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들은 대궐의 섬돌에 머리를 부술 것을 기약하면서 열 번이건 백 번이건 상소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고종이 거절하자
조선, 대한제국의 문신. 고려말 위위시(衛尉寺)의 승(丞:종 6품) 심홍부로부터 22세손이다. 1906년 양반 사대부 중 유일무이하게 대한제국 공작(청녕공, 靑寧公)에 봉작되었다.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주창한 최초의 인물이다.
2. 생애
황해도 관찰사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심능악(1766 ~ ?)의 손자이자 생원 심의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0년 문과에 급제, 1852년 한림초시에 합격하여 1853년 홍문관 교리, 1857년 안변군 군수, 1861년 부제학으로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62년(철종 13) 예방승지, 1874년(고종 11)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80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 도봉소 당상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884년 우의정, 그 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민씨 정권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으로 병조판서와 친군영 도제조를 겸하였다. 심순택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분쟁 사이에서 정치적 고충을 겪었고,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발발을 계기로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강압적으로 내정개혁을 요구하자 사표를 제출했다.
고종 34년 정유년(1897년) 9월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문무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한 결과 17일 계묘일(癸卯日)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어 고한 다음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고종실록
1896년 아관파천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이 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궁내부 특진관으로 물러나 있다가 1898년 다시 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공홍식 옥중살해사건이 계기가 되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고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물러났다.
1900년 명성황후의 홍릉 천장 총호사에 임명되었고, 1901년 대한제국 건국 1등 공신으로서 훈1등 태극장을 수훈하고 다시 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영돈녕원사로 물러났다.
1902년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수훈하고, 다시 의정에 임명되어 기로소에 들어가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후에는 주로 영돈녕원사로 물러나 있었다. 이후 국정은 점차 일본의 주도권 하에 드는 망국에 들게 되었으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원로대신들인 기로소에 있던 대신들은 특진관 조병세를 위시하여 모두 울면서 조약반대를 하였다. 특히 조병세 등 수 명이 자결하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특히 심순택은 매국노를 규탄하고 원로대신들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906년 2월 20일, 고종이 '나라의 큰 공로가 있는 원로로서, 영돈녕사사 심순택을 특별히 공작(公爵)에 봉하라' 는 조령(詔令)을 내려, 심순택을 청녕공(靑寧公)에 봉하였다. 최초이자 유일한 대한제국 귀족 봉작 사례이다. 그러나 심순택은 상소로 거절 의사를 표했으나, 고종은 사양을 거부했다. 결국 공작에 봉작된 지 4일 후인 1906년 2월 24일, 노병(老病)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고종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