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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신시근(辛蓍根)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13 목록 댓글 0

1. 개요

"성질견확 불교권배(性質堅確 不交權輩)"

성품이 굳세고 확고하여 권세를 부리는 무리들과 사귀지 않았다.

영산 신씨 족보 중 신시근에 대한 평

조선 순조 대의 문신. 본관은 영산 신씨(靈山 辛氏) 덕재공파, 자(字)는 자원(子圓)이다. 초휘(어릴 적 이름)는 시근(始根)이었다.

1805년(순조 5년) 국가에 경사가 겹쳐 치러진 사경(四慶) 특별 과거에서 1만 장이 넘는 답안지 중 단 6명만을 선발하는 바늘구멍을 뚫고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초기에는 사직단 제례를 총괄하는 단사령(壇司令)과 능침 보수를 담당하는 홍릉령(弘陵令) 등을 맡았다. 이 시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인사 고과에서 연속으로 최상위 등급인 '상(上)'을 받고, 순조로부터 직접 승진(陞六)과 포상을 받는 등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후 1820년(순조 20년) 사헌부 지평(持平)에 신통(新通)되며 정통 대간(臺諫)의 반열에 올라 중앙 정계의 주요 정치적 사안을 다루었다. 특히 그가 지평에 임명된 덕분에, 평생 벼슬이 없던 부친 신지복(辛之復)이 70세의 나이에 정3품 당상관에 오르는 가문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826년(순조 26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조정에 큰 옥사(신강·황윤중 사건)가 벌어지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을 심문하는 역할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국왕이 직접 역마를 보내어 급히 상경하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청안(淸安)에 머물며 한 달 가까이 소환에 응하지 않는(패불진, 牌不進) 고집을 보여주었다. 이는 권력 다툼을 멀리하고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결국 순조의 배려 섞인 조치(허체, 許遞)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2. 생애

2.1. 과거 급제

충청도 청안(淸安)에 거주하던 신시근은 1805년(순조 5년) 정순왕후의 회갑과 인정전 완공 등을 기념하는 사경(四慶) 경과(慶科) 정시에 응시하였다. 당시 창경궁 춘당대에는 무려 53,785명의 유생이 운집하였고, 최종적으로 10,259장의 답안지가 제출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김조순을 통해 순조는 단 6명만 선발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신시근은 약 1,7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자(병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시제(試題)는 '용지향인용지방국이화천하(用之鄕人用之邦國以化天下)'였으며, 이는 지방에 은거하던 그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자신의 포부를 완벽히 증명해 낸 결과였다.

2.2. 관직생활 초년

관직 초기 그는 의례와 국가 시설물을 관리하는 분야에서 활동했다. 1812년부터 1817년까지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과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弘陵) 등의 능침 보수 공사를 지휘하였다.

특히 1816년 홍릉 수개(修改) 당시, 본릉령이자 겸감역(兼監役)으로서 공사를 완수한 공로를 인정받아 순조의 특명으로 참상관인 6품으로 승진(陞六)하는 파격적인 은전을 입었다. 이듬해인 1817년에도 순조의 친제(親祭)를 완벽히 보좌하여 연이어 승서(陞敍)되는 등, 당시 인사 고과(포폄등록)에서 수차례 최상위인 '상(上)' 등급을 받았다.

1818년(순조 18년)에는 국가의 근간인 사직단의 실무 총괄인 단사령(壇司令)을 역임하며 기곡대제(祈穀大祭) 등 중대한 제례를 주관하였다. 윤대관(輪對官) 자격으로 순조를 직접 대면하여 사직단의 운영 상황을 보고하는 등 국가 의례 체계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819년에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서 군사 행정과 궁궐 경비(宣傳官廳) 실무에도 관여하였다.

2.3. 삼사(三司) 대간 활동

현장 실무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 그는 1820년(순조 20년) 10월, 마침내 청요직의 상징인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에 신통(新通)되었다. 11월 20일 정식 발령 당시 함께 임명된 동기 중에는 훗날의 거장 추사 김정희(설서 임명)와 자하 신위(승지 임명) 등 당대의 명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820년(순조 20) 11월 20일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신시근은 부임 사흘 만에 강직한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지방 수령 임명을 최종 승인하는 서경(署經) 절차에서 국왕의 소집 명령(牌)을 단호히 거부하는 위패(違牌)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당시 임명된 인사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하거나, 부적절한 인사 행정에 대한 원칙적인 항의의 표시였다. 갓 부임한 하급 대간으로서 국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파직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권한인 서경권을 통해 공직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나, 훗날 사간원 정언에 다시 기용되는 등 그의 원칙주의적 성정은 조정 내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4. 패불진(牌不進) 사태와 은퇴

1826년(순조 26년) 4월 14일, 조정의 인사 쇄신 과정에서 박규수 등과 함께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서얼 허통 문제 등으로 불거진 '신강(申綱)·황윤중(黃允中) 옥사'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고향인 충청도 청안에 머물고 있던 신시근에게 순조는 "역마(驛馬)를 타고 즉시 올라오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그는 권력 다툼과 남을 국문하는 자리에 서기를 거부하며 한 달 넘게 어명에 응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파직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순조는 끝까지 그를 감싸며 파직 대신 대간 전체를 교체하는 방식(허체, 許遞)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어 주었다.

흥미롭게도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1826년 6월 25일은, 당시 암행어사였던 김정희가 충청도 일대 수령들의 탐학을 낱낱이 고발하는 장계를 올린 날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가 왜 그토록 고향에 머물며 중앙 정치의 탁류를 멀리하려 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여생을 마쳤다.

3. 가족 관계

조부: 신집(辛鏶)

부: 신지복(辛之復)

평생 벼슬을 지내지 않았으나, 아들 신시근이 대간(사헌부 지평)에 오른 덕분에 70세의 나이에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당상관) 품계를 받았다.

모: 함양 여씨(咸陽 呂氏)

배우자: 숙인 울산 박씨(淑人 蔚山 朴氏)

진사(進士) 박성(朴鍟)의 딸

장녀: 영산 신씨(1802~1849)

묘소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북면(加北面)에 위치해 있다.

사위: 이종택(李鐘擇, 1807~1860)

초명은 한배(漢培).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18세손이다. 신시근의 가문이 당대 중앙 정계에서 왕실 종친과 맺은 수준 높은 혼맥을 증명하는 인물이다. 장녀 영산 신씨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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