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황제의 권한을 손상시키는 자는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
1899년 대한국 국제를 만들 당시 강조했던 말
구한말의 수구파, 친러파 출신 정치가, 관료.
이 사람의 양자로 입적한 윤철구를 통해 이어지는 집안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외척이자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자들이 나왔다. 윤철구의 아들이 윤덕영, 윤택영 형제이고, 윤택영의 딸이 순종의 계후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이다. 윤용선에게는 증손녀뻘이 된다.
2. 생애
1829년 이조참판과 한성부 좌윤 등을 역임한 윤명렬(1762 ~ 1832)의 손자이자 형조판서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윤치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8년 생원시에 3등 29위로 급제하였고 1885년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 22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겪고 1896년 아관파천 직후 성립된 친러정부에 보수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탁지부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아관파천 후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내각총리대신에 오른 김병시가 사임하자 4월22일 내각총리 대신으로 취임하였다.
대표적인 친러보수 내각이었지만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이 총리직을 폐지하자 이후 사임하였다.
1897년 3월 새로운 법전 편찬을 위해 신설된 교전소의 부총재 대원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내각이 폐지되고 의정부 체제로 회귀하면서 의정부 서리에 임명되었다.
1898년 9월 황제와 황태자에게 독이 든 커피를 진상한 독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맹공격을 받아 탄핵 대상으로 지목되고, 체직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보수 내각이 재집권한 뒤 의정부 의정에 임명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작위를 받았다. 윤용선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주로 보수적 성향을 나타내던 정부의 요직에서 주요한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독립협회에게 심순택이 탄핵당하자 바로 의정에 취임하였다. 윤용선 의정부는 황제법을 강화하고 그후 대한국 국제를 만들었다. 그 후 의정을 수차례 역임하였다.
첫째, 궁금을 엄숙하게 할 것입니다.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공적인 일을 빙자해서 사적인 것을 도모하여 폐단이 너무 많으므로 매우 통탄스러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종친과 외척은 모두 촌수를 한정하였고, 학식있고 단아한 선비라도 특별히 부르는 일이 없으면 알현할 수 없는 것이 조종조의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애당초 자격이 없는 조신들과 사방의 부잡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궁궐에 출입하여도 거의 막지 않으니, 기밀이 누설되고 위엄이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관리와 액속들을 엄히 금하고 살펴서 비록 각부 관리라도 공적인 부름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종친과 외척도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야 들이는 옛 법을 거듭 밝히소서. 만약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의정부가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둘째, 잡세를 없애고 관리를 파견하는 것도 없애소서. 갑오년 이후 누차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금을 다방면으로 걷어 들이고 명목도 한 두가지가 아니며 사방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온갖 침학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속히 칙령을 내리셔서 모두 폐지하게 하소서. 만일 경비가 궁색하여 잡세로 보충하려고 하면 그 권한을 전적으로 탁지부에 주어 탁지부가 덜 것은 덜고 징수할 것은 징수하게 하여 그 징수한 재물을 마땅히 써야 될 비용에 이획한다면 백성을 착취하거나 중간에서 착복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독쇄관, 위원, 파원등 허다한 관원은 폐단 위에 폐단만 더하게 되니 모두 없애버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1900년 의정 윤용선의 상소
궁금이 문란한 것은 과연 한탄스럽다. 무릇 종친과 외척, 조신들의 출입하는 규정은 궁내부로 하여금 옛 법을 거듭 밝혀 시행하게 하라. 독쇄관 같은 관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더없이 급한 일이다
고종의 답변
“이 당시에 별입시의 명목이 날로 늘어나 청별입시, 계별입시, 지별입시 등이 있었다. 청별입시는 청에 오르는 자요, 계별입시는 뜨락에 나열해 있는 자, 지별입시란 마당에 서 있는 자이다. 위로는 대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당과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황제는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이 알현할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에 입시한 사람들은 황제는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알현하곤 하였다. 어느 곳에는 광산이 난다, 어느 곳에는 수리가 있다, 어떤 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하면 고종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러나 평안도는 백성들이 사나워서 파견된 관원들이 누차 쫓겨나거나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오직 영남과 호남지방이 화를 당하여 백성의 원성이 날로 드높았다. 이때 윤용선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억지로 이런 상소를 하였다
황현의 저서 <매천야록> 中
그의 의정임기 동안 러시아와 가까이 지냈고 그로 인해 독립협회와 크게 대립했었다
1903년 이근명의 뒤를 이어 다시 의정으로 복귀했지만 2달 뒤 사퇴하고, 1904년 병세악화로 사망하였다.
2. 여담
위 프로필 사진이 김윤식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같은 항렬(22세손 ○선(善) 항렬)이지만 나이 차가 68세나 난다. 이는 윤보선의 증조부 윤취동이 56세의 나이에 윤보선의 조부 윤영렬을 얻었고, 7대조 윤채가 6대조 윤세겸을 65세에 보는 등 윤보선의 직계(윤두수의 차남 윤흔 계열)에서 심한 늦둥이가 두번이나 생겼기 때문에 동렬임에도 이 정도로 나이가 벌어진 것이다. 당장 윤용선의 아버지 윤치희는 1797년생으로 같은 항렬의 윤보선 계열 친척인 윤치호, 윤치영과는 무려 67세, 101세나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