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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신잡(申磼)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35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시기 선조를 모시는 데 일조하여 호성 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니탕개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웠으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사한 신립의 형이다.

2. 생애

조부는 형조판서 신상(申鏛)이고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 어머니는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 1541년(중종 36년)생으로 전해지나,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68년(선조 1년) 증광시 2등 13위로 급제해 생원에 입격했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583년(선조 16년)이 되어서야 정시 병과 3위로 급제했다. 3년 후인 1586년(선조 19년) 6월 20일 정언(正言)에 선임되었다.

1588년(선조 21년) 충주에서 일본국 사신 평렴계(平廉繼)가 하인에게 구타당한 사건에 대해 충주 목사와 판관을 파직하라고 청해 승인받았다. 1년 후 지평(持平)에 오른 신잡은 전 제독관 조헌이 연이어 봉장(封章)을 올려 모든 경상(卿相)을 내리 비난한 것에 대해 양사가 탄핵할 때 참여했는데,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의 상소에 "조헌이 선견지명이 있는데 삼사가 군부를 위협하여 먼 지역에 찬배시켰다."라고 비난한 내용이 있자 사직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1년(선조 24년),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이산해와 류성룡이 역적 정여립과 관련있다고 비난하자, 선조는 그날로 이산해와 류성룡을 인견하고 위로한 뒤 정암수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신잡 등 전임 사간원과 사헌부 인사들이 정암수를 두둔했다가 새로 선임된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우승지에 오른 신잡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동생 신립이 일본군과 맞서다 패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소집된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선조가 파천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대신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부당함을 극언했는데, 신잡은 이렇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28일자 기사.

그러나 오직 영의정 이산해만은 그저 울기만하다가 신잡에게 옛날에도 피난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신들은 이산해를 비난했고, 양사가 합계하여 이산해의 파면을 청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신잡은 선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사람들이 위구심을 갖고 있으니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시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28일자 기사.

선조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선조가 피난할 때 우승지로서 동행한 신잡은 5월 2일 개성에서 병조 정랑 구성(具宬)과 함께 선조를 청대(請對)하여 파천을 처음으로 논한 이산해의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선조가 반론했다.

"파천을 결정한 날 간하여 말리지 못한 죄는 영상이나 류성룡이 같은데, 어찌하여 지금 유독 영상만 논하고 성룡은 언급하지 않는가? 만약 영상을 죄준다면 성룡까지 아울러 파직해야 할 것이다."

이에 신잡이 "여항(閭巷)에서 전하는 말들도 이와 같습니다."라며 여론 역시 이산해를 처벌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거부했다.

"죄를 줄 수는 없다. 천지 귀신이 위에 있거늘 누구는 죄주고 누구는 보호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2일자 기사.

그 후 선조로부터 교서(敎書)를 받아서 경성의 사민(士民)들을 깨우치고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과 도원수 김명원을 효유하려 했으나,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이에 선조가 신잡을 인견하며 물었다.

"적세가 어떠하던가?"

신잡이 답했다.

유시(酉時) 말에 혜음령(惠音嶺)에 도착했다가 도로 동파(東坡)로 왔는데, 이각·성응길(成應吉) 등이 적을 방어하지 못하고 다들 이미 후퇴했습니다."

이후 선조가 적이 한강을 이미 건넜냐고 묻자, 신잡은 이상홍(李尙弘)과 함께 "어제 저녁에 이미 입성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속히 피해야겠다고 선언하고, 밤에 떠났다간 뜻밖의 변을 당할 수 있다는 윤두수 등의 만류를 뿌리치고 속히 피신하기로 했다. 이후 선조가 "평양에 닿을 수는 있겠는가?"라고 묻자, 신잡이 답했다.

"여기서는 조치할 수 없지만 서경(西京)으로 행행(行幸)하신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3일자 기사.

평양으로 피신한 후인 1592년 5월 9일 이조참판에 재수되었다. 다음 날 양사가 선조의 교지를 유도대장과 도원수에게 전해야 했는데도, 적이 경성에 이르렀다는 헛소문에 겁을 먹고 되돌아온 것에 대해 비판하며 속히 파직시키라고 요청했지만, 선조는 "그 당시 헛소문이 아니라 사세가 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라며 지금 와서 논하지 말라고 답했다. 7월 13일에는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양사가 7월 23일 "신잡이 일찍이 호송해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받았는데 이제 또 자헌(資憲)으로 뛰어오르는 등 출세가 너무 빠르다며 신잡의 가자를 개정해달라고 청했지만, 선조는 "이런 때에 내력(來歷)을 따지겠는가. 고칠 수 없다."라며 거부했다.

