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 신씨(寧越 辛氏)
태종 대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경기 경력(京畿經歷), 소윤(少尹)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태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직접 의복을 하사받기도 했으며, 재난 상황에서 상급자의 축소 보고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피해 실상을 직언한 실무 관료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측근 세력으로 활동하다 견제를 받았고, 왕조 교체기인 1418년(세종 즉위년) 외척 심온(沈溫) 사건에 연루되어 두 아우와 함께 관직에서 파면되는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그의 관료 생활은 파직으로 끝났으나, 훗날 아들 신영손이 관찰사에 오르며 가문이 중앙 정계에 안착하는 기반이 되었다.
2. 생애
2.1. 경기 경력 재임
태종 치세 중반, 경기도의 실무를 담당하는 종4품 경기 경력(京畿經歷)으로 재직했다. 태종 14년(1414) 윤9월,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직접 겹옷(협의, 裌衣) 한 벌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인 태종 15년(1415) 7월, 가뭄과 강풍으로 인한 경기도 일대의 농작물 피해를 조사할 당시, 양주 부사(楊州府使) 최식(崔湜)이 "양주에는 피해가 없다"고 축소 보고한 것과 대조적으로, 신이는 "화곡(禾穀)의 10분의 9가 손실되었다"고 실제 피해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는 상급 관원의 허위 보고에 동조하지 않고 현장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한 기록이다.
2.2. 양녕대군 측근 활동
이후 소윤(少尹, 종4품)으로 승진하여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으나, 당시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을 둘러싼 권력 집단과 얽히게 된다.
태종 17년(1417) 발생한 구종수(具宗秀) 형제의 대역 사건 기록에 따르면, 신이는 이전에 대호군 임군례(任君禮), 구종수 등과 결당하여 세도(勢道)를 부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사람들은 임군례(임오방)와 구종수(구오방) 무리의 전횡을 비꼬아 십방(十方)이라 불렀는데, 신이는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3. 심온 사건 연루
왕조 교체기인 1418년(세종 즉위년) 12월, 태종(상왕)이 주도한 외척 숙청 작업인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상의원 별감 임군례 등과 함께 심온에게 친밀하게 의존했다는 이유로 파직 처분을 받았다.
이때 형조 좌랑(刑曹佐郞)이던 동생 신회(辛回)와 사복 직장(司僕直長)이던 동생 신헌(辛憲)도 함께 파면되었다. 삼형제가 동시에 관직을 박탈당한 이 사건 이후로 신이의 추가적인 관직 활동 기록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3. 가족 관계
고려 말 공신이었던 조부 신렴의 뒤를 이어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파직 이후 그의 가계는 아들 신영손을 통해 조선 조정의 관찰사 및 고위 실무 관료 계층으로 이어졌다.
조부: 신렴(辛廉) - 고려 공민왕 대 밀직부사, 연저수종 3등 공신
형: 신회(辛回) - 태종 14년 사헌부 감찰 역임. 세종 대 연천 현감으로 복권
동생: 신헌(辛憲) - 사복 직장(司僕直長) 역임. 세종 즉위년 심온 사건으로 동반 파직
아들: 신영손(辛永孫) - 세조 대 충청도 및 황해도 관찰사 역임
4. 평가
태종 대에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국왕의 포상(의복 하사)을 받고, 관할 지방관의 축소 보고를 정정하여 재난 상황의 실태를 파악하는 등 현장 실무에 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중앙 정계에서 양녕대군 측근 세력 및 국구 심온(沈溫) 세력과 교류하다가, 왕권 강화와 외척 숙청이라는 국면에 휘말려 관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고려 말 공신 가문이 조선 초 권력 투쟁을 거치며 관찰사 등 지방관을 배출하는 가계로 이어지는 중간 징검다리 역할을 한 인물이다.
5. 여담
태종 15년(1415) 경기도 풍해(風害) 조사 당시, 관할 수령인 양주 부사 최식이 피해가 없다고 보고한 것과 달리 경기 경력이던 신이가 9할 손실을 직언한 일화는 조선 초기 중앙 파견 관원과 관할 수령 간의 교차 검증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418년 심온 사건 당시 신회, 신이, 신헌 삼형제가 모두 관직에서 동시 파면된 기록은, 당시 이들이 심온 가문과 밀접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