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본관은 영산 신씨(靈山 辛氏) 초당공파(草堂公派)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의 수습 과정에서 외교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1624년(인조 2년) 일본에 회답사(回答使) 종사관으로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146명을 쇄환해 왔으며, 1637년(인조 15년)에는 속환사(贖還使)로 청나라 심양에 파견되어 끌려간 백성들의 속전(몸값)을 치르고 구출해 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외에도 명나라 사절 접반사, 각 도 암행어사, 병자호란 직후 강화도 유수 등 조정의 중요 실무직을 두루 역임했다.
강직한 성품의 언관(대간)으로서 왕실(궁가)의 어염(魚鹽) 조세 특권 혁파를 주장하며 임금과 정면충돌하거나, 원종 추존에 반대하다 방출을 당하는 등 원칙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한편 심양 사절 기피 논란 등 인간적인 부침도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보기 드문 90세 이상의 천수(天壽)를 누린 국로(國老)로서, 효종과 현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정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반열에 올랐다. 사후 영조 대에 이르러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영산 신씨 가문을 대표하는 중흥조로 꼽힌다.
2. 생애 및 관직 활동
2.1. 초기 생애
1577년(선조 10년) 태어났다. 조부는 선조 대 선공감 판관(繕工判官)을 지낸 신진(辛鎭)이며, 부친은 좌랑(佐郞)을 역임한 신우원(辛宇遠)이다.
광해군 14년(1622) 예문관 겸 승정원의 주서(注書)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광해군 15년(1623) 1월, 예문관 취재시(取才試)에서 《좌전(左傳)》을 강하여 통(通)을 획득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다만 실록의 사평(史評)은 이 시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인조 4년(1626) 인조실록은 "신계영은 일찍이 혼조(昏朝, 광해군 대)에서 박승종(朴承宗) 등에게 아첨하여 한림(翰林)까지 되었는데, 반정 이후에도 청반(淸班)에 출입하자 공의(公議)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는 그가 광해군 대에 권신에게 부합하여 관직을 얻었다는 당대의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반정 이후에도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논란이 조정에서 계속 제기되었음을 보여준다.
1624년(인조 2년) 1월, 이괄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이 이괄의 내응자들을 추국하는 과정에서 정석필의 공초에 신계영의 이름이 내응자 명단에 포함되어 올라왔다. 그러나 이후 실록에서 신계영이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며, 같은 해 2월에는 정언(正言)으로 임명되고 5월에는 일본 회답사 종사관으로 파견되는 것으로 보아 혐의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의 정확한 경위와 무혐의 처리 과정은 기록상 불분명하다.
2.2. 대일 외교와 포로 쇄환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포로를 송환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1624년(인조 2년) 5월 일본에 파견되는 회답사(回答使) 정립(鄭岦) 일행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행(使行)은 흔히 계해사행(癸亥使行)으로 불리며, 정사 정립·부사 강홍중(姜弘重)·종사관 신계영으로 구성된 삼사(三使) 체제였다.
일본에 당도하여 관백(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源家光)를 만나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때 일본 측 군신들이 증정하는 막대한 예물과 은화를 하나도 받지 않고 도주(島主)에게 되돌려주고 돌아왔다. 실록은 이를 두고 "신하가 국경을 나갔을 때의 의리를 잃지 않은 것이라고들 했다"고 평했다.
이듬해인 1625년(인조 3년) 3월 귀국하며 조선인 포로 146명을 되찾아 부산진으로 돌아오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귀국 후 인조는 삼사 일행을 직접 인견하여 "왜국의 사정이 어떠하던가?"를 물었으며, 이 공로로 신계영은 승서(陞叙)의 특전을 받았다.
2.3. 왕실 특권 혁파 투쟁 등
대일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 등 대간(臺諫)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6년(인조 4년), 신계영은 1627년(인조 5년) 암행어사로 경상좌도를 순행하던 중 얻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왕실과 궁가(宮家)가 갯벌(어장)과 염전(염분)을 사유화하고 세금마저 내지 않는 이른바 어염(魚鹽) 면세 특권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인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인조 7년(1629) 경연에서도 이 문제를 재차 제기했다.
