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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인물

이감(李敢)

작성자太石 安極鎬|작성시간26.06.22|조회수30 목록 댓글 0

1. 개요

고려 말기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의민(義民), 호는 문간당(文閒堂). 사후 국가로부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여말선초의 격동기 속에서 정몽주의 우익으로 활동하며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대립했으나, 조선 건국 후 실력을 인정받아 사헌부 대사헌, 승정원 도승지 등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특히 지극한 효심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영천 임고서원에 배향되었다.

정몽주 세력의 핵심 대간으로서 조선 건국 세력과 대립하다 유배를 가기도 했으나,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조선 왕조에서 대사헌, 도승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각각 3년씩, 도합 6년 동안 묘 옆에서 움막을 치고 산 시묘살이(廬墓)로 이름이 높았다.

2. 생애

2.1. 고려 말기: 대간 활동

1362년(공민왕 11) 임인년 출생. 1380년(우왕 6) 사마시,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나아갔다.

사헌부 규정(糾正) 시절부터 대간으로서의 강직함이 돋보였다. 1390년(공양왕 2), 풍저창(豐儲倉) 분대(分臺)로 근무할 당시의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공양왕이 환관과 부녀자들에게 사사로이 상을 내리려 하자, 이감은 창고에 있는 좋은 쌀 대신 썩은 보리를 내어주며 왕의 명령에 항거하였다. 이에 분노한 왕이 "어찌하여 내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묻자, 이감은 "집을 다스리는 자도 절약하는데 하물며 임금이 사사로이 상을 주어 창고를 비우는 것이 옳겠습니까?" 라며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 일로 환관들의 참소를 사 가노(家奴)가 투옥되고 본인은 현(縣)의 감무(監務)로 좌천되었다.

[군주의 도리(道理)를 묻다: 공양왕 미행 탄핵]

1391년(공양왕 3), 이감은 사헌부 규정(糾正)으로 재직하며 다시 한번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상소를 올린다. 발단은 공양왕의 미행(微行)이었다.

당시 공양왕은 번거로운 의장(儀仗)을 생략하고 비공식적으로 궁궐 밖을 나섰는데, 이감은 이를 군주의 위엄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행위이자 국가 기강의 해이함으로 간주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임금은 한 나라의 근본이며 그 위엄은 법도와 예절에서 나옵니다. 비록 사사로운 걸음이라 할지라도 의례를 갖추지 않고 미행하는 것은 군주로서의 도리가 아니며, 나라의 법식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이감의 비판은 단순히 예법의 문제를 넘어, '임금조차 국가의 공적인 시스템(예법)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론이었다. 이미 풍저창 사건으로 이감을 눈여겨보고 있던 공양왕과 주변 환관들에게 이 상소는 대단히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이감은 "임금을 능멸하고 예의가 없다"는 참소를 당해 다시 한번 지방의 실무직인 감무(監務)로 좌천되는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두 번이나 계속된 좌천에도 불구하고 이감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철저한 원칙주의는 훗날 조선 건국 세력에게도 "적이었지만 실력과 강단만큼은 확실한 인물"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2.2. 1392년: 선죽교 사건과 유배

1392년(공양왕 4) 봄, 고려 왕조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 이감은 사헌부 좌헌납(左獻納)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당시 정계는 이성계를 옹립하려는 신진 세력과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 세력의 마지막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 조준·정도전 탄핵]

4월, 정몽주의 지시를 받은 이감은 김진양, 이확 등 동료 대간(臺諫)들과 함께 목숨을 건 승부수를 던진다. 이들은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 이성계의 핵심 수뇌부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이감은 이들을 "비천한 가문 출신으로 감히 나라의 권세를 훔치고, 공신을 사칭하며 불충한 모의를 일삼는 무리"라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이 서슬 퍼런 탄핵 상소는 결국 받아들여졌고,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의 '우익'들은 줄줄이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선죽교의 비극과 상황의 역전]

그러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4월 4일,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되자 권력의 추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정몽주라는 거목이 쓰러지자 그를 도왔던 대간들은 즉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감 역시 '정몽주의 당여(黨與)'라는 꼬리표와 함께 반대파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된다.

[조선 건국과 죽음의 문턱]

7월,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이성계가 즉위했다. 즉위 직후 발표된 교서에서 이감의 이름은 다시 한번 언급된다. "우현보, 이색 등과 당여를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하고 현명한 이들을 모해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관직(직첩)을 몰수당하고 장(杖) 70대를 맞는 처벌을 받게 된다.

당시 형관(刑官)들과 대간들은 "반란을 꾀한 자들이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며 이감을 포함한 나머지 모두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이때 태조 이성계가 뜻밖의 자비를 베풀었다. "이들은 정몽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목숨까지 빼앗을 필요는 없다"며 직접 감형을 지시한 것이다. 태조실록1권, 총서 131번째 기사

이성계의 이 한마디 덕분에 이감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날 수 있었다.

2.3. 조선 초기: 관직 복귀와 영전

태종 즉위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 정계로 복귀하였다.

