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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송상현(宋象賢)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23 목록 댓글 0

1. 개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관. 전쟁 초기 부산 동래성을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1551년(명종 6) 2월 12일 전라도 정읍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송복흥(宋復興)의 아들로 태어났다. 송시열의 기록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문장을 날리며 김장생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하지만 송시열이 김장생계의 학문을 계승한 것으로 볼때 이는 다소 과장이라고 볼 수 있다. 1570년(선조 3) 20세의 나이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고,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선조 14)에는 사헌부 지평 · 집의 등 대간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84년(선조 17)에는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한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치다 1591년(선조 24),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동래부사(東萊府使. 오늘날의 부산광역시장)에 제수되어 다가올 전란에 대비하였다. 송시열의 기록에 따르면, 왜란 직전 송상현의 관직은 종3품 사헌부 집의였다. 이때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동래는 일본군과의 첫 교전지로 여겨져 다들 부임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이때 선조가 적합한 인재를 찾자 조정에서는 송상현을 천거했고 이에 특별히 정3품으로 품계를 올려 부임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2.2. 동래성 전투와 전사

1592년(선조 25)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약 30,000명에 맞서서 관민 약 4,000명으로 대항했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조복을 갈아입고 북향 사배를 올리고 항전을 이어가다가 1592년(선조 25) 5월 23일에 향년 41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관기 출신 첩 한금섬은 담을 넘어서까지 그에게 달려가 함께 죽임을 당해 절개를 지켰다.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가 비록 적수지만 그의 용기에 감탄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2.3. 사후

임란 도중에 비변사에서 포증(褒贈)을 건의하는 등 꾸준히 충심과 절의를 기리려는 논의가 진행되다 효종 때에 이르러 이조판서와 찬성에 추증되었고 '충렬(忠烈)'이란 시호도 하사받았으며 동래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청주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한편, 동래에 있던 시신은 전란 이후 수습해 청주로 옮겨졌으며 현 위치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행정동으로는 강서1동)의 청주 충렬사 동북방에 있는 뒷산에 영장하였으며 신도비도 조성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제목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여담으로 경부고속도로 청주IC 부근에 위치하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원안은 묘소 근처를 지나도록 계획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묘소를 피하려고 손수 계획을 고쳐 현재처럼 굽은 선형이 되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부친인 송복흥은 송상현이 전사하고 2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헌부 감찰과 지방 수령을 지냈으며, 아들 덕에 사후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 성주 이씨(이온(李熅)의 딸) 사이에서 송인급(宋仁及, 1576~1608), 송효급(宋孝及, 1579~?)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송인급은 1605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과 서장관을 지냈고 차남 송효급은 1606년 진사에 올랐다.

한편 동생 송상인(宋象仁, 1569~1631)도 1605년 문과에 급제해 함경도 북평사, 형조 좌랑을 지내다가 1612년 김직재의 옥사로 인해 제주도에 10년간 위리안치되었다. 이 옥사 당시 국문 자리에서 자신은 송상현의 아우로 4대에 걸쳐 과거에 나가 충성을 다했다고 항변(『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 2월 22일 정해 3번째 기사)해서 형 송상현의 친구들이 그를 구원해 목숨을 건졌고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남원부사, 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4. 평가

송상현은 기본적으로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고 또 전쟁이 터지자마자 전사한 탓에 그 개인의 군사적 능력을 평가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다만 임진왜란 개전 초기 너무나도 열세가 뻔한 상황 속에서 부산진을 지키다 전사한 정발, 다대포를 지키다가 전사한 윤흥신과 더불어 일본군에 당당히 맞선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일본군마저 그를 높이 평가해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할 정도였다. 따라서 '동래'의 후신인 부산광역시에서는 그와 더불어 정발, 윤흥신과 함께 '부산을 지킨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부산진구 양정동에는 이 문서 맨 위 사진에 있는 송상현의 동상이 있으며 그 주변은 '송공 삼거리'라고 불렸다가 지금은 아예 주변을 광장으로 조성했다.

이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 군부대인 제53보병사단의 별칭인 '충렬부대'의 '충렬'은 송상현의 시호인 '충렬(忠烈)'에서 따왔으며 부산 지역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지역을 빛낸 위인'으로 장영실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다.

문관으로서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며 특히 중국어에 능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던 인물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허무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5. 주요 시설

송상현을 기리는 시설들은 부산광역시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자리해 있다.

5.1. 부산광역시

송상현광장(부산진구 부전동~양정동)

송공단(宋公壇)(부산광역시 기념물, 동래구 복산동)

송상현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순절한 여러 선열을 모신 제단으로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이 위치한 수안역 인근에 있다.

충렬사(忠烈祠)(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동래구 안락동)

지금은 정발, 윤흥신 등 임진왜란 전사자들의 합동 사당처럼 되었지만 본래 그 시작은 송상현의 충혼을 기리는 송공사(宋公祠)였으며 이후 '안락서원(安樂書院)'으로 교육과 제사를 겸하게 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무사한 47곳의 서원 중 1곳이었다. 안락 교차로에 바로 맞닿아 있는 탁월한 입지 덕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에 동명의 역이 있기도 하다.

5.2. 충청북도 청주시

청주 충렬사(청주시 흥덕구 수의동(강서1동))

송상현의 묘소에서 우측 언덕에 자리잡았으며 부조묘로 영조 때 세워졌다. 현재의 사당 건물은 2001년 후손들이 새롭게 고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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