"호남 연해의 백성들은 어염(魚鹽)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데, 공가(公家)에서 무역하여 판매하면서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무척 그 일을 원망하며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없애 준다면 백성이 소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9월 6일, 신계영의 경연 발언
사헌부 장령 재직 시인 인조 4년(1626)에는 다음과 같은 직접적인 상소도 올렸다.
"국가의 이익이 사문(私門)으로 돌아가고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는데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거대한 폐단 중 어염을 면세해 주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4년 8월 12일, 신계영의 상소 중 발췌
임금이 이를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관례라며 거절하자, 스스로 직을 내려놓고 처분을 기다리는(퇴대물론, 退待物論) 강단 있는 언관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염 면세 특권은 끝내 제도적으로 혁파되지 못했으며, 이 문제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된 고질적 폐단으로 남았다.
인조 7~8년(1629~1630) 홍문관 검토관으로서 경연에 다수 참여했다. 임금의 정심(正心)·수신(修身)이 곧 명철한 정치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사관(史官)이 임금의 모든 거동을 기록하는 것이 제왕 통치의 원칙임을 직언하는 등 학문적 면모를 보였다.
1632년(인조 10년), 인조가 부친 원종(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자, 신계영은 수찬 윤계(尹棨), 이명웅(李命雄)과 함께 이것이 예법에 어긋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에 인조가 대노하여 세 사람을 성문 밖으로 방출하는 엄중한 처벌을 내렸으나, 이후 심리 결과에 따라 용서를 명받고 복권되었다.
1633년(인조 11년)~1634년(인조 12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부총(副摠) 정룡(程龍)의 접반사(接伴使)로 임명되어 가산(嘉山)에서 한양까지 그를 수행했다. 정룡은 가도(椵島) 내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세력의 동향을 탐사하러 온 인물이었으며, 신계영은 그와의 비밀 면담에서 조선의 입장을 조율하는 민감한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같은 해 인조 9년(1631) 가도(椵島)에 교리 자격으로 파견되어 난(亂)에 전사한 명나라 장사들을 조제(吊祭)하고 임시 수장들에게 예를 올리는 임무도 수행했다.
1634년(인조 12년) 5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인조가 강석기(姜碩期) 삭출(削黜) 전지를 내리자, 신계영은 좌승지 이경헌(李景憲)·우부승지 이덕수(李德洙)와 함께 이 명령이 부당하다며 봉행을 거부하고 의금부에서 대죄(待罪)하는 강직한 행동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신계영은 파직되었으나, 임금의 부당한 전지에 집단으로 맞선 것은 당시 승지 직분의 원칙을 지킨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2.4. 병자호란과 속환사 파견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성이 포위되고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인조가 결국 성을 나가 청나라에 항복(출성)하려 하자, 신계영은 왕 앞을 가로막고 통곡하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차라리 한 번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예로부터 국군(國君)이 견양(犬羊,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보전한 예가 있사옵니까?"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월 26일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뒤, 1637년(인조 15년) 2월 인조는 호조 참의 신계영을 강화도로 급파하여 전란으로 흩어진 창곡(倉穀)을 수습하고 교동(喬桐)에 피란 중이던 원손(元孫)을 보호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 조정은 신계영을 속환사(贖還使)로 임명하여 심양(瀋陽)에 파견했다. 적국의 심장부로 들어가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의 몸값을 치르고 구출해 오는 가장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임무였다. 출발 전 윤4월에는 "조정이 지급한 관향은(管餉銀) 2천 5백 냥으로는 족속이 없는 백성까지 속환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예산을 늘려 달라"고 상주하여 추가 지원을 받았다.
그는 포로 송환만을 전담할 무관을 따로 차출해 데려가는 등 실무를 치밀하게 챙겼다. 비바람을 맞으며 노숙하는 혹독한 일정 탓에 귀국 직후 심한 이질과 학질에 걸려 앓아누울 정도로 몸을 혹사하며 백성들을 구출하는 데 매진했다.
속환사 임무를 마친 직후인 1637년(인조 15년) 9월, 병자호란 당시 함락되어 초토화된 국가 요충지인 강화도의 행정 책임자, 강화 유수(江都留守)로 제수되었다.
