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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정창손(鄭昌孫)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12|조회수41 목록 댓글 0

1. 개요

조선 전기의 관료

2. 생애

1402년(태종 2) 중추원사 정흠지(鄭欽之)와 전주 최씨 최병례(崔丙禮)의 딸 사이에서 6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문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가 정창손의 조카딸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정부(鄭符)다. 1423년 사마시와 1423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1441년 사섬서령, 1443년 집현전 응교가 되었다.

2.1. 훈민정음 창제 반대

세종의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에 대해 최만리, 하위지 등과 함께 반대의견을 담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이에 세종은 본인이 기탄없이 반대의견이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말하라 했었음에도 상소를 올린 전원을 본보기로 의금부에 하루 동안 투옥시켰는데 정창손에게만큼은 파직이라는 아주 강도 높은 징계를 가했다.

보통 토론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신하들을 제압하는 세종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이때는 이례적으로 왕권을 발동시켜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논쟁 과정에서 정창손이 한 치명적인 발언 때문이었다. 또 다른 반대의견을 낸 최만리는 사대주의라는 정치적 리스크를 근거로 반대 주장을 펼쳤기에 세종도 명분상 위험요소를 인정했으나 정창손은 달랐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길,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뒤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뒤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로다."

하였다. 저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길,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임금이 또 하교하길,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 대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끝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켰다.

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 원문

말인즉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한다 해도(=백성들에게 읽히고 가르쳐도) 타고난 성품이 나쁘면 배우지 않을 것이고 좋다면 좋을 것이니 사람의 자질에 달린 것이다(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발언은 패륜, 즉 존속살인 사건을 배움의 문제라며 어리석은 백성을 쉬운 글자로 가르치면 성인군자들이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는 세종의 말에 대한 답이었다.

이 발언과 당시 대화내용은 과거 삼강행실도 반포의 대실패를 꼬집어 말한 것이기도 했다. 정인지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주상의 아픈 곳을 찔렀다.'고 할 만큼 세종의 약점을 건드려 분노하게 한 사건이었다. 또한 인본주의적 이념을 지니고 있던 세종의 입장에서 성품에 따라 정해지기에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어차피 다들 성품에 따라 갈 테니 백성들에게 배울 기회조차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정창손의 발언을 정치적, 학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성리학은 "누구나 수양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평생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중심인 학문이다. 성리학의 근간이 된 유교를 창시한 공자도 "가르침이 있을 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고 하여 누구나 바른 가르침에 의해 수양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증명하듯 빈민 출신 안회와 양아치 출신 자로를 제자로 육성해 보였다. 맹자도 사람이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한 바 있다. 그러니 정창손의 발언은 문자 그대로 공맹으로부터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근본부터 부정하고 사람의 성품을 태초에 고정한 발언이었다. 흔히 성악설로 잘 알려진 순자 역시도 사람은 본디 악하기에, 배우는 것으로 그 본성을 교정해야 한다는 이념이지 악하기에 배움을 주면 안 된다는 이론이 아니었다. 즉,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그에 따라 치르는 과거 시험으로 등용된 나라의 공직자가 그것도 유교의 정신에 따라 백성에게 새로운 글자를 가르치고 경전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고 하는 안건을 반대하며 당당하게 왕 면전에 대고 하는데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만 해도 엄청나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이와 같이 세종이 분노한 이유는 조선의 국왕은 성리학의 원리에 따라 배움을 먼저 깨우친 군자(君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으뜸인 국왕에게는 이러한 성리학 이론을 공부하기 힘든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어진 사람, 달리 말하면 인의(仁義)를 깨우친 자로 만들기 위해 국가를 운영하고 본인 역시 끊임없이 수양할 의무가 있었다. 이는 동아시아와 유럽의 사상과 체제가 구분되는 특징이다. 동아시아의 근세에 대응되는 서양의 시기가 초기 근대인데, 이 시기는 두 지역 모두 중앙집권화, 관료제, 왕권 강화가 특징이다. 그런데 유럽은 이를 왕권신수설을 통하여 왕권이 신에게서 하사 받은 절대적인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았고 때문에 홉스 같은 계몽주의 학자들 역시 왕권신수설을 옹호했다. 반대로 동아시아는 고대부터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와 군주를 동일시 했고 군주는 먼저 깨달은 자로서 백성을 가르치고 교육시킬 의무가 있던 존재였다. 동아시아의 군주, 특히 조선 국왕의 업무가 비합리적으로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의 존재 의념 자체가 이렇고 특히 공자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지언정 사람만은 버리면 안 된다며 사람을 중시했는데, 그런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이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그것도 그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공무원이 사람이 군자가 되도록 돕는 과업을 포기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후술하듯 이때 세종의 분노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정창손의 발언을 듣고 크게 노하여 "훈민정음을 통해 오히려 백성들이 효·충을 깨우치기 쉬울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세종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이고 강도 높은 '용속한 선비'라는 발언을 남겼다.

