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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서재필(徐載弼)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33 목록 댓글 0

1. 개요

1920년대 초, 워싱턴 군축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은 구미위원부 한국위원회 부단장 서재필.

조선 후기 및 개화기의 정치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부턴 주로 의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2. 상세

조선-대한제국 시기 정치인, 관료, 혁명가, 언론인, 상인, 의사, 작가, 교육인, 학자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고 갑신정변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일조했다. 대한제국 중추원 고문, 농상공부 고문, 학부대신 서리 등 관료로 봉직했으며, 미국 망명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로도 재직했다.

1882년 문과 증광시에 최연소 합격한 후 20세던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찬밥 대우를 받자 다시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한국에 있던 친지들이 대부분 죽고 자신도 역모자가 되어 귀국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해 의대 강사가 되어 강의까지 했으나 그만두고 의사로 개업한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연루자들에 대한 징계가 풀리자 박영효의 제안으로 미국 시민으로서 귀국했다.

고종과 미국을 연결해 줬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회 설립과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고종의 반대로 실패한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독립협회도 해산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미국에서 언론 활동으로 3.1 운동을 지원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 군정의 고문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와 일부에서 대통령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출마하지 못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다 1951년 86세에 사망했다.

서재필은 나라를 바꾸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심지어는 집안이 멸문까지 당했으며 본인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을 겪는다. 이에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인이 되었고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낸 조선에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시절엔 모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정체성이나 공과 등에 대한 업적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 인간으로만 보자면 비극적인 가정사부터 다사다난했던 인생사까지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고 고생 꽤나 한 인물이기는 했다. 어록을 봐도 알 수 있듯 최소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개혁적인 사상을 가졌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3. 비판적 평가

주진오 교수는 서재필에 대한 기록이 거짓과 왜곡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아관파천 성공 직후 박정양의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고종은 ‘독립신문’이란 제자(題字)를 부여하고 정부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했다. 독립신문이 민간 신문의 외양을 취하기 위해 나중에 서재필을 등장시키지만 사실상 ‘정부대변지’로 창간된 것이다. 그런데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본인이 독립신문을 “조선 사람의 근소한 후원을 얻어” 발행했으며 자신이 독립신문으로 명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238쪽)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독립신문 발간 계획을 유길준에게 설파해 유길준에 의해 승인되고 준비된 것인 양 거짓 서술하고 있다. 그는 유길준의 신문 계획이 좌초된 일과 박정양의 이름 자체를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 독립신문이 자신의 창안으로 이뤄졌다고 꾸며댔다. 그런데 일찍이 독립신문 연구의 기초를 놓은 신용하는 서재필의 이 거짓말을 참말인 양 인용하며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신용하, 『독립협회 연구(상)』 24~25, 28, 42쪽)

2017년 황태연 교수가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을 중앙일보에서 제기하였다. 다른 기사에서는 민영환과 니콜라이 2세가 교섭한 내용을 윤치호로부터 전해들은 서재필이 일본공사에게 밀고한 내용이 나온다. 다른 기사에 따르면 서재필이 추방당했던 1898년(광무 2년)에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매각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황태연 교수도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건 친일 성향이 강했던 독립협회 시절일 때라고 하였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된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교섭한 내용을 당시 수행통역관 윤치호로부터 전해들은 서재필은 이를 일본공사에게 ‘밀고’하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 11. 17.)에 ‘밀고’라고 적혀 있다. 또 미국공사 존 실(John M. B. Sill)이 이완용에게 러시아 장교의 교관 고빙(雇聘) 반대 행위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일이 있는데 이런 사실도 서재필이 일본공사관에 알려주고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7. 5. 25.) 고종이 러시아와의 동맹을 가장 중시했던 민감한 외교전쟁 시기에 일본 측이 먼저 알아서는 안 되는 외교비밀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실장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재필 본인은 이후 미국 정부에 연줄이 닿은 뒤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개화되지 못한 나라들인 건 똑같다고 보았다. 물론 당시 다른 독립협회 인사들처럼 일제에 너무 낙관적인 장밋빛 전망을 가졌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 병합 이후에는 일제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4. 기타

제이손이란 이름은 '서재필'을 '필재서'로 바꿔 필립 제이손으로 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Jason'이 아닌 'Jaisohn'으로 적은 이유에 대해 미국인 기자들이 발음나는 대로 적은 거라는 의견이 있다.

