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사상가, 학자, 항일운동가이자 온건개화파 인물이다.
동도서기론을 죽기 직전까지 고수하였다.
2. 일생
그는 1884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개화당 내각에 들어갔다.
그는 급진 개화파가 온건 개화파를 제거했을 때 제거 당하지 않았다.
또한 1894년 갑오개혁 때도 참여하여 김홍집 친일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였고 1896년 을미의병 시기에는 남로선유사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도서기론 사고 방식이 매우 강해 결국 독립협회와는 대립하게 된다. 그로 인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고 복귀되기를 반복한다. 특히 1898년 법부대신 시절 나륙법과 대역참형을 복구하려 했는데, 이때는 김홍륙이 고종과 순종 부자를 독살하려다가 실패했고 김홍륙이 처형당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연좌제 부활 시도로 맹렬한 공격을 받고 뒤이어 고발·탄핵되자 이를 버틸 수 없게 된 고종에 의해 면직되었다.
그는 을사조약 때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 뒤 의정부참정을 거쳐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1907년에는 신과 구를 합일하겠다는 취지로 민병석, 이용직과 함께 대동학회를 조직하였으나 신채호에게 비난을 받고 박은식과 장지연이 이에 맞서 대동교를 창설하였으며, 이후 의병을 일으킨 허위에게 투항을 권하였다. 1909년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성학을 일으켜 세우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면 저승에서도 한이 없겠다.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일본 통감부에선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일본에선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 申箕善
申箕善은 어렸을 때 任憲晦라고 칭하는 학자의 문하에서 배운 선비이다. 甲申年의 옥사로 인하여 絶島에 유배되었다가 甲午年에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 丙申年에는 匪徒의 宣諭使에 임명되었고 戊戌年에 법부대신이 되자 도륙의 典을 복구할 것을 건의하고 그가 中樞院議長에 임명되자 起復을 防遏하였다. 군부대신이었던 때에 楊武艦 매도 약정을 정부를 경유하지 않고 사사로이 개인이 成券하고 또한 운동비를 다수 착복하였다는 풍문이 있다. 同人은 학자이지만 처세술에 뛰어나 그 시대에 세력 있는 자에게 용케 환심을 사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몇 해 전부터 嚴俊源과 교제하여 관직이 몸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玄暎運 부부와도 內附하여 황제 앞에서 그럴듯하게 얼버무려 참정대신에 임명된 일도 있다. 李容泰·趙秉式·金永根·許蔿·李根澤·閔泳綺·姜錫鎬·金宗漢·金嘉鎭·李鳳來·李寅榮·閔景植·尹德榮 등과는 특별히 각별한 사이이며, 保民會·共濟會·褓負商 등과도 관계하였다. 1907년 일본인 佐伯剛平과 친밀한 교제를 맺어 日韓同志會 조직에 종사하였는데, 朴泳孝의 구류 때문에 주저하다가 同會의 조직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趙重應·宋秉畯에게 빌붙어 掌禮院卿이 되어 李道宰·南廷哲 등으로부터 擯斥을 당하였다. 그는 언제나 세력 앞에 무릎을 꿇는 자라고 비평받고 있다. 1909년 초봄에 죽었다.
출처: 일본 통감부 문서 韓國 官人의 경력 일반
한국에서 근대적인 장성 계급을 처음 부여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895년 5월 10일에 군부대신으로 임용되면서 중장에 해당하는 부장 계급을 받았다.
3. 기타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4. 저서
《양원집(陽園集)》, 《유학경위(儒學經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