정적 기록도 있으며 악명이 없어서라도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몇몇 미담이 남아 있다. 창고에 채울 것이 없다며 고치지 말라고 했다거나, 윤원형이 트집잡으려 했으나 통밀죽을 쑤어먹는다는 말에 명종이 왕후와 함께 울었다는 등이다.

"정승 상진은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는 평에 걸맞게 친구였다는 송순과의 대화가 흥미롭다. "내가 자네처럼 목을 움츠리고 바른말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정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란 말에 "자네가 나를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옳지만, 불평스러운 말을 해서 귀양만 다니는 것은 무슨 재미인가"라고 받은 것.

과연 상진은 그 엄혹한 시대에 한번도 귀양살이 하지 않았다. 인종 시대에 대윤의 견제를 받아 우찬성, 형조판서에서 경상도관찰사로 좌천 당한 게 전부. 그러나 인종이 요절하면서 지중추부사로 바로 복직했고 우참찬이 되었다. 그럼에도 권간이나 소인이란 평을 듣지 않았으니, 정쟁의 시시비비보단 현실의 실무를 해결하는데 더 가까운 상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묘비는 세우지 말고 짤막한 표석(갈,碣)을 세워 '공은 늦게 거문고를 배워 일찍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라고만 쓰면 족하다."라고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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