1592년(선조 25년) 8월 2일, 선조는 비변사 당상을 인견한 뒤 "만일 불행하여 적세가 온 나라에 가득 찬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신잡이 아뢰었다.

"현재에는 다만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 바다로 나가는 것, 수상으로 가는 것 이 세 계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장전보(長奠堡)에 머물러 있기만을 허락했을 뿐이니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의당 정주(定州)에 가서 사변의 추이를 살피든지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수상으로 가든지 편의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후 선조가 요동으로 파천하겠다고 밝히자, 신잡이 강하게 만대했다.

"인심이 차츰 안정되는 까닭은 대가(大駕)가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도(道)의 인심이 크게 소란한 까닭은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일 장전(長奠)으로 간다면 그 중간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만 난에 임하여 강을 건너게 될 때 그곳의 인심 또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에 선조가 "이 말은 지나치다."라고 하자, 신잡이 더 강하게 말했다.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이후 대신들이 차례로 나갈 때, 선조는 나가려는 신잡을 만류하면서 물었다.

"경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곘는가?"

신잡이 답했다.

"의당 전진하여 수습할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자 기사.

사흘 후 동생 신급이 어머니를 모시고 이천 지방으로 피란했다가 적병을 만나 자살했다는 소식과 노모가 바위에서 떨어져 발을 다쳐 양식이 끊어진 채 그대로 굶어죽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신잡은 돌아가서 노모를 뵙고 싶으니 열흘의 휴가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선조는 사실 확인을 위해 탐문꾼을 먼저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후 여러 회의에 계속 참석한 걸 볼 때, 휴가를 다녀오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1593년(선조 26년) 1월 30일,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595년(선조 28년) 7월 25일, 신잡이 조정에 치계했다.

"7월 5일 건주위(建州衛)의 호인(胡人) 90여 명이 만포(滿浦)에 도착하였으므로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하니 그들이 서계(書契)를 올렸습니다. 군관들이 거절하고 받지 않자 여러 호인들이 일시에 머리를 조아리고 잔치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군관이 좋은 말로 알아듣도록 타일러 술과 음식을 먹였습니다. 술잔이 오고 갈 무렵 서계를 몰래 꺼내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서계의 뜻으로 보건대, 그들이 백성과 물자를 쇄환(刷還)한다는 것으로써 전후 서계를 올린 것은 필연코 우리 나라 국경에 마구 들어와 멋대로 산삼(山蔘)을 캐려는 계책입니다. 현재 강변(江邊)의 무기가 모두 상실되었고 군대의 수효가 모자라서 진영이 텅 비어 장래의 걱정이 없지 않으니, 삼을 캐도록 하는 한 가지 일은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서계를 이미 받지 않고 잔치도 베풀지 않으면 저들이 분이 나서 반드시 화근을 만들 소지가 있으며, 후일 잔치를 베풀 때에도 또한 뜻밖에 변고가 발생할 요소가 있으므로, 이에 조방장(助防將) 변응규(邊應奎)를 별도로 영장(領將)으로 삼아 만포에 진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65권, 선조 28년 7월 25일자 기사.

이에 선조와 비변사는 논의 끝에 서북 국경지대의 성채들에 군량미를 모집하고 각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정세를 탐지하기로 했다. 이후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선임된 신잡은 서북쪽의 변고를 어찌 막을 지를 놓고 회의가 열렸을 때 "강계에서 의주까지 토병(土兵)의 원수(元數)는 2천여 명뿐"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가 물었다.

"10만 여의 대군이 구름처럼 나온다면 설령 2천 명이 한 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버티어내겠는가."

신잡이 답했다.

