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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신보안(辛保安)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22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전기의 무신 겸 관료. 본관은 영월 신씨(寧越 辛氏)

중랑장, 지자주사, 한성 소윤, 판선공감사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정3품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태종 대에는 역모와 관련된 유언비어를 고발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인신(印信) 미반납, 건축 공사 부실, 무고 사건 연루 등 관직 생활 중 여러 차례 사법적 처벌을 받았다.

특히 전라도 광주 목사(光州牧使) 재임 중, 관할 지역의 기생과 간통했다가 그 남편에게 발각되어 수령으로서 관할 백성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질(痢疾)에 걸려 사망하였으나, 사후 이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가해자는 강상(綱常)죄로 처벌받고 광주목은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산·영월 신씨 대동보에 따르면 판서공파(判書公派) 15세에 해당하며, 1628년(인조 6년) 간행된 영월 신씨 족보인 《세보요략(世譜要略)》 기준으로는 영월 신씨 6세손이다. 묘소는 과거 양주(楊州) 관할이었던 노원리(蘆原里)에 조성되었다.

2. 생애 및 관직 활동

2.1. 무신 및 지방관 활동

신보안은 조선 초기 무신(武臣)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태조 6년(1397) 중랑장(中郞將) 신분으로 서북면에 파견되어 도찰리사 김주(金湊)에게 임금의 하사품인 술을 전달하는 등 왕명을 수행했다.

태종 6년(1406)에는 평안도 자주(慈州)의 수령인 지자주사(知慈州事)로 재임 중이었다. 당시 전 호군 이운계가 "상왕(정종)과 주상(태종) 사이에 틈이 생겼으며, 상왕의 복위 명이 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를 전해 들은 지순주사 김인의가 신보안에게 비밀히 글을 보내 동참을 유도했다. 신보안은 이에 동조하지 않고 해당 서신을 도순문사 조박에게 바쳐 고발하였다. 이 고발로 인해 관련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았으며, 신보안은 역모를 방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2. 논란과 사법적 처벌

태종 초반의 공로를 바탕으로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업무 수행 과정의 실수와 구설수로 인해 사헌부 등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태종 10년(1410), 동북면 경차관(東北面敬差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국가의 공식 도장인 인신(印信)을 4개월 동안 관청에 반납하지 않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그는 장(杖) 80대에 해당하는 죄를 적용받아 외방에 부처(付處, 거주지를 제한하는 형벌)되었다.

태종 13년(1413)에는 한성부 소윤(漢城少尹)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도염서 영 정개석이 신보안의 이름을 도용하여 가짜 신분보증서를 만들어 군자감의 쌀 10석을 가로채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보안 본인은 모르는 일이었으나, 태종은 "신보안은 실지로는 알지 못하였으나 뒤에 반드시 징계를 당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세종이 즉위한 1419년(세종 1년) 4월에는 두 건의 사건에 연달아 연루되었다. 먼저,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로서 상왕(태종)의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문 밖 행랑 건립 공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지형의 높낮이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여 건물이 기울어지게 지어졌고, 상왕의 명에 의해 건물을 헐고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하옥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무고(誣告)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처벌을 받았다. 선공 판관 강순이 동료인 부정 윤인을 시기하여 "윤인이 국가 재목과 철물을 도용했다"고 거짓 소장을 꾸몄는데, 신보안과 박자청이 강순의 말에 동조하여 승정원에 윤인을 고발한 것이다. 조사 결과 윤인의 결백이 증명되고 강순의 고발이 무고로 밝혀지면서, 신보안은 곤장 100대에 처해졌으나 관리 신분을 고려하여 속전(贖錢)으로 처벌을 갈음받았다.]

3. 광주 목사 시절의 사건

1428년(세종 10년) 무렵, 전라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재임하던 신보안은 자신의 몸종 오한(吳漢)을 시켜 고을의 관기(官妓) 소매(小梅)를 중매하게 하여 간통했다.

