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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신점(申點)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4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해 성사시킨 공으로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평성부원군(平星府院君)에 봉해졌다.

2. 생애

증조부는 신영석(申永錫), 조부는 신원(申湲)이고, 아버지는 신정미(申廷美)이며, 어머니는 학성군(鶴城君) 이련(李連)의 딸이다. 아버지가 성균관 생원으로 재학하던 중 요절한 뒤 큰아버지이자 성균관 진사인 신순미(申順美)에게 입양되었다. 1564년(명종 19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같은 해 갑자 식년시 2등 3위에 급제했다. 이후 1569년(선조 2년) 6월 4일 정언(正言)에 선임되었고, 1571년(선조 4년) 10월 15일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

1572년(선조 5년) 12월 17일 수찬(修撰)에 제수되었고, 1573년(선조 6년) 1월 1일 장령으로 되돌아왔다. 그 해 2월 11일 류성룡이 동료가 서경(署經)하는데도 그날에 상회례(相會禮)를 거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사간 최옹(崔顒) 등과 서로 공박하자, "류성룡이 서경과 상회례를 반드시 그날에 아울러 거행하고자 하였으므로 잘못이 없지 않으니 갈아 차출하라고 명하소서."라고 청원했다.

이후 헌납(獻納) 정지연(鄭芝衍)이 자신이 전에 옥당에 있을 때 대사간 최옹 등을 갈도록 잘못 청했는데, 류성룡이 이미 녹박받아 갈렸으니 벼슬에 있을 수 없다며 스스로 탄핵하자, 신점 등은 정지연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하여 출사를 명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2월 13일 정언 최흥원(崔興源)이 정지연을 갈기를 청하고 왕이 이를 받아들이자, 신점은 지평(持平) 이현배(李玄培)·조정기(趙廷機)와 함께 입궐하여 정지연을 출사시키기를 청한 허물을 자진해서 탄핵하며 사직을 청했지만,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류희춘(柳希春)이 정지연을 출사시키라고 잘못 청한 신점, 이현배, 조정기를 갈아 차출하라고 명하라고 청하자, 왕은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1573년(선조 6년) 2월 25일 사간(司諫)에 제수되었으며, 3월 22일 수찬에 제수되었다가 5월 6일에 다시 사간으로 제수되었고, 6월 5일 수찬에 복귀했다. 7월 17일 홍문관 교리(校理)에 선임되었다. 10월 22일 사간에 제수되었고, 1574년(선조 7년) 6월 22일 홍문관 부교리에 선임되었으며, 12월 25일 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었다.

1575년(선조 8년) 9월 27일, 신점이 북병사 북병사(北兵使) 박민헌(朴民獻)은 연로(年老)하고 재략(才略)도 없으니 채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덧붙었다.

"북방(北方)이 텅 비었으므로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침입해 온다면 방어할 방책이 없으니, 장수를 미리 골라 명망(名望)을 배양(培養)하소서."

그러자 선조가 말했다.

"조정에 큰소리 치는 자들이 많으니 만약 오랑캐의 기병이 침입한다면 큰소리 친 자들에게 막게 하겠다."

이에 이이가 아뢰었다.

"상께서 말씀하신 큰소리 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신 것입니까? 만약 실속없이 큰소리만 치는 자를 가리키신 것이라면 그를 임용하여서는 일을 망칠 것인데 어찌 적을 막게 할 수 있으며, 만약 옛것을 좋아하고 성인을 사모하는 사람을 큰소리 친다고 여기신다면 상의 전교는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옛날 맹자(孟子)가 양혜왕(梁惠王)과 제선왕(齊宣王)을 만나서도 오히려 요순(堯舜)으로 기대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큰소리 치기를 좋아한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유자(儒者)의 말은 조금도 채용하지 않으면서 한갓 큰소리만 친다고 지목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랑캐를 막게 하겠다고 하시니 도리에 어긋난 것이 아닙니까. 왕의 말씀이 한번 나오면 사방으로 전파되는 것이니 그 말씀이 좋지 않으면 천리 밖에서부터 그 명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유자들을 큰소리만 친다고 지목하시어 북쪽으로 보내려 하시니, 현명한 자들은 기운을 잃고 불초한 자들은 조정으로 나오려고 갓을 털고서 준비를 할 것입니다. 군주의 한 말씀이 선한 사람으로 하여금 기세가 꺾이게 하고 약한 자로 하여금 기뻐하게 한다면 어찌 잘못된 말씀이 아니겠습니다."