1410년(태종 10):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감찰 업무를 수행했다. 태종실록19권, 태종 10년 2월 13일 경술 1/2 기사

[박초(朴礎) 탄핵 사건]

1417년(태종 17), 사헌 집의(執義)로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당시 뇌물죄(장죄)를 지었던 박초가 의주 목사에 임명되자, 이감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렸다. 태종실록33권, 태종 17년 윤5월 23일 무인 2/2 기사

"나라의 관록은 임금이 현명한 인재를 대우하는 수단입니다. 의주는 명나라와 접한 국경이자 나라의 자물쇠(管鑰)와 같은 요충지인데, 어찌 탐오(貪汚)하고 염치없는 도둑질꾼에게 이런 중책을 맡기십니까?"

작록(爵祿)은 임금이 어진 인재를 대우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사람을 쓸 때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주 목사 박초는 전날 선공감 승(繕工監丞)으로 있을 때 스스로 장죄(贓罪)를 범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해당 관서에 명하여 실상을 조사하게 하시니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나, 특별히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셔서 자자(刺字)를 면해주시고 사류(士流)의 반열에 끼게 하셨으니, 그 입은 은혜가 이미 한도를 넘었습니다. 그 뒤에 자급(資級)을 올려주시고 수군 도만호로 발탁하셨으며, 또 몇 년 만에 특별히 제주 목사로 임명하셨습니다. 신 등이 상소하여 고집하니 전하께서 즉시 허락하시어 그 직책을 파면하셨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의주 목사로 임명하시니, 어찌하여 전날에는 파면하시고 오늘날에는 다시 임용하시는 것입니까? 박초의 사람됨은 성품이 본래 탐오(貪汚)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라 사람들은 다만 그가 일찍이 관의 물건을 도둑질하여 참으로 장죄를 범했다는 것만 알 뿐이고, 선으로 옮겨 허물을 고친 실상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홀로 의심 없이 기용하시어 범죄 이후 겨우 12년(一紀)이 지났는데 다시 주 목사(州牧)를 시키시니, 비록 공정하고 청렴하며 직무를 삼가 지키는 자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의주는 상국(명나라)과 경계가 접하여 왕래하는 사신이 거쳐가는 길목이니, 참으로 이른바 나라의 자물쇠(管鑰)입니다. 공정하고 청렴하며 명망 있는 자로 시켜도 오히려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박초 같은 자이겠습니까? 의주 목사는 전하께서 전날에 반드시 조정의 명망 있는 신하를 가려서 시키셨으므로, 그 임무를 맡은 자는 비록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돌보지 않고 가더라도 꺼리지 않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전하의 선택이 중하고 임무가 융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도둑질한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시니, 전임 목사들과 앞으로 박초의 뒤를 이어가는 자들이 어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박초에게 세상을 덮을 지혜와 뛰어난 용맹이 있어 위급한 시기를 당했다면 그 행실을 따지지 않고 쓰는 것이 혹 괜찮겠으나, 박초의 보잘것없는 재주가 어찌 오늘날 쓰기에 족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직책을 파면하고 전리로 돌려보내어,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가 되어 장죄를 범한 자는 비록 장점이 있더라도 세상에 쓰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소서.

태종은 "사람이 허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고치는 법인데, 박초라고 안 고쳤겠느냐?"라며 이감을 타일렀지만, 이감은 "그가 선을 행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태종이 끝내 이감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不聽), 대간으로서 '장죄를 지은 자는 세상에 다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추상같은 원칙을 보여준 일화로 평가받는다.

이후 성주 목사, 밀양 도호부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승정원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 등 조선 왕조의 핵심 요직을 역임하였다.

3. 여담

[조운흘과 주고 받은 시]

조선 초기의 문신 조운흘(趙云仡)의 문집인 『용헌집(龍憲集)』에는 이감과 관련된 시가 한 수 실려 있어, 당시 관료들 간의 우애와 문학적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병조 정랑인 두 동년(同年) 이실(李室)과 이감(李敢)의 시에 차운하다]

삼 년 동안 대동강 강가의 길손 되어 / 三年爲客大同湄

동쪽으로 송악산(松嶽山) 보며 그리워하였었네 / 東望松山有所思

자하동(紫霞洞)이 선계임을 일찍이 알았는데 / 紫洞早知仙境界

유람하는 나는 두 구름이 합쳐지길 기약하네 / 遊人應與兩雲期

배경: 이 시는 조운흘이 과거 합격 동기(同年)인 이감과 이실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답시를 보낸 것이다. 당시 이감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재직하며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미: 대동강과 송악산, 자하동 등을 언급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동기들에 대한 그리움과 다시 만날 기약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이감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격동기 속에서도 동료 문인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사관 임용 관련 무함 사건]

1421년(세종 3, 영락 19) 이감이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재직하던 시절, 사관(史官) 임용을 앞둔 한 인물의 인사 문제와 관련하여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사관으로 선발될 예정이었던 한 인물이 아내(한씨)를 내쳤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아내의 매부였던 김주(金宙)가 당시 성주 목사였던 이감과 친분이 두터웠다. 김주는 이 친분을 이용해 이감에게 해당 인물의 부당함을 호소했고, 이 과정에서 이감이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유언비어)을 형성하거나 사주했다는 무함을 받게 되었다.

이 소문이 결국 사관을 선발하는 예문관(藝文館)에까지 알려지면서, 해당 인물은 결국 사관으로 제배(除拜)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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