2.2. 불경 간행 반대

이후 1444년 집현전 응교로 복직되었다가 1445년 집현전 집의가 되었는데 1446년 세종이 불경 간행을 추진하자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아니 된다"라며 또다시 세종에게 강경하게 맞서다 좌천되었다. 1447년 세종에게 용서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됐으며 그 해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불교 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문을 꾸준히 올리며 대립하기도 했으나, 능력은 출중해 1449년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 등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 사후 문종의 치하에서는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학, 대제학, 병조판서를 거치며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재위 원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사헌부로부터 "정창손은 홍원용과 친척지간인데 친척끼리 업무가 연관된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일단 논란이 있으니 해결될 때까지 관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자"라는 구설수가 있었으나 단종이 나서서 피혐은 되지 않았다.

세조 때는 잠자코 있다가 성종 때 다시금 억불정책을 주장하는 등 조선 전기 억불 정책을 상당히 주도한 인물이었다.

2.3. 사육신 고발과 영의정 임명

1453년 계유정난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수양대군의 즉위 후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되어 봉원군에 봉해졌는데 1455년 사위였던 김질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꾸미다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장인이었던 자신에게 이를 고하자 세조에게 직접 고변했다. 이에 대해 세조는 그를 좌익공신 3등에서 2등이었던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으로 올려주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까지 더했으며 봉원군에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하였고 연회 때마다 술을 못마시는 그를 위해 단술을 준비하면서 항시 숙부로 예우했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생육신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시습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으나 우의정을 거쳐서 1457년 좌의정까지 올랐다. 1458년 모친이 사망하여 3년상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세조는 직접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시켜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그는 자신은 부담스럽다며 여러 번 사양했지만 세조는 일축하고 영의정 임명을 관철시켰다.

3년상을 치르고 정계에 복귀한 그는 죽은 세조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이장에게 의경(懿敬)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세조의 신임을 얻었으나 1462년 양위와 관련된 발언을 해 삭탈관직되었다가 곧 정계에 복귀해 1468년 예종 즉위 후에는 남이와 강순의 국문을 직접 맡아 그 공을 인정받고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2.4. 성종대 영의정 임명

1469년 성종 즉위 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살이 되어 정계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성종이 허락치 않았다. 남효온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1476년 성종이 중전 윤씨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폐위를 반대하였으나 성종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84세라는 고령에 영의정으로 세 번째 재임된 지 10년 만에 사직하였다.

특진관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請以火炮禳之.)"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죽기 1년 전인 1486년에는 집에 유령이 나타났다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만 본인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 듯하다. 예조 판서 유지가 "화포로 물리치자"고 한 것은 '양진'(禳鎭)이라고 불렀는데 '방술(화약)을 써서 재앙을 막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귀신이 나온다니까 대포로 잡아 보자"라고 상신했다가 성종이 반려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음기(陰氣)가 강한 귀신을 양기(陽氣)인 불(=화포)로 물리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2.5. 사망

1487년 86세로 죽자 성종은 청빈 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下賜)하였다. 그 뒤 1504년 연산군이 주도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3. 평가

관료로서의 능력만 보면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검소한 청백리로도 이름 높았던 인물이지만 상술된 "유교를 배워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발언, 훈민정음 반포 반대의견 상소와 훗날 수양대군에게 사육신을 고변한 일로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이라는 의견과 함께 대중매체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나마 눈에 띄게 부정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매체에서는 반대로 비중이 전무하다.

세종 문종시기에는 훈민정음이나 불교를 두고 목소리를 뻣대던 양반이 정작 세조때에는 쥐죽은 듯 잠잠히 있었고 다시 성종때에는 다시 불교 문제로 악다구니를 쓰는 비굴한 행보에도 비판이 많다.

정치적인 이유도 컸다지만 세 치 혀 하나로 세종에게 파직되는 위엄을 보여준 인물이라, 황희와 조말생이 이렇게 쉬운 길 놔두고 고생만 했었다는 드립도 있다. 다만 정창손도 성종 시절까지 사직 요청을 여러 번 했음에도 늙어 죽기 직전까지 여러 번 무시당하긴 했다.

거기에 청백리도 세조때 관료중에 그나마 청백했다고 받아들이는 게 정설이지 세조 말기 계유정난 때 연좌된 공노비를 해방할 때 정창손을 지목하며 정찬손의 노비가 많이 해방되었음을 지적하거나, 김진지 뇌물사건때 정창손도 받아먹은 것으로 추정되는 등 일반적인 청백리로 보기는 어려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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