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구한말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2. 약력
1870년 문과 급제
1871년 한림 역임
1874년 정3품 승진
1880년 대사성, 종2품 승진
1886년 이조참판 역임
1894년 의주부윤, 좌승선 역임
1895년 궁내부특진관, 춘천부관찰사 역임
1897년 영선사장, 정2품 승진
1898년 비서원경, 의정부찬정 역임, 내부대신 역임
1899년 중추원의관, 시종원경, 장례원경, 홍문관학사 역임
1901년 태의원경 역임
1902년 경기도관찰사 역임
1903년 대광보국, 의정부의정 겸 태의원도제조, 령돈녕원사로 이임
1904년 재차 의정에 임명
1905년 1등태극장 서훈
1906년 봉상사도제조 역임
1907년 대훈이화대수장으로 승격, 규장각기후관 역임
3. 생애
1859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1870년 7월 석제 문과(夕製文科)에 급제하였다. 1871년 한림(翰林)에 보임되었고, 1874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880년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가선대부에 올랐다. 1886년 이조참판에 보임되었고, 1892년 가의대부에 올랐으며, 1894년 3월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갔다.
같은 해 11월 좌승선(左承宣)으로 자리를 옮겼고, 1895년 4월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7월 춘천부 관찰사로 전임되었으며, 1896년 8월 평안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897년 9월 영선사 사장(營繕司社長)으로 옮겼으며, 10월 자헌대부에 올랐다. 12월 궁내부 특진관을 제수받았고, 1898년 3월 비서원경에 올랐다. 4월 의정부 찬정으로 전임되었으며, 8월 내부대신의 요직에 앉았다. 1899년 5월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고, 11월 시종원경에 보임되었다. 12월 장례원경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정헌대부에 올랐다.
홍문관 학사에 보임되었다가 1900년 7월 시종원경이 되었고, 신축년(광무 5년) 4월 태의원경에 임명되었다. 1902년 2월 경기도 관찰사로 전임되었으며, 1903년 1월 홍문관 학사로 다시 옮겼다. 같은 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특별히 승진하였으며, 다시 의정부 의정에 임명되고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임하였다.
그해 5월에 임무를 마치고 물러났으나, 8월에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에 임명되었고, 9월에 다시 의정에 제수되었다. 1904년 1월에 사임하였고, 같은 달 세 번째로 의정에 올랐으나 3월에 상소를 올려 물러났다. 11월에 이르러 네 번째로 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905년 1월에 해임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일본군에게 구금되었으며, 4월 훈1등 태극장을 특별히 받았다. 1906년 1월 봉상시 도제조(奉常司都提調)가 되었다. 4월 영돈녕사사로 옮겼고, 1907년 3월 대훈위에 올라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그 이후로 일제에 순응하여 국권피탈에 협력하게 된다.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사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민영규와 함께 국기를 들고 앞길을 인도하여 숙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고, 같은 해 11월 규장각 지후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대한산림협회의 명예회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3월에는 친일단체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에 동조하는 협성회를 발기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조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에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에는 경성협찬회에 기부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6월 사망했고 같은 해 9월 손자 이충세(李忠世)가 그 작위를 습작한다.