선조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584년(선조 17년) 1월 14일, 사헌부가 신점이 인망이 가벼우니 체직하라고 청했고, 선조는 아뢴대로 하라고 답했다. 이후 감목관(監牧官)에 선임된 신점은 그 해 4월 26일에 조정에 아래의 상소를 올렸다.

"전라도의 전세(田稅)를 배로 운송할 때 안흥량(安興梁)에서 해마다 배가 침몰하여 조운(漕運)을 그르칠 뿐 아니라 또 물에 빠져 죽는 조군(漕軍)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굴포(堀浦)를 파서 왕래할 수 있게 하거나 혹 그곳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 아래 정박시켜 창고에 곡식을 옮기고 나서 빈 배로 서산(瑞山) 경내로 돌아가 정박하게 한 다음 이어 육로(陸路)로 운반하여다가 다시 배에 싣게 하소서. 그 사이의 거리는 육로로 10리가 채 못되니, 납세하는 자들에게 약간의 되쌀을 더 내게 하여 육로로 옮기는 비용을 치르게 하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일에 응모할 것이라서 운송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만세의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선조는 해사에 내려 십분 상의하여 아뢰라고 명했다. 이에 호조 정랑 박충간(朴忠侃)을 보내어 창고 설치에 대한 편부(便否)를 순시하게 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길주 목사를 맡던 신점은 북병사(北兵使) 이일의 서매(庶妹)를 첩으로 삼은 뒤 공공연히 데리고 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뒤 추국받았다. 1591년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고, 1592년 사은사(謝恩使)로 선임되어 명나라로 가서 연경(燕京)에 체류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병부와 예부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고, 그 결과 명나라 조정은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에 의한 요동병(遼東兵) 3,000명을 파견하기로 했다.

1592년(선조 25년) 7월 24일 의주로 귀환한 신점은 선조에게 병기와 화약을 무역했다고 아뢰었다.

"신들이 《황화집(皇華集)》 전질(全帙) 2건과 황홍헌(黃洪憲)에게 부칠 1권을 싸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러나 산해관 주사(山海關主事) 진과(陳果)는 논박을 당하여 갈려 갔고 제독 주사(提督主事) 장아속(張迓續)은 봉왕(封王)하는 일로 출사(出使)하였으므로 주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좌랑(佐郞) 한세능(韓世能)과 제독 원외(提督員外) 강경(姜鏡)은 우리 나라의 일을 가엾게 여겨 원병을 청하는 것과 은(銀)을 보내주는 등의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하여 정성을 쏟았습니다. 신들은 사례할 것이 없어서 전질 1건과 황홍헌에게 줄 1권 및 종이 6권을 한세능에게 주었고 또 전질 1건을 강경에게 주었습니다. 또 신이 생각하기에, 우리 나라의 병기(兵器)와 화약이 반드시 많이 결핍될 것이어서 무역해 오지 않을 수 없겠기에 서장관(書狀官) 정기원(鄭期遠), 당릉군(唐陵君) 홍순언(洪純彦)과 함께 의논하여 일행의 면연은(免宴銀) 45냥 및 쓰고 남은 여비와 잡물을 가지고 궁각(弓角) 1천 3백 8편과 염초(焰硝) 2백 근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선조실록 28권, 선조 25년 7월 24일자 기사.

이후 승전원 승지에 제수된 신점은 7월 26일 조정 회의에서 중국에서의 자신의 활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소신은 우리 나라가 지금 보전되고 있는 것은 중국 군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신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 중국 사람이 와서 묻기를 ‘성절사(聖節使)가 들어오지 못했을 듯하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방물(方物)을 아마 마련하지 못했을 듯하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방물(方物)이 무슨 관계인가?’ 하였습니다. 가만히 그 뜻을 헤아려보니 ‘우리 나라가 적과 통모(通謀)하여 향도(向導)가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럽게 여기는 듯하였습니다."