"만일 독로강(禿老江)으로 나온면 더욱 지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강계에 눈이 막히면 근심이 없다.’고 하나, 신의 의견으로는 만일 얼음이 얼면 매우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청천강의 상류는 매우 얕아서 걸어서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신잡은 선조에게 여진족의 공세를 저지할 장소로 적유령(狄踰嶺)을 추천했으며, 각성들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도록 노력하는 한편, 경성의 포수 2초(哨)를 평안도로 내려보내는 것에 대해 경성을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며, 본도에서 교련한 포수를 정밀히 뽑으면 2천 명은 얻을 수 있으니 이들로 나누어 방어하면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식량 사정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군사는 징발할 수 있으나 양식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 만일 양식이 없으면 수만 명의 군사가 곧 흩어져 버릴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본도에는 부민(富民)이 없고 다른 데에서는 얻을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연전의 전세(田稅)는 콩이 1만여 석이고 쌀은 겨우 2천 석뿐이니, 이것으로는 중국군을 공궤하는 것도 부족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 작미(身貢作米) 및 내수사 노비의 신공을 모아서 쓸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삼번 군사(三番軍士)의 봉족(奉足)과 대량미(代糧米)를 각각 그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하는데 거의 2만 2천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각처에 저축해 두고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명년 봄에 무사하면 방수(防戍)하는 군인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 이것은 약간 넉넉합니다."

선조실록 68권, 선조 28년 10월 17일자 기사.

1595년 11월 30일, 신잡은 형조판서에 재수되었다. 1596년(선조 29년) 1월 3일, 심유경이 명나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려 하니 조선에서도 통신사를 보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자는 내용의 자문을 보내자, 선조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서 이에 관해 논하게 했다. 대신들은 대부분 사신을 보내는 걸 반대했는데, 신잡 역시 이에 동참했다.

"이 적은 우리 나라에 대하여 더없이 원망스럽고 통분한 원수입니다. 통신(通信)의 한마디 말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귀로도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위급함에 핍박되어 그들의 요청을 들어준다면 끝내는 반드시 따를 수 없는 말로 번번이 변환할 것이니, 어떻게 이에 대응할 것인지를 모르겠으며, 국서(國書)와 예폐(禮幣)를 또한 차마 어떻게 교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 뭇 신하들이 만약 복수할 뜻을 견고히 한다면 절치 부심하며 협심으로 게을리 아니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모으는 일밖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훗날 반드시 종사(宗社)의 치욕을 씻기를 기약한다면, 거짓 화친을 허락하여 적의 동태를 정탐하는 것 또한 병가(兵家)의 기정(奇正)의 술책에 해됨이 없겠습니다만, 이것으로 적을 물리치는 양책(良策)을 삼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이 적은 흉악하고도 교활하여 비록 황제의 명령이 있었으나 그 말을 교묘히 변조하여 오늘날까지 지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나라가 통신사를 보낸다고 해서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겠습니까. 신은 이 논의가 앉아서 심 유격의 간사한 농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인가 염려스럽습니다. 성상께서는 참작하소서."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3일자 기사.

이후 평안 감사로 선임되었지만, 6월 23일 사헌부가 신잡이 평안도 병사였을 때 삼가지 않은 일이 많아 군민의 만음을 크게 잃었는데, 다시 방백의 직임을 제수하여 서방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탄핵했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헌부가 다음날 체차할 것을 다시 청하자 받아들였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11월 26일 조정 회의 때 왕에게 아뢰었다.

"사세가 위급하니, 감히 억견(臆見)을 아뢰겠습니다. 근래 조정에 있는 신하가 다들 성을 지키고 친정(親征)할 것을 말하는데, 말은 다 매우 곧으나 형세로 보면 매우 어려우니 형세가 어려울 경우 막다른 상황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영남(嶺南)이 적을 당하지 못하면 호서(湖西)가 당해야 하겠으나, 호서가 당하지 못할 경우 경성(京城)도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경성이 버티기 어려우면 어쩔 수 없이 해서(海西)가 관방(關防)이 되어야 하는데, 해주(海州)·평양(平壤)·영변(寧邊)·강릉(江陵)에는 저축한 것이 아주 없고, 의주(義州)는 대처(大處)인데도 두어 달의 양식마저 얻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임진년에는 그래도 근근히 대가(大駕)가 머무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대처에서 인심을 보합(保合)하고 미곡(米穀)을 거두어 저축함으로써 뒷날 대가가 머무를 계책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아뢰려는 뜻인데 오늘은 대신이 다 들어왔으니, 의논하여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뜻에 따라 서북 지방의 각 요충지에 군량미를 비축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로 결의했다. 8월 23일 좌참찬에 제수되었고, 뒤이어 특진관(特進官), 우참찬(右參贊), 호군을 겸임했다. 1597년(선조 30년) 8월 14일, 일본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뒤이어 남원성 전투에서 명군과 조선군 연합군을 섬멸하고 전주성을 공략한 뒤 서울로 북상하자, 신잡은 여러 대신과 함께 가족을 먼저 피난시켰다가 사헌부에게 탄핵당했다. 하지만 선조는 듣지 않았고, 9월 15일 민폐를 일으키는 포수와 별감들을 엄히 단속하도록 신잡, 구사맹, 허잠 등에게 지시했다.