1896년 독립신문 사설에 조선도 미국과 영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며, 그리만 되면 요동, 만주, 대마도도 찾아올 수 있지 않겠냐는 일종의 조선판 제국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보면 황당할 수 있지만 개화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국 제국주의와 자유제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를 추구한 지식인도 상당했다. 본인도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성공할 생각들만 하고, 못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지어다​'라고 개화의 포부를 크게 가질 것을 역설하는데, 허망한 영토뽕을 주입시켜서라도 조선이 변화하길 갈망한 모양이다. 이후 조선이 제국주의에 먹히는 꼴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을지는 미지수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중에 개신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광고지를 돌리다가 또 어떤 때는 농장에 가서 포도도 따주고 빵을 빌어먹어가면서 나는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시내 기독교청년회에서 경영하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연설회에 구경도 가고, 주일이면 예배당에 반드시 출석하였다. 나는 메이슨 거리에 있는 장로교회 예배당에 다녔는데, 그곳을 주일마다 반드시 갔다. 영어를 배우려는 것이 주안이었으나, 차츰 다니기 시작하니 종교적 신앙심도 차차 두터워가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바르고 깨끗한 길을 걸어갈 결심을 한 것도 이때였다.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인생에게 전해준 그리스도의 뒤를 잇기로 맹세한 것도 이때였다. 이 종교적 영향은 나의 인생을 통하여 위대한 힘을 주었다.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 많이 언급하지만 사실 서재필은 학술박사 학위(Ph.D.)는 받은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의학 학위 M.D.가 Doctor of Medicine, 즉 의무박사 학위로서 일반 박사학위급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생긴 일로, 박사가 맞긴 맞으나 학술박사로서의 '의학박사'는 아니고 전문박사로서의 '의무박사'이다. 실제로 서재필은 1892년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여 의무박사(M.D.) 학위를 취득했다. 서재필이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아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코란 자연과학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의 의학전문대학원(School of Medicine)인데,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코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3년제 의학전문대학원에 등록하였고, 1892년 M.D. 학위를 받은 후 1년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1896년 4월 23일 한성부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야구 친선 경기가 있었는데, 그중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전하여 2득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유일한이 1926년에 설립한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는 서재필이 조각가인 둘째 딸에게 의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유일한이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서재필이 주었다고 한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에는 한국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그로부터 먼 훗날인 1949년 3월 1일에는 한국어로 장시간 연설했으며 육성 녹음도 남아 있다. 음반 원본은 분실되었지만 복사본이 남아있으며 전체 분량은 약 9분 정도다. 전반적으로는 19세기 근대 양반가에서 썼을 법한 서울 방언 억양이지만, 이미 연로했던 데다 영어의 음색이 많이 섞인 탓에 듣기에 따라서는 이승만보다도 한국어가 더 어눌하게 들리는 게 특징이다.

1950년 9월 14일 병석에서 존 하지 장군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한국인들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대한,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 산하의 중앙정보부에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서재필이 태어난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 서재필 기념 공원이 있다. 생가와 도보 20분 정도 거리.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기념물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공원에 세워진 동상(송재 서재필 상. 1990년 건립)일 것이다. 자신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움켜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외 미국 워싱턴 D.C.에도 2008년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필라델피아엔 서재필 기념관도 있는데, 2025년 8월 이재명 대통령 내외가 방문하기도 했다. 1999년 DJ 이후 26년 만의 대통령 방문이었다.

갑신정변 연루자들의 가문은 대부분 항렬자를 바꾸었다고 하는데, 서광범·서재필의 대구 서씨 가문도 25세 광(光) 항렬과 26세 재(載) 항렬을 각각 병(丙)과 정(廷)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실제로 갑신정변 직후인 1884년 11월 29일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전 수사(水使) 서광정(徐光鼎)이 이름을 병응(丙應)으로 바꾸고, 전 병사(兵使) 서광복(徐光復)이 이름을 병무(丙懋)로 바꾸고, 전 수사 서광현(徐光顯)이 이름을 병훈(丙勳)으로 바꾸고, 전 영장(營將) 서광태(徐光泰)가 이름을 병희(丙憙)로 바꾸고, 전 부사 서재풍(徐載豐)이 이름을 정규(廷圭)로 바꾸고, 훈련원 첨정 서재두(徐載斗)가 이름을 정두(廷斗)로 바꾸어 윤허를 받은 기록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여러 사례가 있다.

다만 반례가 없지는 않다. 서병필(徐丙弼, 1852년생)이라는 무신은 갑신정변 이전인 1882년(고종 19) 증광시 무과 원방(原榜)에 을과 2위로 급제했는데, 이 당시 무과의 급제자명단을 기록한『숭정후5임오경과증광문무과전시방목(崇禎後五壬午慶科增廣文武科殿試榜目)』을 보면 그대로 서병필로 기재되어 있어 갑신정변 직후에 개명한 것이 아닌 원래 본명이 서병필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이 서상은(徐相殷)이므로 서병필이 대구 서씨 25세임도 틀림없다.

오늘날 봐도 인간승리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양반으로 조선 문과 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관리였음에도, 조선 개화를 위해 스스로 편한 길을 버리고 일본으로 유학가 장교도 아닌 하사관 교육 과정을 지원해서 훈련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갑신정변을 겪고 조국에서 쫓겨나 영어도 못하는 상태에서 미국으로 갔지만 언어를 배우고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며 의사, 언론인, 작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부위원장, 대미 외교 고문 등을 역임했다. 미국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던 동료 박영효도 결국 미국 생활을 못 견디고 되돌아갔을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인간적으론 재능과 노력이 합쳐진 케이스라 할 만하다.

1940년 미국 인구 조사 기록에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내와 둘째 딸과 손자와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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