(중략)

"중국 사람들은 3도를 적에게 주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변란(變亂)이 일어났음을 듣던 날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자, 중국 사람들이 묻기를 ‘해적(海賊)이 무슨 까닭으로 너희 나라를 침입하여 짓밟는가?’ 하기에, 신이 ‘적이 중국을 침범하려 하기에 우리 국왕이 의리(義理)를 내세워 거절한 까닭에 우리 나라에 화풀이하여 이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신이 영평부(永平府)에서 비에 막혀 있었는데, 건주위(建州衛)의 달자(㺚子)도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독(都督)인 자가 와서 ‘삼(蔘) 캐는 호인(胡人)을 그대 나라의 변장(邊將)이 해마다 차단하고 죽이는데 그저 머리만 자르는 것이 아니고 가죽을 벗기기까지 한다 하니 이 무슨 일인가? 내가 처음에는 예부(禮部)에 보고하여 그대 나라에 대한 원한을 풀려 하였다.’ 하기에,

신이 ‘그대들이 만일 그대들의 땅에서 삼을 캤다면 우리 나라의 변장이 반드시 국경을 넘어 쫓아가서 체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인이 삼을 캔다는 핑계하면서 몰래 국경을 넘어 들어오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이 어느 쪽에 있는가?’ 하였습니다. 또 신이 산해관 주사(山海關主事)를 만났더니, 주사가 ‘그대 나라가 위급하다면서 요청하는 군사가 어찌 그리 적은가. 우리 군사가 정탐하려고 하면 핑계를 대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만일 군량이 떨어진 것이 염려된다면 중국에서 당연히 스스로 실어갈 것이고 군사가 귀찮게 구는 것이 두렵다면 기율(紀律)을 매우 엄하고 분명히 할 것이다. 옛날에 당태종(唐太宗)은 극서(極西)의 나라이면서 극동(極東)의 나라를 쳤으니 이기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다. 태조 황제는 수군(水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그대는 신중히 하라.’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8권, 선조 25년 7월 26일자 기사.

1592년(선조 25년) 8월 22일, 윤두수는 신점이 힘을 다하여 원군을 요청한 공이 있다고 보고했다.

"듣건대, 신점(申點)이 부경(赴京)했을 때 힘을 다하여 청병(請兵)한 공이 있다고 합니다. 석 상서(石尙書)는 일찍이 언사(言事) 때문에 장류(杖流)되었었는데, 충군(忠君)·순국(徇國)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예우합니다. 그런 석 상서가 매양 신점의 충성스러움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2일자 기사.

그 해 8월 26일, 신점은 조정 회의에서 영규와 홍계남의 활약에 대해 보고했다.

"영규(靈圭)라는 자가 있어 3백여 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중들이 다투어 스스로 앞장서서 모이어 거의 8백에 이르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딴 곳에서는 거의(擧義)한 자가 없는가?"

하니, 신점이 아뢰기를,

"안성(安城)의 의병 홍계남(洪季男)의 일을 배지인(陪持人)이 장하게 말하였습니다. 그 군사는 1백 명에 불과한데 왜적을 제법 많이 죽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자 기사.

그 해 9월 23일, 선조는 신점이 명나라에 있을 때 지성으로 군대를 청했고, 무기도 많이 구입해서 가져온 공을 기려 가자(加資)했다. 또한 9월 25일에 신점을 승정원 좌부승지에 제수했다. 12월 4일 중국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속히 보내달라고 호소하자고 주장했다.

"심 유격이 이미 강화를 하였고, 송 시랑(宋侍郞) 역시 발병(發兵)할 마음이 없으므로 우리는 적을 소탕하지 못할 형세이니 신민(臣民)의 통분함이 한이 없습니다. 전일에 듣건대, 심 유격이 ‘대동강 이서(以西)는 중국의 지방(地方)을 삼는다.’ 하였다 합니다. 저 적들이 대동강을 중국의 땅이 아니라 하여 웅거(雄據)할 계책을 갖는다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고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겉으로는 돌아가는 척하다가 한성(漢城)에 둔취(屯聚)하여 명년 2월에 무리가 한꺼번에 서쪽으로 향한다면 화가 헤아릴 수 없게 되어 차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 간절히 호소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진주사(陳奏使)를 즉시 출발시켜 때늦은 후회가 없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 12월 4일자 기사.

