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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준용(李埈鎔)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1|조회수15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의 왕족 및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종의 친조카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2. 생애

1870년(고종 7년) 7월 23일,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과 첫 부인 풍산 홍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밑으로 동생 이문용(李𪣢[土+汶]鎔)이 있었지만 20세에 요절하여 사실상 독자였다.

이래도 "예" 저래도 "예" 하는 아버지 이재면이나 작은아버지 고종과는 다르게, 호탕하고 활달하면서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이준용을 마음에 들어하고 아끼며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한다. 죽기 직전에 흥선대원군이 사이가 틀어진 아들 고종을 찾았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준용이는 어디 갔느냐."라며 이준용도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15살 때인 고종 21년(1884) 개화파 내각에 의해 관직에 오른 후,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장각과 예문관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74년(고종 11년) 권좌에서 축출당한 흥선대원군은 1881년(고종 18년) 이복삼촌 이재선을, 1885년(고종 22년) 아버지 이재면을 왕으로 앉히고 다시 섭정을 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이후에는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노력했다. 주한청국공사관과 주한일본공사관을 찾아가 왜 이준용이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꾸준히 설득했지만, 청나라나 일본 모두 외면했다. 그럴 경우, 100%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외세를 빌린 왕실 쿠데타를 지원해 봤자 상대에게 빌미를 줄 뿐이기도 했다.

이준용은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나 유길준보다는 덜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작은아버지 고종의 미움을 받고,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조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했다고 한다. 1899년(광무 3년)에는 흥선대원군도 사망한 이후였지만, 여전히 존재했던 흥선대원군의 파벌에 의해서 이준용을 추대하는 쿠데타 시도만 3건이 발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이준용의 입국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고종은 끈질기게 거부했다고 한다. 오히려 1904년(광무 8년)에도 일본에 있던 반역자 14인을 송환하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종 강제 퇴위 직전인 1907년(광무 11년) 7월 중순에야 거의 밀입국 형태로 귀국했다. 정식 귀국 허가가 나온 것은 고종 퇴위 이후였다.

귀국한 그 해 9월 12일에 '영선군(永宣君)'으로 봉군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10년 만에 비로소 정식 황족 작위를 겨우 받았음은 그가 얼만큼 위험하게 여겨지고 기피인물로 취급되었는지 보여준다. 이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고, 주차 일본 대사를 지낸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이 되었으며, 그해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를 순종황제, 황태자 이은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이후, 영선군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잠시 품었고, 1909년(융희 3년) 이근택 등과 합세해 이완용을 몰아낸 다음에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연히 일본을 밀어내는 것은 아니고, 당시 상황을 용인하는 상황에서의 내부 권력 싸움. 핵심은 '이완용 다음 영선군 자신이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것'이었다. 영선군이 연관된 쿠데타 시도만 이것으로 4번째다(1899년의 시도들은 하나로 취급). 하지만, 점점 드러나는 일제의 침략 행위들로 모든 게 다 헛것임을 알면서 좌절하더니 이후 친일파로 전향했다. 초기에는 반일주의자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빠르면 을미사변 이전, 늦어도 일본 망명 시기에는 친일파로 전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106인 명단에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과 함께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조선 왕족들은 신분상 일제의 감시와 영향력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받아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명단에서 제외되었지만, 그 특별한 사례가 영선군 가계이다.

1909년(융희 3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대한민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일본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에 부속시키는 구도로 향후 세워질 조선신사(조선신궁) 같은 신궁급 신사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바 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에는 조칙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왕공족으로서 이희 공(李熹公)에 봉해졌는데, 이재면이 곧 사망하자,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李埈公)'으로 불렸다. 1912년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2.1. 가족들에 대한 원망

영선군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속 위기에 빠지게 한 가족들을 상당히 미워했다. 특히 일본 망명 생활 중 여러 번 암살당할 뻔했음에도 가족들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자 감정은 더욱 격해져 차가운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에게 사면받고 귀국한 직후 흥선대원군 내외의 사당을 찾아가긴 했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 흥친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무루공자(無淚公子)', 즉 눈물없는 사나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다. 이 일로 그의 5촌 당숙인 완순군 이재완에게 질책까지 받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고.

2.2. 사망

저런 상황에서 건강을 제대로 돌볼 리 없었다. 나중에는 콩팥과 심장이 망가졌는데, 계속된 피신 등으로 치료 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했다. 결국 1917년 3월 22일 운현궁에서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과 후손

영선군은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사별했고, 두 번째로 광산 김씨와 결혼했지만, 두 부인 사이에서 모두 자식이 없었다. 1916년 소실 전순혁과 사이에서 딸 이진완(李辰琬)을 낳았다. 하지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영선군이 죽은 이튿날에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양자로 입적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영선군의 부인이 고종에게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하자 고종이 이우의 손을 잡고 양자로 선택했다고 하며, 관련된 이야기가 《순종실록부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후의 가계는 이우 문서에 기재되어 있다.

이준 공(李埈公)이 사자(嗣子)가 없기 때문에 덕수궁에서 친족회의를 열고, 이강 공(李堈公)의 둘째 아들 이우(李鍝)를 사자로 삼았다. 태왕 전하의 뜻을 받든 것이다.

《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1917) 양력 3월 23일 1번째 기사

4. 여담

영선군은 한국이 문명진보의 영역으로 나가려면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의 교육론을 직접 실천에 옮겨 1908년(융희 2년)에 종친, 외척 자제의 일본 유학을 건의하여 실행했다. 그 뒤에도 해외 유학과 견문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일반 양반가와 평민의 자제들에게도 해외 유학 지원을 구상했으며 1908년 봄에 이지용, 이재극 등과 함께 한성부 북부 계동에 황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돈명학교(敦明學敎)를 설립했다. 당시 나중에 자신의 토지를 저당잡히면서까지 학교를 부흥시키려 했다고 한다. 또한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예전의 전통적 교육 기관이 아닌 근대적 인재들을 길러낼 사범 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영선군을 두고 윤치호는 양돼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정작 상술하듯 본인의 5촌 조카 윤원선과 영선군의 딸이 결혼해서 그렇게 싫어하던 영선군과 사돈이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조사와 관련하여 일본 측이 그에 대해 남긴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영선군은 1909년 11월 1일 오후 2시경에 자택을 방문한 지인에게, 이갑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의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고, 자택이 수색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매우 걱정했다. 영선군은 이갑이 취조 과정에서 사건 관련자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염려하며 관련 소식을 은밀히 알아봐 줄 것을 지인에게 요청했다. 마침 그때 영선군과 신뢰가 두터운 전직 경찰관 강호선이 찾아와 귓속말로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영선군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강호선에게 상황을 조사한 뒤 보고할 것을 지시했으며, 이후 북문 밖에 있는 자신이 소유한 삼계동 정자로 오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3시경, 영선군은 삼계동 정자로 이동해 오후 8시경 귀가했지만, 그곳에서 강호선과 접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그해 12월 2일, 감옥에서 경찰 경시의 심문을 받은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애국지사, 정치인, 매국노들에 대한 평가를 남기며 영선군도 잠깐 언급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평가할 수 없다(李埈鎔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그 爲人에 대해 評論할 수가 없다.)."라고 언급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레이엔(靑山靈園)에 있는 김옥균의 묘비 글씨가 그의 글씨이다. 글은 박영효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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