"소문을 듣건대, 포수(砲手)와 별감(別監) 등이 일로(一路)에서 갖가지로 폐단을 일으킨다고 하니 지극히 놀랍다. 만약 종전과 같이 폐단을 일으킬 경우 장(杖) 1백 이하에 해당되면 경중(輕重)을 구분하여 처벌하고, 심하면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수금(囚禁) 형추(刑推)하여 엄격하게 검칙(檢飭)하도록 하라고 신잡·구사맹(具思孟)·허잠(許潛)에게 하유하라."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15일자 기사.

임진왜란이 끝난지 2년 후인 1600년(선조 33년) 2월 8일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4월 20일에 병조판서에 선임되었다. 5월 20일 이산해와 홍여순이 서로 갈등을 벌이다가 당파를 각기 결성하고 극한 대립하자,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때 신잡이 말했다.

"어찌 양쪽이 다 옳고 양쪽이 다 그른 일이 있겠습니까. 그 말씀이 온당치 못합니다. 더구나 이산해와 임국로 등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후 선조가 "대개 신하가 당을 만드는 것은 틀림없이 임금을 배반하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군신(君臣)의 사이는 부자와 같은 것인데 이렇게 미안한 말씀을 하시니 신들은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125권, 선조 33년 5월 19일자 기사.

8월 25일, 조선에 주둔 중인 명군 3천 명에 더해 1천 명을 추가로 요청하는 문제에 관한 회의에서, 신잡은 이렇게 주장했다.

"마땅히 작은 나라의 정세를 간곡하게 말하여, 서울에는 장수 한 사람을 머물게 하고 또 한 부대의 병력을 부산(釜山)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고, 월색(月色)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다른 물품으로 갖추어 주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부산에서 신서(信書)를 주고받는 것은 비록 기미하는 계책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먼저 그 길을 열 일은 아니니,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처하고 우선 중국이 강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거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25일자 기사.

1601년(선조 34년) 1월 15일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1월 26일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2월 7일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선조를 알현하여 함경도 감찰사로서 여진족 방어책에 관해 상세히 아뢰었다. 그 후 6월 29일, 신잡은 강원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더 들여보내어, 여진족이 부령, 경성 사이에서 수시로 노략질하고 진쉬와 보장이 이따금 전사하는 사태에 대응하여 오랑캐를 방어하고 군대를 8월 전에 출동하여 노토(老土)의 잔당을 섬멸하고자 청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신잡은 자질이 아둔하고 모략이 없었다."라며 냉소적으로 평했다.

1601년(선조 34년) 9월 25일, 사헌부에서 신잡이 가족을 동반하여 데려간 것은 국법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추고를 청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신잡은 병에 걸렸다며 사직서를 제출한 뒤 면직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1월 14일 병조판서에 재수되었으며, 3월 17일 빙고제조(氷庫提調)에 선임되었다. 여기에 세자 좌빈객을 겸임하자, 신잡은 이를 사면할 것을 아뢰었지만 선조는 "경이 어찌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사양하지 말라."라고 답했다. 이에 사관이 혹평했다.

신잡은 배움이 없고 무식하다.

선조실록 150권, 선조 35년 5월 14일자 기사.

1602년(선조 35년) 5월 22일, 신잡이 선조에게 비밀 차자를 보내 아뢰었다.