선조는 비변사에게 신점의 의견을 논의하게 했고, 비변사가 신점의 주장대로 급히 사절을 보내자고 하자 받아들였다. 그 후 부호군·동지중추부사·병조참의·호조참의·형조참판·형조판서를 잇달아 역임했으며, 1593년(선조 26년) 9월 4일 병부상서 석성에게 극력으로 청해 원군을 받아내는 데 기여한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3월 7일, 호조참판 성영(成泳)과 함께 일본군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중국 장수 담종인(譚宗仁)의 사촌으로서 적진에 방문했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담풍시(譚馮時)를 접대하고 적진의 소식을 자세히 탐문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담풍시를 접대한 뒤 왕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신들이 담풍시를 접대 도감으로 맞아들여 다주(茶酒)를 접대하고 조용히 담화하면서 먼저 담 유격(譚遊擊)의 침소와 식사가 편안한지를 물은 다음 ‘무슨 일로 고 군문(顧軍門)에게 가느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왜적이 바다를 건너갈 기약이 없으므로 총독(總督)에게 보고하여 「자주 차인(差人)을 보내 왜적이 돌아갈 것을 재촉하라」고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습니다. 또 현재 왜적이 얼마나 되며 군량 비축은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군병의 수는 곳곳에 진을 치고 웅거하여 있으니 제대로 확실하게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4만이며, 군량은 그들의 나라로부터 계속 운반하여 많이 쌓아 두었으며, 또한 집과 방을 극히 정결하게 꾸며놓고 이 나라의 사람들과 해물(海物)을 팔고 사서 편안히 앉아 잘 먹고 있다. 그들에게 별다른 번요와 해로운 일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또한 심유경(沈惟敬)은 왜인과 마음을 같이하여 모든 논의가 있을 때마다 현소(玄蘇)와 소서행장(小西行長) 및 부통사(符通事)라고 이름하는 사람과만 비밀히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는데, 그 말하는 것은 필시 이 나라의 3도를 잘라 준다는 의논일 것이다. 우리 담야(譚爺)는 이치에 의거하여 곧바로 배척하기를 「너희들이 반드시 속히 바다를 건너간 다음에야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하였는데, 이때문에 왜인들이 심유경에게는 후한 뇌물을 주고 담공(譚公)은 박대하였다. 심유경은 은냥과 보물을 많이 받아 왔고 담야는 구류한 채 내보내지 아니하여 그 고통이 막심하니, 이는 반드시 심유경이 이간질을 하여 그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우리 나라의 포로로 잡힌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포로된 사람이 비록 많았으나 나이 젊고 쓸 만한 사람은 그 나라로 들여보내고 그 나머지는 돌아가며 사환으로 사고 팔았는데 굶주려 죽은 이가 많다고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심유경은 돌아가는데 담야만 혼자 남아 있게 되었으므로 우리들이 칼을 뽑아 모욕을 주니 심유경이 굴복하고 사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심공이 나오면 왜적이 돌아갈 것인가?’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봉작(封爵)과 조공 바칠 것을 청한 것이 모두 허락된다면 돌아갈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공이 비록 온다 해도 반드시 돌아갈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대개 그 말을 들어보면 심유경과는 화목하지 못한 듯하니 심유경을 허물하는 말 역시 다 믿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행장이 가등청정과 친밀한지를 물었더니 ‘행장은 관백의 사위를 잘 섬겨서 청정의 병권을 모두 빼앗았으므로 청정이 유감을 품어 둘 사이가 마침내 불화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행주(行酒)를 마치고 통사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도원수의 군사가 땔감이나 하는 자질구레한 적군을 죽일 때마다 왜적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분통해 하며 행장에게 고하여 반드시 보복하려고 하는데, 행장은 화친을 청하는 대사(大事)가 앞에 닥쳐 있으므로 우선은 놔두고 허락하지 않고 있다. 또 유 총병의 군사는 근래에 전혀 토벌에는 뜻이 없고 다만 물건의 매매만을 일삼고 있으므로 왜적들이 적국(敵國)으로 대하지 않고 있는데, 유 총병이 호남으로 진(陣)을 옮긴다면 원수는 반드시 적에게 환란을 당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소소한 적이 죽임을 당하면 행장은 그때마다 화를 내며 「우리 군병이 조선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조선 사람이 우리 군병을 죽이는 것이냐?」 하며 매번 담야에게 따져 질책하니, 이 다음부터는 소소한 도적들을 구태여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 의도를 살피건대, 담공이 매우 곤욕스러우므로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선조실록 49권, 선조 27년 3월 7일자 기사.