당시 소매에게는 전 만호(萬戶) 노흥준(盧興俊)이라는 남편이 있었다. 그해 4월, "목사가 밤에 소매와 함께 방에 있다"는 말을 들은 노흥준은 관아를 찾아갔다. 소매는 창문을 넘어 달아났고, 노흥준은 방에 들어와 신보안의 옆구리와 볼기, 무릎 등을 걷어차며 폭행했다.

백성이 수령을 구타한 사건이었으나, 신보안은 몸종들에게 "악인 노흥준이 나를 욕보였다. 아예 이 말을 내지 말라"며 사건을 덮으려 했다. 며칠 뒤 노흥준이 소매의 머리털을 자르고 출입을 막는 행동을 했을 때에도, 신보안은 별다른 조치 없이 소매의 이름을 기생 명부(기적)에서 지우는 데 그쳤다. 실록에 따르면 신보안이 보복을 포기한 이유는 본인이 평소에 저지른 장오죄(贓汚罪, 뇌물 등 부정부패)가 탄로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뒤인 7월 22일, 신보안이 병으로 사망했다. 처음에는 폭행으로 인한 장독(杖毒)이 원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심문 도중 용의자인 오한이 옥중에서 자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매를 맞은 시기와 사망 시기 사이에 수개월의 간격이 있었고 기생과 의원의 증언을 통해 실제 사인은 이질(痢疾)임이 밝혀졌다.

4. 광주목 강등 사태

신보안의 직접적인 사인이 질병으로 밝혀졌으나, 이 사건은 조정에서 중대한 문제로 다루어졌다. 관할 백성이 수령을 구타하고 모욕한 행위는 조선의 통치 윤리를 위반하는 강상(綱常)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가해자 노흥준은 장(杖) 1백 대를 맞고 변방의 군졸로 충원(充員)되는 처벌을 받았으며, 집이 헐리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여 밝히지 못한 관찰사 한혜, 도사 오치선, 감찰 이안상 등은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신보안이 다스리던 광주목(光州牧)은 수령을 구타한 강상죄가 일어난 고을이라는 이유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 고을의 읍격 강등은 당시 지역민들에게 연대 책임을 묻고 행정적 불이익이 따르는 조치였다. 더불어 사간원에서는 도덕적 결함이 있는 자가 행정 실적(전최)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승진하는 인사 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기도 했다.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는 21년이 흐른 문종 1년(1451)에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당시 전라도 무진군 경재소(京在所) 소속이던 이개(李豈)와 좌의정 황보인 등이 "노흥준 한 사람이 범한 일 때문에 20여 년이나 고을 전체가 억울함을 참고 있다"며 상언하였고, 문종이 이를 윤허하여 옛 호칭인 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보안 본인이 사망에 이르기 전 수모를 겪었음은 물론, 그가 다스리던 고을 역시 20여 년간 강등되는 결과를 낳았다.

5. 가족 및 후손

1628년(인조 6년) 신응순(辛應純)이 편찬한 《세보요략(世譜要略)》 및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신보안의 두 아들과 관련된 행적은 다음과 같다.

장남 신사봉(辛斯鳳)

신보안이 광주 목사 재임 중 노흥준에게 구타당했을 때, 아버지의 장오죄가 탄로 날 것을 우려해 원수를 갚지 않고 사건을 덮으려 했던 인물이다. 훗날 세조 3년(1457) 행 부사직(行副司直)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차남 신사구(辛斯龜)

어모장군(禦侮將軍)의 관칭을 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실제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다. 《세보요략》에 따르면, 아버지 신보안이 영광(靈光) 군수로 재임 당시 영광의 사족 한이(韓彛)와 친분이 두터웠다. 이에 신보안은 차남 신사구를 한이의 딸과 혼인시킨 뒤 영광 도내리(道內里)에 머물며 정착하게 하였다. 이 혼연을 계기로 신사구는 영월 신씨 영광 입향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영광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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