초기에는 무관이 아닌 그가 방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조정의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인조 16년(1638) 1월, 차왜(差倭)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최명길이 "유수 신계영은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며 김신국으로의 교체를 건의했고 인조가 이를 받아들여 교체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비변사에서 "신계영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본부(강화부) 사람들의 인심을 꽤 얻었다(頗得本府人心)"고 평가하며 유임을 강력히 건의하여, 결국 복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5. 심양 입성 기피 논란
강화 유수 이후에도 세자를 모시는 빈객(賓客)으로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청나라 심양에 들어가야 하는 직임의 특성상 노구를 이유로 거듭 회피하여 논란이 되었다.
1638년(인조 16년) 7월, 부빈객(副賓客)으로 새로 임명되고 나서 무릎 병을 핑계로 곧바로 병가를 냈다. 사헌부는 "새로 임명되자마자 병을 핑계 삼았다"며 탄핵하였고, 추고 처분이 내려졌다.
1641년(인조 19년)에도 순천 부사로 재임 중 빈객 임무를 피했다는 이유로 헌부의 파직 건의가 올라왔으며, 이에 인조는 이조 당상과 해당 승지를 추고하고 신계영은 체차(遞差)하라고 명했다. 이 두 사건은 조선의 모든 중신이 죽음이 두려운 심양 입성을 기피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간적 부침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90세 장수(長壽)
혹독한 전란과 수차례의 파직·추고를 거친 삶에도 불구하고, 신계영은 90세가 넘도록 장수하며 국왕들의 지극한 예우를 받는 국로(國老)가 되었다.
1652년(효종 3년) 5월,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사은사 사절단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었으나 출발 전 신유(申濡)로 교체되었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중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1656년(효종 7년) 80세의 나이에 이르러 우로(優老)의 은전을 받아 정2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이후 관직 일선에서 물러나 충청남도 예산에 머물고 있던 그가 1666년(현종 7년) 마침내 90세가 되자, 현종은 그를 파격적으로 종1품에 초승(超陞)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 품계인 정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이듬해인 1667년(현종 8년), 현종이 온양 행궁에 머물 때 90세 노구의 신계영이 임금을 뵙고자 행궁을 찾아왔다. 이때 현종은 "기노(耆老)의 사람이 만나고 싶어 하니 조용히 들어오게 하라"며 젊은 환관을 시켜 그를 직접 부축하여 들어오게 하는 등 극진히 예우했다.
현종: "경이 이토록 늙은 나이로 어렵고 먼 길을 오다니, 내가 매우 기쁘다."
신계영: "신이 곧 죽을 나이로 이런 대면하는 은혜를 입으니, 비록 당장 개나 말처럼 쓰러져 죽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현종 8년 윤4월 8일
신계영은 이 자리에서 간쟁하다 귀양 보내진 신하들의 방면도 청하는 등 노구에도 불구하고 언관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1669년(현종 10년) 사망하니 향년 93세였다.
4. 평가
신계영은 조선 중후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철저한 실무형 관료였다. 대일 외교(회답사 사행), 명나라 접반(정룡 접반사), 대청 외교(심양 속환사) 등 조선의 핵심 외교 현안마다 실무 책임자로 현장에 있었으며, 암행어사·강화 유수·호조 참판 등 행정 전반에서도 폭넓게 활약했다.
언관으로서는 어염 면세 특권 비판, 원종 추존 반대 등 왕실과의 정면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해군 대 권신에게 부합하여 관직을 얻었다는 당대의 사평(史評)이 남아 있으며, 심양 입성 기피 논란으로 두 차례 탄핵을 받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러한 그의 굳은 절개와 공로는 사후 100년이 지난 1769년(영조 45년)에 재조명받아, 영조로부터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추증받기에 이른다. '정(靖)'은 나라를 편안히 한다는 뜻, '헌(憲)'은 법도를 밝힌다는 뜻으로, 그의 생애와 행적을 압축한 시호로 평가된다.
후손들은 그가 닦아놓은 탄탄한 명성과 기반 위에서 대대로 관직을 이어나갔다. 직계 후손으로는 숙종 대 안산·양근 군수를 지낸 증손자 신수화, 영조 대 사재감 첨정을 지낸 현손자 신최언, 순조 대 군자감 판관을 지낸 7대손 신경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