1595년(선조 28년) 5월 23일, 사헌부가 형조판서 신점이 재상의 서열에 있으면서 여러 집을 차지하고 때로는 사람들과 송사를 벌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라 선비의 체모를 더럽힌다고 탄핵했다.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헌부는 5월 27일, 5월 28일, 5월 29일, 6월 1일, 6월 2일에 걸쳐 연이어 탄핵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10월 10일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사관은 이때 그에 대해 아래와 같이 혹평했다.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여 다른 것은 볼 만한 것이 없다. 숭반(崇班)에 오른 뒤로부터 재화를 탐냄이 한이 없고 사치가 너무도 심하였다.

선조실록 68권, 선조 28년 10월 10일자 기사.

1596년(선조 29년) 1월 3일, 심유경이 명나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려 하니 조선에서도 통신사를 보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자는 내용의 자문을 보내자, 선조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서 이에 관해 논하게 했다. 대신들은 대부분 사신을 보내는 걸 반대했는데, 신점 역시 이에 동참했다.

"이 적은 우리 나라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사신을 보내 통정(通情)하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조의 명령도 없고, 또 책사(冊使)의 자문도 없는데 유격의 한마디 말에 어찌 경솔히 따를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참작하소서."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3일자 기사.

그 해 1월 25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선임되었고, 8월 27일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김덕령을 심문하는 추관에 류성룡·윤두수·김응남·정탁·최황(崔滉)·구사맹(具思孟)··윤자신(尹自新)과 함께 선임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순검사(巡檢査)로 선임된 신점이 왕에게 건의했다.

"성을 쌓는 역사(役事)가 매우 거창하고 역군이 매우 많아야 할 뿐더러 성 밖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많기 때문에 반드시 포루(砲樓)와 격대(擊臺)를 만들어야 지킬 수 있을 것인데, 병조에서는 단지 노약(老弱)한 병졸 30명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착실히 시행하게 하소서. 성첩(城堞)의 수는 8천인데, 비변사에서는 성첩을 합치어 개수함으로써 성첩을 지키는 군사들의 숫자를 줄이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신에게 품의하기를 ‘두 첩을 하나로 합하고 그 사이의 성가퀴[睥睨]를 섭상(葉鱨)이 말한 제도에 따를 경우, 섭상의 제도로는 현안(懸眼)이 5척으로 우리 나라 제도와 비교하면 매우 간격이 좁아 성첩의 숫자는 전일보다 더욱 많아져 지키는 병졸 또한 더 충원하여야 하므로 사목(事目)의 내용과 다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무사들의 말이 모두 ‘성가퀴가 좁으면 사격에 방해가 된다. 남방은 총포를 주로 쏘므로 성가퀴가 작더라도 되겠지만 우리 나라의 장기(長技)는 활이니 전과 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성첩 둘을 합쳐 하나로 하면 탄환을 피하기에는 더욱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우선 전과 같이 하였고 다만 동쪽 도(道)만은 한결같이 섭 상이 말한제도를 따랐는데 동쪽 지방과 서쪽 지방이 각각 달라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병조와 당상 무관(堂上武官)으로 하여금 급속히 심의하여 결정하게 함으로써 이동(異同)이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선조가 전교했다.

"나는 그 사이의 곡절에 대한 논의를 알지 못한다. 다만 지키는 병졸이 많은 것이 싫어서 성첩 둘을 하나로 통합하면 성첩간의 거리가 더욱 멀어져서 더욱 허술할 터이니 온당하지 못한 듯하다. 또 척촌(尺寸)은 같다고 하더라도 1척의 장단이 다르니 이것 또한 살펴야 할 것이다. 또 성을 지키는 여러 가지 기구는 어떻게 조처했으며, 성 위에서 군사 훈련도 할 수 있는가? 비변사와 더불어 참작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 2월 27일자 기사.

