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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신영손(辛永孫)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10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 신씨(寧越 辛氏)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된 소윤(少尹) 신이의 아들이다. 세종 대에 능력을 인정받아 임금의 특지(特旨)로 당상관(堂上官)에 오르며 가문을 다시 중흥시켰다.

이후 단종 대를 거쳐 세조 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 도(道)의 최고 책임자를 역임했다. 재임 중 세조로부터 직접 군사 동원 권한을 상징하는 밀부(密符)를 하사받는 등, 행정과 국방 실무를 총괄한 핵심 관료로 활동했다.

2. 생애

2.1. 세종 대의 관직 활동

1418년(세종 즉위년) 국구 심온(沈溫) 사건에 연좌되어 아버지 신이(辛頤)가 파직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신영손은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가문을 재건했다. 세종은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여 규례를 뛰어넘어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키는 특지(特旨)를 내렸다.

세종 23년(1441)에는 승정원 주서(注書, 정7품)로서 국왕의 명을 받아 이천(伊川) 온정(溫井)의 행궁 영조(營造) 상황을 감찰하고 돌아와 제도의 장려함을 보고하는 등,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핵심 실무를 수행했다.

특히 세종 29년(1447),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서사시 《용비어천가》가 편찬될 당시, 왕명에 따라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등 집현전의 핵심 학사들과 함께 한문의 주해(註解) 및 음훈(音訓)을 다는 국가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2.2. 단종 대의 지방 축성 감독

행정 실무와 토목에 밝았던 그는 지방관으로 파견되어서도 주요 국책 사업을 맡았다. 단종 즉위년(1452) 9월에는 전라도로 파견되어 영광성(靈光城) 축조를 총괄 감독(監築)하였다. 이는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연해 읍성 축조 사업의 일환이었다.

2.3. 세조 대의 관찰사 역임

세조 대에 이르러 도(道)의 최고 책임자인 관찰사(觀察使, 종2품)로 승진하였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며 지방의 행정, 조세, 군사 실무를 총괄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세조 10년(1464) 2월에는, 온양과 진천 일대로 거둥하던 세조의 어가(御駕)를 도계(道界)에서 직접 맞이했다. 당시 신영손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진을 쳤는데, 실록은 이때 "군대의 장비가 매우 성(盛)하였다"고 기록하여 그의 철저한 방비 태세와 군사 통솔력을 전하고 있다.

또한 관찰사 재임 중 세조로부터 군사 동원 권한의 증표인 밀부(密符)를 직접 하사받았다. 국방과 병권(兵權)을 강하게 통제했던 세조 치하에서, 지방 수장으로서 높은 수준의 군사적 권한과 임금의 굳건한 신임을 위임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3. 가족 관계

아버지 세대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고위직에 오름으로써, 세 아들이 모두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아버지: 신이(辛頤) - 13세. 태종 대 경기 경력, 소윤 역임. 1418년 파직

장남: 신백거(辛伯琚) - 15세

차남: 신중거(辛仲琚) - 15세. 사헌부 지평, 영안도 경차관 역임. 야인 정벌 당시 서정 종사관(西征從事官)으로 만포에 출진했다.

사남: 신계거(辛季琚) - 15세. 성종 8년(1477) 문과 장원 급제. 사헌부 장령 등 핵심 언관직 역임.

4. 평가

아버지 세대의 정치적 연좌로 인한 불이익을 학문과 실무 능력으로 돌파하여 가문을 재건한 인물이다. 세종의 특지로 당상관에 오른 후, 단종과 세조 대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숙청되지 않고 도(道) 단위의 최고 책임자인 관찰사를 연이어 역임하였다.

《용비어천가》 주해에 참여할 만큼 학식이 깊었으며, 동시에 영광성 축조, 국왕 영접, 밀부 수여 등에서 볼 수 있듯 토목과 국방 실무에도 밝았다. 조선 전기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학문과 행정, 군사 실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한 핵심 관료로 평가된다.

5. 여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20여 차례 이상 등장하며, 세종 대부터 세조 대에 이르는 여러 정치·행정 기사에 실무 책임자로서 그의 보고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두 아들인 신중거와 신계거가 각각 국방·감찰 분야와 과거 장원 급제라는 뚜렷한 성과를 내며 중앙 정계에 자리 잡은 것은, 신영손이 당상관과 관찰사를 지내며 다져놓은 가문의 정치적·사회적 기반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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