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의인물

어윤중(魚允中)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20 목록 댓글 0

1. 개요

개화기 조선의 정치가이자 온건 개화파. 저서로는 <종정연표> 등이 있다.

2. 생애

1848년 2월 15일 충청도 보은현 서니면 선곡리(현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선곡1리)에서 아버지 어약우(魚若愚, 1818 ~ 1863.8.6.)와 어머니 여주 이씨(1817 ~ 1856.2.4.)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9세 되던 1856년 어머니를 여의고 이어 16세 되던 1863년에는 아버지를 여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약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으나 사후 1883년 9월 어윤중의 공로로 이조 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

그 뒤 20세 되던 1868년 지방 유생 50명을 뽑아 전시를 볼 자격을 주는 칠석제(七夕製)에서 장원으로 입격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마침내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17위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5월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정7품)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8년 만에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정3품)까지 승진한 후 9개월간 전라도의 탐관오리를 부지런히 징벌하고 돌아와서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는다. 개혁의 중심 내용은 세금 개혁이었는데 후에 본인이 직접 해버린다. 고종은 이 내용을 심도깊게 보았고 어윤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채택은 안 했다.

이후 1881년 일본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가는데 담당 파트는 일본 대장성. 당시 수행원으로 함께한 유길준과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그 후 일본에서 청나라로 가서 미리 영선사로 가있던 김윤식을 만나고 중국의 정책을 견문한 후 이홍장과 회담을 하고 왔다.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독수호통상조약 등에 합의하였고 급기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까지 조인을 하였다. 이때 이홍장이 '증서 다 만들어놨으니까 도장만 찍어'에 화가 나서 청나라에 냉담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회담 내내 청나라는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관계를 들어 각종 무리한 요구를 하였는데 어윤중은 그나마 끈질기게 요구하여 청나라 상인들이 상품을 쌓아놓고 장사를 하는 곳을 양화진으로 제한하는 등의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도 썩 공평하지는 않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다는 것을 알고 김윤식과 함께 청나라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서북 경략사로 임명되어 경제 담당답게 북방 무역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중강 무역 장정, 회령 통상 장정을 협정했다. 이때 어윤중의 활동 중 중요한 것은 지역 국경 지대를 조사한 것인데 국경을 보다 확고히 하였으며 이 공로로 종2품 병조참판(국방부 차관)과 호조참판(기획재정부 차관)을 역임하게 된다. 1883년 대담한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나 무시당했는데 갑신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온건 개화파였던 탓에 명성황후 아래서 중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1893년 어윤중의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에서 농민 집회(동학농민운동의 서막이기도 했다.)가 열리자 '순무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어윤중이 집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성격을 기술해놓은 것을 보면 당시 조선 농민들의 모든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다. 하여간에 그렇게 군중들을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이후 어윤중은 당시 대신들 중 이례적으로 동학도들을 '민당(民黨 : 백성 모임)'으로 지칭해서 많은 대신들의 빈축을 샀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탁지부 대신(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서 자신이 그렇게 건의하던 조세 개혁안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당시에 얼마나 어윤중이 긴축 정책을 강행하고 조세 개혁을 갈아엎어버렸냐면 당시 사람들이 어윤중을 '전(田)조림'이라고 불렀다. 성씨인 '魚'의 중간인 '田'를 따서 만든 건데 이런 별명이 붙어있는 걸 보면 얼마나 어윤중이 조세를 짜게 매겼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잡세, 무토 궁방세를 혁파하고 엄격한 조세 법정주의에 의거한 수금은 많은 민중들이 어윤중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1895년 춘생문 사건이 터졌을 때 군사를 이끌고 고종을 탈출시키려던 친위대장들과 주모자들을 체포한 것이 다름 아닌 어윤중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사건이 터지고 김홍집, 정병하 등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성난 군중에게 구타 후 몸이 찢겨나가는 와중에 어윤중은 망명을 하지 않고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군으로 피신한다. 그러다가 그해 2월 17일, 고향 보은군으로 피난하던 길에 충주부 용인군 하동촌면 어비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어비울(魚肥里)'에서 과거 산송(묘지) 문제로 원한을 품고 있던 향반 정원로(鄭元老)와 정원로가 동원한 임녹길(林彔吉) 등의 머슴들에게 살해당했다. 향년 49세

정원로와 함께 공모해 어윤중을 살해한 유진구는 정원로 집의 식객이었고 전직 궁내부 순사였다. 그는 춘생문 사건 당시 거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추격을 피해 정원로의 집에 숨어 있다가 어윤중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구는 이진호의 배신과 어윤중 때문에 춘생문 거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참에 앙심을 품고 정원로를 꼬드겼다. 정원로 역시 산송 문제로 원한이 있던 데다가 마침 용인군수가 관군을 풀어 어윤중을 추격한다는 얘기를 듣고 관군과 합세해 어윤중을 살해한 것이다.

3. 여담

원칙주의자였다. 본성이 강직하고 담대하여서 조금이라도 법률에 어긋나면 고종이고 명성황후고 NO라고 말했던 양반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이 제안한 300만 원의 차관도 "은이 아니면 안 받는다."라고 말했다.

동분서주하며 활약했던 인물로 소원이었던 조세 개혁도 재무부의 으뜸이 되어 성취했다.

교육자 겸 계몽 운동가였다가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는 윤치호가 어윤중의 제자였다.

본명이 '어남선'인 배우 류수영이 항렬상으로 어윤중의 조카뻘이 된다.

독립유공자 권희목은 그의 외손자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