이후 순검 박충간이 심점의 주장을 비판했다.

"신이 순검의 임무를 받고 즉시 가서 섭 유격(葉遊擊)이 쌓은 성첩(城堞)의 제도를 살펴보았는데 매우 자세하였습니다. 자로 재어 보았더니, 성가퀴는 높이가 5척, 너비가 5척, 두께가 1척 5촌이었으며, 성가퀴의 사이는 높이가 2척 3촌, 너비가 9촌인데 현안(懸眼)이 밑으로 나 있어 성으로 육박하는 적을 막을 수 있었으며, 성가퀴 사이가 좁아서 방패(防牌)가 소용 없고 포(砲)를 쏘고 활을 쏘는 제도가 절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성첩(城堞)의 제도는 높이가 4척, 너비가 4척 8촌, 두께가 2척 2촌이며, 성가퀴 사이는 높이가 3척, 너비가 1척 7촌인데, 더러는 넓기도 하고 더러는 좁기도 하여 성가퀴의 제도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가 넓고 형세가 낮기 때문에 방패가 없이는 외적(外賊)의 탄환(彈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성가퀴의 구멍도 밑으로 나 있지 않고 수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까이 오는 적을 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써 오던 이 제도는 모두 적을 막는 데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조정(朝庭)의 명령에 따라 중국 제도로 이미 5백여 군데의 성가퀴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점(申點)의 계사(啓辭)로 인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보건대 ‘옛 제도에 따라 쌓되 두 성가퀴를 합하여 하나의 성가퀴로 만든다면 축조(築造)가 견고하고 한 타구(垜口)안에 지키는 사람 5∼6명이 용신(容身)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나,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개의 성가퀴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다면 성가퀴와 성가퀴의 사이가 너무 멀고, 그 사이에 중국 제도에 따라 하나의 타구를 만든다 하더라도 좌우의 옛 타구는 형세가 모두 수평으로 되어 있어 가까이 오는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성가퀴와 성가퀴의 간격이 멀면 포를 쏘고 활을 쏘는 곳이 적어, 비록 지키는 군사 1백 명이 안에 있다 하더라도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적을 제압할 때 기예(技藝)를 사용할 수 없으니, 이 제도는 결코 쓸 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한결같이 섭 유격의 제도에 따라 전에 있던 성가퀴를 모두 헐어버리고 경솔하게 개축(改築)한다면 반드시 옛 성가퀴처럼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는데, 이 의논도 옳지 않습니다. 신이 쌓은 곳들을 살펴보니 옛 성가퀴가 견고한 곳은 그대로 수축(修築)하였고 성가퀴가 낮거나 허물어진 곳은 큰 돌을 많이 사용하여 견실하게 수축하였기 때문에 절대로 쉽게 무너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시의 고식적인 계획을 서둘러 만세토록 영원히 견고해야 할 성첩을 적을 막는 이해(利害)에 어긋나게 하여 포나 활을 쏘는 구멍을 희소(稀少)하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두 성가퀴를 합치면 그 구멍이 섭 유격의 제도에 수직으로 나 있는 구멍의 수에 비하여 반감(半減)이 될 뿐더러 좌우의 옛 제도에 따라 쌓은 성가퀴에 구멍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으니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후일 일을 맡은 신하가 아무리 큰 죄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성패(成敗)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일의 관계됨이 중대하기 때문에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한결같이 섭 유격의 제도에 따라야 한다는 의논을 류성룡이 주장했었는데 지금 병고(病告)로 인하여 순심(巡審)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이런 의외의 의논이 나온 것도 역시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비변사의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순검하게 하여 후회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3월 3일자 기사.

1597년(선조 30년) 6월 12일, 신점은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599년(선조 32년) 1월 19일, 정언 문홍도(文弘道)가 신점이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관직에 올랐다며 탄핵했다.