"호서(湖西)의 적에 대한 소문이 파다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현(韓絢) 【이몽학의 난 때 괴수였다. 】 등이 복주된 뒤로 상벌(賞罰)이 분명치 않고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영변(寧邊)·해주(海州)에 흉서(兇書)가 나붙어도 단서를 알지 못하고, 당진(唐津)·면천(沔川)에 큰 도적이 숨어 있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거사(居士)라고 부르는 자가 만인 동갑회(萬人同甲會)를 열자 온 도내가 물밀듯이 몰려들어 온 경내를 가득히 메웠는데,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그때 남도(南道)에 있으면서 포고(布告)하여 엄금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오늘날 적도의 무리가 붙잡혀 숨김없이 자복해 훙계가 이미 드러나고 보니, 신 등이【신잡이 그전에 경연(經筵)에서 아뢰었다고 한다. 】 지난날 염려하였던 것이 빈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적이 만일 흉악스런 강도의 무리였다면 반드시 괴수가 되었을 것인데, 이 역졸(驛卒)이란 미천한 자에게 어찌 뭇 도적들이 의지하여 추장으로 삼겠습니까. 비록 무리를 불러모아 굳게 뭉쳤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조금 질서가 있었다면 일개 수령이 체포할 문제입니다. 단지 아주 흉악 간교한 자가 이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어 뭇 도적을 지휘하였다면 일이 발각된 지금에 어찌 예사로 체포하려는 자에게 잡히겠습니까. 지금 적을 체포하는 일로 충청(忠淸)·경기(京畿) 일대의 모든 백성들이 놀라고 여러 고을이 유랑하여 산골짜기로 숨는 등 임진란 초기보다 심합니다. 만약 일찍이 진정시키지 않으면 금년 가을을 넘기기 전에 선량한 백성들이 모두 도적에게 투신할 것입니다. 신이 생각해 보니, 오늘의 가장 좋은 대책은 급히 어사를 보내 특별히 덕음(德音)을 펴서 선무(宣撫)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또 현상금을 걸고 적을 체포하되 진짜 괴수를 붙잡았을 때는 공신에 녹하고 높은 벼슬을 준다고 하면 나머지 적은 저절로 흩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체찰사 이덕형이 이제 전제(專制)의 명을 받들었으니 조만(早晩)을 정하지 않고 계책을 세워 기어이 잡도록 하면 오늘과 같은 소요에 이르지 않고도 훙적의 괴수를 얼마 안 되어 체포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살피소서."

선조는 "국가를 위한 정성을 매우 가상히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아래와 같이 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천근의 쇠뇌는 여우나 쥐를 잡기 위해 쓰지 않는 법이다. 서로 모여 약탈 살인한 도적을 역란으로 치죄하였으니, 이미 국가를 체통을 잃었다고 하겠다. 신잡이 또 상신(相臣)이 몸소 가 체포하도록 하고자 함은 무엇 때문인가? 신잡이 지난 병신년 중 어전에 입시하였을 적에 비변사 제신들이 앞을 다투어 계책을 아뢰는데, 신잡은 ‘영변(寧邊)은 나중에 피란할 만한 곳이니 장 담그는 일만은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그때 사람들이 출장 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였다. 【장(將)자와 장(醬)자의 음이 같으며 그 전에 신잡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지냈기 때문에 한 말이다. 】 오늘의 차자가 이러하니 옛날에는 어찌 그토록 비겁하였으며 오늘은 어찌 이처럼 용맹스러운가.

선조실록 150권, 선조 35년 5월 22일자 기사.

1603년(선조 36년) 8월 20일 형조판서에 선임되었다. 그 해 월 3일, 신잡은 대마도 관시 허가에 관해 아래와 같이 건의했다.

"우리 나라는 왜적에 대하여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들과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사세로 말하면 주사(舟師)는 지쳐 있고 수졸(戍卒)은 이반(離反)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남방에 흉년이 들어 주민이 흩어져 나가므로 우리에게는 조금도 믿을 만한 형세가 없습니다. 도이(島夷)가 여러 번 나와서 물화(物貨)를 팔고 갔다면 통호하지는 않았더라도 실은 화호를 허락한 것입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기미하는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입니다. 다만 평시의 규례와 같이 하면 접응(接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드시 막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참작하여 계획하는 것은 묘당(廟堂)의 성산(成算)에 달려 있으니, 신은 감히 쉽사리 헌의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선조실록 166권, 선조 36년 9월 3일자 기사.

1604년(선조 37년) 1월 23일 지중추부사에 선임되었다. 이때 사관은 그를 아래와 같이 평했다.

추잡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는데, 뇌물이 문전에 가득 차서 벼슬을 판다는 비방이 있었다. 당시 사람이 탐오한 재상을 꼽는 데 있어서 홍(洪)·신(申)·노(盧)―홍여순과 노직(盧稙)이다. ―를 으뜸으로 꼽았다.