"관작은 임금이 세상의 기강을 바로잡고 권면시키는 도구이니 공이 없는 사람에게 마구 주어서는 안 됩니다. 공조판서 신점은 별로 볼 만한 재덕(才德)이 없는데도 한갓 접반(接伴)한 공만으로 숭정(崇政)의 중질(重秩)에까지 올랐으니, 관작의 외람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설령 신점에서 실제로 접반한 미미한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신자로서의 당연한 직분이니 본래 상을 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물정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니, 상가(賞加)의 명을 환수하소서."

이에 선조가 답했다.

"신점은 굳이 파직시킬 필요가 없다. 그에 대해서 급사(給事)가 요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장자(長者)이니 승직시킨다 하여 무엇이 해롭겠는가."

선조실록 108권, 선조 32년 1월 19일자 기사.

문홍도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1월 20일, 1월 22일, 1월 23일에 신점을 잇따라 탄핵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월 8일, 사간원이 병에 걸린 척하며 직무를 불성실하게 한 많은 인사를 탄핵했는데, 그중엔 신점도 있었다. 다음 날, 사헌부가 신점과 형조참판 민여경(閔汝慶), 상호군 성영(成泳), 부호군 이광준(李光俊), 교서 교리 여우길(呂祐吉), 병조 정랑 박동선(朴東善), 호조 정랑 조욱(趙稶) 등을 대단치 않은 병을 내세워 직임을 게을리하고 조정에 출사하길 회피한다며 탄핵했고, 선조는 이들을 추고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판의금부사를 역임하다가 병을 얻어 칩거하였고, 1601년 한양에서 사망했다.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산길동 산 9-2번지에 안장되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5호에 선정되었다.

3. 사후

1604년(선조 37년) 2월 20일, 조정에서 공신 녹훈 문제를 토론했다. 이때 선조가 중사(中使)를 시켜 공신 단자(功臣單子)를 내어 보이며 물었다.

"당초에 청병(請兵)한 사람은 끼지 못하였고 뒤에 청병한 사람은 참여하였는데, 당초는 신점(申點)이고 뒤는 정기원(鄭期遠)인가? 최흥원(崔興源)은 어찌하여 삭제하였는가?"

이에 영의정 이덕형이 답했다.

"당초 대가(大駕)가 도성(都城)을 나갈 때 최흥원은 명을 받들고 나갔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한 유(類)가 아니기 때문에 참여되지 못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71권, 선조 37년 2월 20일자 기사.

그 후 이덕형은 신점이 공신 명단에 빠진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가을 대간이 아뢴 말에 따라 ‘왕자(王子)는 삭제하라.’고 분부하셨는데 여러 차례 품하고 나서야 비로소 확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중론이 또 ‘신점(申點)은 제일 먼저 중국군을 청하는 일을 했고, 이원익(李元翼)은 순안(順安)에서 많은 힘을 발휘했는데, 지금 전교하신 것에 따라 이런 사람들을 모두 삭제한다면, 국가에서 녹공하는 뜻에 매우 어긋난다.’고 했는데, 정말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군대를 청한 일과 힘을 발휘한 일에 언급이 되었고 보면 신 자신이 혐피(嫌避)하느라 겨를이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중론이 추후에 품정(稟定)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성상께서 체후(體候)가 편치 못하시어 여러 달을 경과하게 되었고, 이어서 신이 어미의 묘를 이장(移葬)하느라 외방에서 분주했었으니, 오래도록 천연(遷延)하게 된 것은 또한 신(臣)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선조실록 172권, 선조 37년 3월 10일자 기사.

1604년(선조 37년) 6월 19일, 빈청(賓廳)이 신점이 공신 명단에 빠진 것에 대해 문제제기했다.

"임진 왜란 초기에 신점이 옥하관(玉河館)에 있다가 왜인들의 변을 듣고는 중국 조정에서 울부짖으며 청병(請兵)하였으므로 비로소 군사출동에 관한 의논이 있게 되었고, 그 뒤 대병(大兵)이 계속 나오게 된 것도 모두 이 사람이 힘을 다해 발단(發端)시킨 공이었습니다. 그는 뒤에 청병한 사람들에 비하여 경중이 자별한데 후자들은 참여하고 신점은 삭제되었으니, 타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선조실록 175권, 선조 37년 6월 19일자 기사.

결국 신점은 선무 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와 함께 초상화가 그려졌고,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했으며, 그의 부모와 처자도 두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했다. 또한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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