선조실록 170권, 선조 37년 1월 23일자 기사.

그 해 4월 22일 지의금부에 선임되었고, 6월 25일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평천군(平川君)에 봉해졌다.

1605년(선조 38년), 윤세침(尹世忱)이 윤섬(尹暹)이라고 가칭(假稱)한 뒤 위험한 사상을 퍼뜨릴 일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본래 신잡의 아들 신경희(申景禧)가 윤섬(尹暹)이라는 자를 잡아서 감춘 문서를 찾아냈지만, 이를 역적의 편지라고 모함하고 감사에게 거짓으로 보고해 자기 공로로 삼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선조가 황해감사 권희(權憘)의 서장(書狀)으로 신잡에게 이 일에 관해 해명을 요구하게 했고, 신잡은 즉시 글을 올려 해명했다. 이후 신잡이 자신이 어리석어 윤세침의 옥사 때 잘못 처신했다며 대죄를 청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아들 신경희가 윤세침의 언문 편지를 조작한 혐의로 끌려가 조사받게 되자 대죄했다.

1606년 8월 25일 개성유수에 제수된 뒤 개성에 부임한 후 그곳의 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며 이에 대한 대책에 관해 보고했다.

난을 겪은 이후 금군(禁軍)이 허술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도감(都監)의 군사가 아니면 전용(戰用) 뿐만 아니라 시위(侍衛)하는 것도 속수 무책입니다. 신이 여러 번 도감 당상이 되어 군안(軍案)을 상고하여 열람하여 보았는데, 당초 모집한 병사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는 거의 없어 결국 빈 장부가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각 초관(哨官)으로 하여금 불러 모아 충원시키게 하고 논상(論賞)하였으나 모집한 군사는 모두 근거지가 없는 오합 지졸(烏合之卒)이라서 얼마 가지 않아서 도로 흩어졌으니 다시는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입계하여 경기·개성부로 하여금 수를 정해서 선발하여 충당하게 하였습니다.

가까운 고을의 사람을 경도감(京都監)에 이속(移屬)시키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나 처자를 거느리고 영속(永屬)되는 것은 전가(全家)를 이배(移配)시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점고 간택하는 즈음에 먼저 도피하므로 부득이 당사자를 잡아 가두고 당사자가 도망하면 일족(一族)을 잡아가두고 군졸을 많이 배정하여 죄인처럼 서울로 압송하고 있습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군졸이 편안하게 머물러 살면서 훈련을 익힐 수 있겠습니까. 그 형세는 머지않아 반드시 도망하여 돌아갈 것이니 수령도 죄책을 입게 되어 부득이 많은 인족(隣族)을 가두고 독현(督現)할 것이고, 도감의 군대는 여전히 소루하리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각 고을에 각각 삼수군과 속오군이 있으니 도감으로 하여금 상번(上番)의 예(例)처럼 월한(月限)을 개정하게 하면 민심이 크게 동요되지 않고 경기 각읍의 병졸은 모두 도감의 군법을 익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사관이 논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도감의 일은 병사를 조련시키는 것이니 조련된 군사로 하여금 국가를 호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이익은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도감의 군사는 조련으로 업을 삼지 않고 모두 흩어질 뜻을 품고 있어 오늘 충언하면 내일 도망하니 이래도 적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 이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도망하면 그의 가족과 이웃이 함께 피해를 당하여 백성들이 안정된 삶의 낙을 누리지 못하니 지엽이 해를 입기 전에 뿌리가 먼저 뽑히지 않을까 두렵다. 아, 옛날 군대는 나라를 방위했는데 오늘날의 군대는 백성을 병들게 하는구나.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신잡은 1608년 진천으로 낙향하여 현재의 성원마을에 서원을 건립하고 이 고장 출신인 이종학, 김덕숭, 이여, 이부의 위패를 모시고 후진들에게 충효교육을 하였다. 1609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진천에 사당이 세워지고 사액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기타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인 신경희는 신헌의 9대 선조이며, 동시에 신익희의 방조이기도 하다. 둘째인 신경지는 탄금대 전투에 참전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퇴각하려했으나 삼촌인 신립에게 걸려서 "니가 어찌 살려 하느냐'는 호통을 듣고는 같이 물 속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동생인 신립의 표준영정은 신잡의 초상화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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